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하든가, 음악에 취하든가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에도 술에 만취해 들어온 남편,
“권양숙 여사는 어떻게 살까? 자기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할 것인디... 옆에서 잘 지켜야제, 안 그랬다간 큰일 날 것인디...”
바보 같은 남편, 권양숙 여사 큰일 날 것은 걱정하면서 즈그 여편네 가슴 멍들어있는 건 생각지도 못하나보다. 다른 일에 골몰하다가도 어느 한순간 눈자위가 뜨거워지면서 주체할 수없는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자기야 술로 구멍 뚫린 가슴을 채우려 한다지만 마누라는 술 마실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가슴애피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남자와 살아보니 그들의 생리를 알 것 같다.
그들은 괴로운 일, 귀찮은 일이 있으면 도피를 생각한다. 여자를 사귀다 처가 될 집에서 반대하니까 어디론가 사라졌다 돌아온 셋째오빠도 그렇고, 결혼을 반대하는 시아버지에 항거해 일주일 동안 가출을 한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는 셋째 시숙이나, 밤이면 밤마다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얘기 나눌게 뻔한데도 하루도 건너뛰지 못하고 술독으로 숨어드는 남편도 그렇고.
그런데 나는 요즘 유독 음악에 집착한다.
한참은 우울한 음악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경쾌한 음악을 찾고... 다시 가슴 저리는 음악으로 빠져든다.
그냥 눈에 보이는 세상이 괴로울 뿐이다.
나를 취하게 해 세상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게 음악일 뿐이다.
지난 토요일, 제법 큰 행사에서 진행을 맡게 됐는데 마음 속에서는 끊임없이 “도망가! 도망가!” 외침이 울린다. 결국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마야 보그다노비치 첼로 콘서트...
광주극장에서 콘서트와 영화상영을 동시에 마련했다. 광주극장은 우울한 기분으로 숨어있기에 딱 좋은 곳이다.
어두컴컴한 극장안이 들키지 않고 마음껏 울 수 있어서 좋고, 설령 유쾌한 장면이 나오더라도 옆 사람 의식하지 않고 킬킬댈 수 있으니...
의자 깊숙이 앉아 이방여인의 첼로연주를 듣는다.
첫 곡으로 포레의 로망스, 빠삐용, ‘엘레지’를 마친 뒤, 첼리스트가 뭐라 한다.
쏼라쏼라...뭐라뭐라...프레지던트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는 뜻인가 보다
음악 한 곡 듣는 것 이상으로 감동한 관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처음 듣는 마뉴엘 드파야의 스페인 민요소품곡, 슈만의 민요풍 곡,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유일한 첼로소나타 사단조...
격정과 위안과 해소의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은 라면국물 한 모금, 아침은 커피 한 잔, 점심은 김밥 한 줄이 고작이다.
난 왜 음악을 들으면 허기질까 생각했는데, 허기질만도 했다.
때론 허기짐이 나를 빈곤하게 만들어 생각의 깊이를 더 하게 해줄때가 있다.
그 허기짐을 안고 미국 영화 ‘The Visitor'를 만난다.
아들은 머나먼 영국에 유학중이고 아내는 더 먼 곳으로 떠나보낸 뒤 아내의 유일한 유품인 피아노와 씨름하는 중년의 대학교수 월터.
강의라고는 20년째 똑같은 과목 단 한 강좌. 동료교수의 논문 공저자로 이름만 빌려주었을 뿐이지만 사회적으로 유수한 대학의 교수인 그는 가슴 속의 그늘을 숨긴 채 때로는 학생들에게 원칙과 규율을 강조하는 단호한 교수로, 그러면서 연구와 저술활동에 바쁜 척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일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바쁜척, 무슨 중요한 일이나 하는척...)
하지만 그가 원치 않는 출장길에 뜻하지 않은 불법이민자 두 명과 동거생활을 하게 되면서 아프리카 드럼인 젬베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불법이민자인 그들의 고통과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랑스런 미국의 이민정책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진행되면서 결코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법이민자 수용소에 갇힌 아들을 찾아내기 위해 방문한 중년의 시리아 여인과 하룻밤. 하지만 그 여인은 “당신은 쿨(cool)한 사람이니까 참아낼 거라 믿어요.” 이 한마디를 남기며 남편을 빼앗아 갔던 자신의 조국 시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아들이 홀로 그 곳으로 추방당했기에...
월터...
그의 방황은 이방인 친구와 추억을 나누었던 뉴욕의 지하철에서 젬베를 두드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리지만 아마도 그는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쿨한 사람이라도 가슴에 난 상처가 쉽게 아물 수는 없는 거니까.
나는 가슴에 그의 상처까지 떠안고 돌아와야 했다.
Sergej Rachmaninoff (1873-1943)
Cello Sonata in G minor, O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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