특별기고
11.3학생독립운동과 의향(義鄕) 나주
박진우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시기획팀장
지난 3월 10일 나주시청소년수련관에서는 ‘뜻 깊은’ 교육이 열렸다.
필자가 여기서 굳이 ‘뜻 깊은’을 강조한 것은 두 가지 의미 때문이다. 먼저, 일제의 식민통치가 20년간 지속되던 1929년, 우리고장 나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을 주제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나주를 대표해서 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문화유산해설사를 대상으로 한 첫 ‘학생독립운동’ 교육이었다는 것이다.
학생독립운동은 흔히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전개된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지금부터 80년 전인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5분경 나주역에 통학생을 포함한 30여 명의 승객들이 하차하였다. 개찰구에서 광주중학교 복전수삼(福田修三) 등 3명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박기옥, 이광춘 등 여학생들을 밀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보 2학년생인 박준채가 복전을 꾸짖었고 언쟁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복전이 “조선인인 주제에”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자 격분한 박준채가 구타하여 서로 격투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1․3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하였다.
11월 3일, 이날은 당시 우리민족 최대 명절 가운데 하나였던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이자 일요일이었지만 학생들은 학교에 나가 명치절(일본의 근대화를 시작한 명치천황의 생일) 기념식에 참가해야 했다.
학교에서 열린 명치절 기념식에서 기미가요(일본국가)를 부를 때 침묵으로 저항하던 광주고보생들은 신사참배도 거부하고 시내로 나와 곳곳에서 충돌했다. 그런데 이 시위는 이날에만, 그리고 광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광주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학생독립운동은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全조선으로, 또한 해외까지 번져나갔다. 즉, 나주에서 시작된 작은 독립의 불씨가 무려 5개월 동안 광주를 거쳐 전국 적인 독립운동으로 불타오른 것이다.
그런데 나주인들은 단지 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광주로 통학하던 나주학생들은 10월 30일 발생한 나주역 사건에 이어 11월 3일의 1차 시위와 11월 12일의 2차 시위 다음해 1월 8일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 등에 앞장섰다.
또한 신간회 나주지회와 나주청년동맹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던 박공근은 11월 27일 농업보습학교 학생들과 나주공립보통학교 5,6학년 학생 25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성공시킴으로써 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데 기여했다. 나주인들은 한마디로 학생독립운동의 발생과 확대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2009년은 학생독립운동이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학생독립운동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나주시민을 대상으로 한 ‘학생독립운동’ 교육을 제안한다. 그 장소가 학교든, 직장이든, 아파트 부녀회든 상관없이 우리의 삶을 있게 한 교육을 해보자. 그리고 나주를 찾는 외지인들에게 ‘학생독립운동’을 알리자. 이 알리는 역할이 어찌 문화유산해설사만의 몫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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