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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

남도회화 100년의 전통과 정신 '남도묵향 내일을 가다'

by 호호^.^아줌마 2012. 2. 11.

광주시립미술관, 남도회화 100년의 전통과 정신

 

남도묵향 내일을 가다展, 2월19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관장 황영성)이 남도회화의 전통을 보존하고 맥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남도 묵향 내일을 가다>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남도 전통 양식의 한국화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 어떻게 계승되고 발전되어 왔는지 미술사적 자료 조사와 연구를 기반으로 마련됐다.

 

남도의 소중한 자산인 전통 남종화의 맥을 잇는 작품과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은 작품을 보면서 남도 한국화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에 남도 한국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320페이지의 연구도록을 12월 중순에 발행하여 남도 한국화를 국내에 널리 알리고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전시 구성은 근·현대 남도 한국화가들의 작품을 1, 2부로 나누어 남도의 전통 양식 미술의 계승 발전과 새로운 시대 양식의 작품으로 분류하였다.

 

제1부 전시는 조선시대 말기와 근대화단의 남종화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남도의 1, 2세대의 작가 작품과 남도 동국진체 작품. 남종화 전통의 예술형식, 정신과 자연을 접하는 태도, 독창적 조형어법 등을 통해 전통회화의 독고창신의 새로운 법에 대해 알 수 있다.

 

제2부 전시는 3세대에 해당하는 남도화의 맥을 잇고 있는 작가들로 전통 남종화의 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형적 형식과 다각도로 해석한 특색 있는 작품을 볼 수 있다. 또한 남도 진경의 본질미, 채색화와 모더니즘을 수용한 다양한 남도 한국화 작품에 대해 감상 할 수 있다.

 

남도 한국화 전시를 통해 그동안 현대미술에 치우쳤던 시민들의 관심을 되돌려 남도 한국화의 찬란한 역사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보편적 정신 속에서 작가 개개인의 저마다 다른 생각 차이를 작가적 역량을 모아 작업한 작품은 침체되어 있는 남도화단에 한국화 전통의 계승과 비전을 새롭게 모색하고 활로를 열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 전시개요 -

 

○ 전 시 명 : “남도 묵향 내일을 가다”- 100년의 전통과 정신

○ 전시기간 : 2011. 11. 24(목) ~ 2012. 2. 19(일)

- 제1부 : 남도화의 전통(2011. 11. 24 ~ 2012. 1. 1)

- 제2부 : 남도화의 현대적 계승(2012. 1. 10 ~ 2. 19)

○ 전시장소 : 광주시립미술관 3, 4전시실

○ 초대작가 : 남도 한국화가, 서예가 120여명

 

- 전시구성 -

 

<1부>

- 남도 한국화 뿌리

허련, 허형, 허백련, 허행면, 허건, 정운면 (도록만 : 윤두서, 윤덕희, 윤용, 김정희)

 

- 의재계

이범재, 허규, 김옥진, 문장호, 장찬홍, 박소영, 박행보, 양계남, 오우선, 이강술, 이계원, 이상재, 이창주, 최덕인, 허규, 허달재, 허대득, 허의득, 허정두

 

- 남농계

조방원, 신영복, 김명제, 김천두, 곽남배, 곽권옥, 문흥록, 박익준, 박항환, 박광식, 손기종, 윤의중, 이옥성, 하철경, 허문

 

- 독자

김형수, 김대양, 임병성

 

- 남도 동국진체

윤순, 이광사, 손재형, 안규동, 구철우, 고기임, 류봉자, 조기동, 서기환, 이규형, 이돈흥, 조용민, 하남호

 

 

 

<2부>

- 남도 채색전통과 모더니즘 미술 수용

허림, 김정현, 천경자, 조복순, 장덕, 신방우, 안동숙, 강종래, 김한영, 김대원, 김종경, 류현자, 박윤서, 서남수, 윤애근, 위성만, 임종두, 장현우, 정인수, 주재현, 천명언, 하운수, 하완현, 허진

 

- 남종화 창조적 발전

강행원, 구지회, 김송근, 김영삼, 김재일, 김천일, 노경상, 박도승, 박문수, 박은용, 박종석, 박태후, 박희석, 배교연, 백현호, 오견규, 윤남웅, 이구용, 이민식, 이선복, 이병오, 정경춘, 정성봉, 정명돈, 정평남, 조광익, 조광섭, 허임석, 홍정호

 

- 민중미술 수묵화 운동

김경주, 김진수, 박문종, 하성흡, 허달용, 홍성민

 

※ 문의 :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 062)613-7144

 

 

남도 한국화 뿌리와 정신

- 오병희(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근대 이전 전통 사회에서 예술 활동은 문인사대부의 문사철(文史哲)에 바탕을 둔 시·서·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남도는 문장에 있어 가사, 글씨에 동국진체, 그림에 있어서 남종화의 예향이다. 우리 미술관은 남도 회화 전통의 의미를 살펴보고 맥을 계승하기 위하여 <남도묵향 내일을 가다>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전시는 1, 2부로 나누어 1부는 조선 말기와 근대화단의 남종화와 채색화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남도의 1, 2세대 작가의 작품과 남도 동국진체의 작품을 볼 수 있다. 2부는 3세대에 해당하는 원로와 중견 작가들을 중심으로 남도의 진경산수, 채색화와 민중미술 수묵화 등 시대 철학과 정신을 담은 남도 한국화로 구성하였다.

 

1부는 조선후기부터 근현대까지 남종화풍의 남도 한국화로 천리(天理)를 담은 순수성을 표현한 그림이다. 예술에 있어 순수하고 순정한 사유를 기본으로 인간의 윤리성을 강조한 맑고 담박한 것을 담아내며 보편적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다. 소치 허련이 추사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 남도 남종화가 본격화 되었다. 허련의 화풍은 허백련에게 계승되어 근·현대까지 남도 전통회화의 발전과 전개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허건은 남종화 기법과 현실적 사생이 조화를 이룬 남도 한국화의 다른 축이다. 허백련의 남종화는 광주를 중심으로 많은 제자를 육성하였고 허건은 목포를 중심으로 후학들을 배출시켜 남도의 화맥을 형성하였다. 또한 동국진체를 통해 남도에서 서(書)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2부는 1970년대 이후 남종화의 기법과 정신을 바탕으로 남도 전통의 고유미를 살린 작품과 실경을 그린 진경산수화로 구성하였다. 남도 한국화의 1, 2세대를 뒷받침하고 있는 3세대 작가들은 남종화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킨 작가들로 남도의 전통 남종화를 재해석하여 먹의 담백함을 표현하고 현대적 감각을 혼합하여 개성적인 화풍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받은 민중 수묵화 운동은 시대의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을 지니고 있다. 허림, 천경자 등 채색화 전통도 남도 한국화단의 한 축으로 시대를 반영하는 철학과 결합되어 남도 한국화의 다양성을 이루었다. 남도 한국화 전통에 감성적인 색을 넣어 기(氣)를 강조한 채색화 작품은 아름다움과 대중적인 친근함을 표현하였다. 감각적인 현대사회 속에서 달콤하고 화려한 색채를 먹과 함께 사용한 독창적인 기법으로 남도 한국화의 중요한 다른 흐름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전통수묵화의 미술사적 가치를 되돌아보고 비전을 새롭게 모색하여 남도한국화 발전과 계승의 활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도 작가들이 진경산수와 현대적인 감각의 채색을 사용하여 기존의 남도 한국화를 발전시킨 새로운 양식의 작품이 한국 미술사에 차지하는 위치를 규명하고자 한다.

 

1. 남도 남종화 뿌리

 

일반적인 남종화 정의는 문인 사대부들이 먹이나 먹을 바탕으로 엷은 채색의 그림으로 화려한 색감의 북종화와 구별되며 사물의 형태(形似)에 치우치지 않은 정신을 그린 것이다. 남종화는 불교미술과 함께 동양의 중요한 미술 분야로 자연의 표현인 동시에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지니고 있는 자연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동양에서는 자연이 무생명의 존재가 아니라 인체처럼 살아서 생동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그러한 자연을 표현하는 산수화는 기운생동 해야 한다는 생각이 예로부터 전제되고 있다. 남종화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지니고 있는 경외심의 관상적 표현인 동시에 대자연의 기운을 인간의 마음속에 담아 표현해 낸 회화예술의 본질이다.

 

중국, 일본, 한국에 있어 남종화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전통은 조선시대는 물론이거니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회화를 남북종화로 나누어 보기 시작한 것은 명대로 동기창, 막시룡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체계화되어 문인출신 일 것, 순수하게 사의적일 것, 미법 산수화풍이나 동원, 거연의 화풍을 계승 할 것 등의 조건을 갖춘 것으로 정의되어졌다.

 

한국에서 전통사회 직업화가들 사이에서 정형화된 미법산수나 동거의 화풍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져 출신 성분만으로 남북종화를 나눌 수 없어 남종화란 출신 성분과는 상관없고 동원, 거연, 미불, 미우인, 원대사대가, 명대 오파와 그 영향 아래의 청대 화풍을 토대로 한 화풍을 지칭한다. 문기를 중시하기보다는 양식적인 측면이 중요하여 양반사대부들은 물론 궁중전문화가 등 다양한 계층이 전통 방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남도 남종한국화는 18세기 초 남종산수화와 풍속화를 그린 공재 윤두서, 조선말기 사의 지상주의를 표방한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으로 이어진다. 조선후기 공제 윤두서는 조선 후기 삼재(공재, 겸재, 현재) 중의 한 사람으로 진사시에 합격한 사대부 화가이다. 윤두서는 화론인 ‘기졸(記拙)’을 통해 사의(寫意)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한 문인화가임을 알 수 있다. 풍속화와 남종화법의 산수화를 그린 윤두서의 화풍은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에게 전해져 하나의 가법을 이루게 되었다.

 

윤두서의 <평사낙안도>은 고씨 화보를 통한 남종화 기법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손자인 윤용은 가법을 계승하면서 남종화법을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남도 남종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이다. 전대의 서화가의 ‘법(法)’을 비판하며 자기의 법(法)을 이론화한 미의식을 전개하였다.

 

추사의 그림은 사물이 아닌 사물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인간이 도달한 격(格)의 경계를 보여주며 문인사대부의 예(禮)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조선말기 추사에 의해 문기와 서권기를 중시하는 남종화풍이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고 추사의 예도는 남도를 중심으로 계승되어 남종문인화의 명맥을 잇고 있다.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조선말기가 차지하는 비중과 의의는 현대 화단을 위한 하나의 바탕이 되었으며 이는 소치 허련이 있기 때문이다. 허련은 27세때 해남 녹우당 윤두서의 그림에 감동을 받았으며 윤두서 집안의 화풍을 익히게 된다. 허련은 다도(茶道)에서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 소개로 1839년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김정희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남종화의 대가로 성장한 허련은 김정희의 이론과 필치를 계승하여 남종문인화를 남도에 정착시킨다. 허련은 원나라 남종화의 대가인 황공망과 예찬을 비롯한 방대한 중국의 남종화를 바탕으로 주로 갈필을 쓰고 농채를 기피하며 사의적 세계에 진솔하게 접근하고자 하였다.

 

인물, 소나무, 매화, 모란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으며 헌종(憲宗) 앞에서 그린 <산수화첩>을 비롯한 많은 산수화를 남기며 남종화 세계를 지향하였다. 허련의 화풍은 미산 허형으로 전해졌으며 허형은 사군자와 흑목단을 잘 그려 수작을 남겼다. 미산 허형은 소치의 화법을 충실히 본받은 남종화풍의 산수화와 매화, 모란, 소나무 등을 수묵 또는 수묵 담채로 그렸다. 허련의 남종화풍은 허형을 거쳐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에 이어졌으며 이후 허백련과 허건에 의해 많은 남도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 남종화 전통계승

 

근현대 우리나라 남종화의 전통은 허백련, 허건에 이르러 각각 독자적 영역을 일구어냄으로서 결실을 거두었다. 허백련은 전통적인 남종화에 충실하면서도 때로 남도의 실경을 화면 속에 끌어들이는 변화를 즐기고 있다. 허건은 초기 사경에 충실한 경향도 보이나 남종회화의 형식미와 고전미를 추구하였다.

 

허백련은 미산 허형에게 산수를 배웠으며 전통 남종화를 추구하였다. 의재산인 시절 때 허백련은 전통 남종화를 바탕으로 남도 지방의 풍광에서 얻은 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결합한 남도 남종화풍을 정착시켰다. 남도 지방의 산과 자연에서 오는 정감을 그림에 도입하여 새로운 법을 만들었으며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게는 날카롭고 딱딱한 골필보다는 흠뻑한 중묵이 마음에 들거든. 아마 무등산에 사니까 필법도 무등산 같이 두리 뭉실하게 달라진 것인지도 몰라.」 남도 특유의 동글동글하고 편안한 산천에서 온 풍경을 남종화풍에 도입한 기법은 정선이 금강산을 그린 골필의 진경산수와 다른 중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자신의 법으로 그린 독창적 산수이다. 의재는 완숙된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남도의 부드럽고 풍요로운 산천에서 얻은 따뜻하고 아늑한 정감을 남종화풍의 인물과 가옥 등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퇴계 이황과 김정희와 같은 성리학자는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며 인간은 도덕적이고 윤리적, 금욕적 존재로 간주하여 서와 화를 그릴 때도 고결한 정신과 인품을 담아내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율곡 이이는 이(理)를 중시하면서 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이의 이론을 남종화로 해석하면 이(理)적인 보편적 남종화 정신을 인정하지만 기발적인 작가개성에 따라 법이 생긴다는 것이다.

 

허백련은 기본적인 사의적 사상과 인품이 담긴 남종화법을 따르지만 작가개성에 따른 법고창신(法古創新) 한 것이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인 묵법에 의경의 고고함을 표현한 것이다. 의도인 시기인 말년에는 산인시대의 법고창신의 다양한 시도의 화법이 완성 통합되면서 거친 먹선과 태점의 산수화, 사군자 등 신오(神悟)의 경지에 올라 철학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남도 남종화풍을 완성하게 된다.

 

허백련의 남도 남종화풍은 광주를 중심으로 많은 제자들이 따랐으며 보편적인 남종화 정신에 작가개성을 넣은 남도 남종화파의 종가를 이루고 있다. 허백련의 남종화풍은 남도의 자연관에 기초한 관념적이고 사의적인 형태로 수용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이후 대상의 실사를 바탕으로 한 진경산수화풍으로 발전하였다.

 

허백련은 1938년 광주에서 동강 정운면, 백양 조정규를 주축으로 한 37명의 연진회를 발족시켰다. 연진회에서 근원 구철우, 구당 이범재, 동강 정운면, 목재 허형면의 남도 남종화 대가들을 길렀다. 백양 조정규, 풍곡 성재휴 등 경남출신 대가들은 연진회를 통해 남종화의 정신과 기법을 채득하여 한국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의재의 제자들은 전통적 화법을 고수하면서 정신적 내면성을 중시한 남도 산수화를 그렸다.

 

의재의 넷째 동생 목재 허행면은 의재풍 남종화로 화가의 명성을 날려 1939년에 연진회 정회원이 되었다. 후에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였으며 춘헌 허규, 희재 문장호, 녹설 이상재 등이 그의 문하를 거쳤다. 연진회의 창립 정회원인 동강 정운면은 잠시 광주에 와있던 소정 변관식에게 사사를 받아 전통 남종화와는 거리를 둔 신감각주의 화풍의 향토색 깊은 실경산수를 그려 허림과 허건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정운면은 시서화 삼절의 선비화가로 전통 남종화를 늘 병행하여 격조 높은 문인화와 묵란 등을 그렸다. 해방 후 의재에게 오우선이 제일 먼저 사사를 받았으며 오우선은 서울 약대를 졸업한 후 화가로 다시 돌아왔다.

 

1947년 김옥진이 입문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목재에게 배우던 이상재와 문장호를 비롯한 박행보 등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의재의 제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김옥진이 1955년 국전에 입선한 후 1961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상재와 문장호는 1959년 국전에 진출하여 추천작가에 올랐으며 1970년대는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도 역임하였다. 원로와 중진 화가로 활동을 한 연진회 출신 작가로는 허의득, 허남전, 양계남, 장찬홍, 이계원, 박소영 등이 있으며 장손 허달재가 대를 이어 화업을 계승하고 있다.

 

소치의 직손이며 미산의 자제인 남농 허건은 소치와 미산의 그림을 따르는 과정을 거친 후 있었지만 현실적 시각과 사생을 통한 독자적인 작품을 그렸다. 1940년대 전면적 채색표현과 장식적 화면 전개로 새로운 경향을 보였으며 색채에 관한 새로운 감각과 대비적인 효과를 통한 화면 구성을 하였다. 이후 허건은 문기 넘치는 필법을 바탕으로 자연사물을 현실적 감각으로 재현하거나 거친 듯한 파선과 개성 있는 담묵을 사용하여 소나무가 어우러진 산수를 잘 그렸다.

 

허건의 새로운 감각의 남종화는 목포를 중심으로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허건의 제자들은 남종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문기 있는 사의적 산수화와 전통산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경산수 화풍을 동시에 추구하여 개성 강한 작가들을 많이 배출되었다. 허건의 <남농연구원>에서 사사한 문도로는 조방원, 신영복, 김명제, 곽남배로 각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전개하였다. 1959년 아산 조방원이 추천작가가 되고 신영복, 이옥성도 특선을 하면서 남농계를 형성하였다.

 

남농 허건 문하에는 박항환, 하철경, 손기종, 허문, 허진 등이 사사를 받아 남종화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남농계는 의재계의 남종화풍을 주로 하여 자신의 개성을 표현한 법고창신 작품보다 더욱 개성과 기(氣)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남농의 채색화 지향과 사실적 자연표현, 사생과 채색을 가미한 작품은 남농계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다. 의재와 남농, 제자들은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옛 것을 토대로 한 개개인의 감성과 느낌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새로운 법을 가진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 박태후 作 '자연 속으로' 한지에 수묵담채. 35*200cm, 2002

 

3. 남종화 창조적 발전

 

1970년대는 경제성장에 따른 새로운 미술 수요층이 증가되고 한국학 부흥과 민족주의 정책에 힘입어 한국화가 각광을 받은 시기이다. 남도 화단도 1970년대 개화기를 맞아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작품가가 높아지고 미술의 대중화로 남도에 사는 중상류층 층에서 그림을 소장하게 되었다.

 

남도 한국화는 2세대 작가를 중심으로 전통 남종화의 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법고창신의 개인적 감성을 넣은 경향이 주도하였다. 이 시기 주목할 점은 ‘전통산수화’ 자연관에 의한 산수화와 함께 1970년대 중후반부터 남도의 들녘과 산천을 스케치하면서 한국적인 자연경을 전개한 진경산수를 그린 것이다. 남도는 김정희의 사상과 예술을 주로 한 남종화풍이 주도하였지만 남종화의 대가인 허백련도 의재산인(毅齋散人) 시절 남도 특유의 동글동글하고 편안한 산천에서 온 풍경을 남종화풍에 도입하였다.

 

이를 발전시켜 1970년대 중후반 이후 많은 남도 한국화가들은 남종화 기법과 정신을 바탕으로 남도의 참모습을 담은 진경을 도입한다. 즉 남종화풍을 섭렵한 후 실경을 그린 산수화는 18세기 정선이 원숙한 남종화를 바탕으로 그린 진경산수화와 사상적, 기법으로 관련이 된다.

 

강세황에 의해 ‘동국진경’을 그린 화가로 평가를 받는 정선은 화풍에 따라 남종화 계열과 진경산수로 나누어진다. 양명학에서 진아(眞兒)는 가아(假我)에서 참된 나를 찾는 것이다. 예술에서 진아(眞我)는 개성을 담아내고 예술적 끼를 담아낸 작품이다.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진(眞)은 한국적 심성의 미의식으로 자연미, 나를 드러내는 본질, 주체적으로 한국정신을 담아낸 것이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남종화풍을 섭렵 이를 토대로 양명학과 실학에 바탕을 둔 독창적인 진경산수화풍에 이른다. 즉 남종화를 오랜 기간에 익힌 후 새로운 진경을 그린 측면에서 남도 진경산수화는 조선후기 진경산수와 연결이 된다.

 

김형수는 남도 한국화에서 의재계와 남농계에 속하지 않고 자신의 화풍을 개척한 작가이다. 1950년대 향토적인 소재의 실경 산수를 그려 1952년 <산촌설경>, 1957년 <산가만귀(山家晩歸)> 등의 작품을 그렸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 남종화풍의 산수화로 바뀌었다. 1970년대는 1973년 <백양사> 등 작품에서 남종화 정신을 바탕으로 현실 자연을 그렸다. 2세대 작가 중 김옥진은 1974년 스케치로 실경을 그리고 이후 자연에서 직접 본 작품을 강조하였다.

 

3세대에 속하는 박은용, 김대원, 오견규, 하철경 등의 화가들은 1~2세대에게 남종화의 기법을 배워 남도 전통을 계승하면서 자기 양식의 정립을 통한 새로운 남도 한국화를 창출하였다. 남도 남종화풍을 기반으로 산천의 아름다움이나 소박한 시골풍경의 친근한 분위기를 다루었으며 소재의 확장을 꾀해 현대적인 풍물을 도입하였다.

 

필묵법의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담채의 효과를 내고 붓과 먹 장점을 활용하여 작가 개성의 새로운 감성을 반영하였다. 남도진경은 남도의 승경에서 자연의 관찰을 통해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과 산천에 대한 느낌을 자신의 화결로 나타낸 것이다. 남도 남종화가에 의해 전개된 진경산수화는 유학에서 말하는 기(氣)를 표출한 그림이다. 기(氣)는 감각, 감성, 대중성으로 개성을 강조하여 한국의 미를 표출하여 우리의 자연과 심성을 드러낸다.

 

남도 진경산수화는 탈속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삶의 본질을 회복하고 높여 주는 남종화의 새로운 발전을 이룬 것이다. 남도한국화가들은 남종화의 정신과 법을 완전히 습득한 후 이를 바탕으로 변화된 새로운 자신만의 법으로 실경을 표현하여 남종화의 정신을 잃지 않는 새로운 진경을 그렸다.

 

1980년대는 서구 모더니즘 조형 이념 작품과 남도 진경산수화 계열이 공존하는 시기로 채색과 수묵의 다양한 형식 변화를 시도 하였다. 또한 남도 한국 화가들은 한국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감각의 채색을 사용하여 기존의 남종화를 한층 발전시킨 새로운 양식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우리의 생활양식과 사유방식을 질적으로 바꾸어 산수화의 주제인 자연이 눈으로 느끼는 재현의 대상이 되었다. 산수화는 점차 풍경화의 시감으로 이행되어 갔고 남도 전통의 계승 의지는 필묵형식에 집중되었으며 개성과 주제 의식에 따라 개개인이 느낀 풍경을 그리게 되었다. 남도의 한국 화가들은 남종화 전통의 계승을 통한 법고창신과 작가 각자의 창조적인 개성적 화풍을 실현하여 새로운 전개와 발전을 하게 된다.

 

1980년대 연진미술원 동문들로 이루어진 취묵회가 1984년에 창립하였으며 허건의 제자 조방원의 화풍을 받은 목운 오견규, 동곡 조광섭, 석우 정재윤 등이 1987년 묵노회를 창립하였다. 이들은 우리 산천의 특질을 파악하고 독특한 조형어법과 시각으로 남도 산수화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였다.

 

1990년대 이후 남종화를 토대로 한 남도 한국화는 자연의 직접적인 사생을 통한 실경과 다양한 채색을 사용하는 것이 특색이다.

 

과거의 문기 있는 남종화 전통은 물질 중심의 서구식 사고방식으로 변화하면서 대중이 정신 중심의 남종화를 이해하지 못하여 채색과 실경을 통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남도의 남종산수화 전통은 자연의 직접적인 사생을 통한 실경산수화풍이 주도하였다. 수묵을 바탕으로 한 남종화의 전통은 민중미술에 영향을 주어 남도의 새로운 예술형식인 민중미술 수묵화운동으로 재탄생되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미술에 영향을 주어 한국화분야에서 80~90년대 민중미술 수묵화운동이 일어난다.

 

민중미술 수묵화 운동은 수묵이 한국화의 정체성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재료라는 1980년대 수묵화운동과도 관련이 있으며 남도에서 현실참여적인 작품을 그린 독특한 양식이다.

 

김경주와 김진수는 80년대 목판화로 민중미술작품을 제작하였고 90년대 현실주의 수묵을 표방하였다.

 

 

◇ 김진수 作 '옥주벌의 가을Ⅱ' / 수묵담채 140*110cm, 1993

 

하성흡과 허달용은 진경산수나 풍속화 같은 전통회화의 요소를 접목하였다. 하성흡은 1990년 대동세상을 출품한 이래 수묵담채를 그렸으며 허달용은 전통 남종화 기법을 토대로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그렸다.

 

민중미술 수묵화 제1세대 작가인 홍성민은 1990년대 후반 수묵으로 대나무는 민중을 표현하며 생명의 존엄, 해원과 연대, 조화를 상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4. 남도 채색전통과 모더니즘 미술 수용

 

채색화는 북종화에서 주로 나타나며 채색이 주가 되도록 그린 작품을 말한다. 근대 화단의 채색화는 1920년대 김은호, 이영일, 최우석 등이 그렸으나 일본화 기법을 차용하는 한계가 보였다. 1936년 김은호와 제자들이 후소회를 결성하여 채색화를 이끌어 갔다. 일제시대 남농의 아우로 비범한 화재를 보이다 25세로 요절한 허림의 채색화 작품은 일본 문전풍의 신감각주의를 지향하고 새로운 감각을 수용하여 전통의 탈피를 가져왔다. 뛰어난 미의식을 바탕으로 일본화의 영역을 넘어서는 새로운 발전을 모색한 것이다. 김정현은 허림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화조화를 많이 그렸고 채색 위주의 감각적인 화풍으로 작품을 그렸다. 해방 후 천경자와 함께 백양회를 조직하여 동양화의 현대적 실험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채색화와 사실적인 화풍의 작품을 그린 취당 장덕, 현당 김한영, 오당 안동숙이 있다. 장덕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서 목포로 이주 정착하여 남도 화단의 일원으로 전통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다. 김은호의 제자로 세필인물화와 기명절기를 그리는 김한영도 남도 화단의 채색화를 기본으로 한 독자적 위치의 작가이다. 이들은 이당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채색을 기본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일군 남도의 중요한 화가들이다.

 

해방 이후 채색을 구사하는 작가들이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채색화를 추구해 온 대표적인 작가가 천경자이다. 천경자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였으며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한 남도가 배출한 대표적인 채색화가다. 천경자는 김기창, 박래현 등과 1957년에 백양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채색화를 모색하였다. 의제에게 사사를 받고 연진회 창립회원인 조복순은 일본미술학교에서 채색화를 배웠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홍익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0년대 이후 추상으로 대표되는 서구 모더니즘이 남도 한국화단에서 폭넓게 수용되어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하며 남도 한국화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당시의 대학 교육은 채색화와 함께 추상과 평면성을 원리로 하는 모더니즘 미술이 한국화에 적용되었다. 전남대학교의 윤애근은 남종화가 주류인 남도 화단에 채색화로 현대적인 조형의식을 보여주었다. 방의걸의 수묵과 채색이 조화가 된 작품은 80, 90년대 전남대 문하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허진은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삶에 대한 반성을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다. 조선대학교의 양계남, 김대원은 전통 남종화를 발전시킨 화려한 채색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작품을 그려 학생들에게 새로운 흥미와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김종경은 모더니즘 추상을 기초로 한 채색화를 통해 작가의 감성을 표출한다. 이들의 작품은 남종화 전통에 감성적인 색을 넣어 기(氣)를 강조한 작품으로 아름다움과 대중적인 친근함을 표현하였다. 추상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작품, 감각적인 현대사회 속에서 색채를 먹과 함께 사용한 독창적인 작품은 남도 한국화의 또 다른 흐름을 형성하고 점차 남도 한국 화단의 중요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미술단체로는 1987년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생을 중심으로 선묵회가 창립 되어 남도 예술정신을 계승하고 한국화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1988년 창립한 창묵회는 학연이나 계파와 관계없이 한국적이면서 현대적인 미의 세계를 공동 모색하자는 한국화 청년작가들의 모임이다. 위성만, 김광옥, 김송근 등 10여명이 한국화의 새로운 활로를 찾아 적극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모더니즘 계열의 남도 젊은 한국화가들은 1987년에 창립한 광주청년미술작가회를 중심으로 김세중, 임정기, 장현우, 장진원, 주재현, 장복수 등이 활동하였다. 실경이나 관념적 산수의 형상에서 탈피하여 변형과 단순화, 과장, 추상적 형태 등 다양한 표현방법과 과감한 필묵이나 채색 등 각자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작품 활동을 추구하여 남도 한국화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수묵 전통, 채색화,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모더니즘 양식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화가 시대정신을 담고 남도 미술을 이끌고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한 다양한 미술 주제와 양식이 남도한국화에 영향을 미쳐 20~30대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감성에 의해 한층 다양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5. 서(書)의 자유분방함 남도 동국진체

 

서예는 약 3,000여년간 지속되어 온 독특한 동양예술의 하나로 정신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서예의 점은 멈춘 것이 아닌 동적인 것이고 선은 생명력과 의미가 있는 획으로 정신을 담고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획은 역(易)에서 근원 하는 것으로 서(書)의 점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태로 음과 양의 개념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6~7세기 삼국시대이다. 통일신라 때는 구양순의 해서체가 유행하였으며 고려 후기와 조선 초에 부드럽고 유연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다.

 

18세기는 한국 서예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시기로 민족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적 서풍인 동국진체(東國眞體)가 출현하였다. 동국진체는 조선 후기에 일기 시작한 조선적 서법을 말하며 중국 법첩의 범주를 벗어나고자 하는 중요한 자각적 예술 운동이었다. 이광사의 글씨는 만개 터럭에 힘을 가해서 죽 그으라고 하여 일필휘지로 중심선을 지키면서 탁탁 끊는 절제미가 두드러진다. 이광사의 동국진체는 양의 강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좌우 위아래가 불규칙한 작품으로 제멋대로 쓴 느낌과 촌티가 나지만 그 느낌은 자연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말기 김정희는 이광사의 민족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동국진체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이(理)를 바탕으로 예를 담은 서체(추사체)를 확립하였다. 주자학에서 서예는 서법아언(書法雅言)으로 바른 말을 표현한 것으로 주자학적인 반듯함을 강조하고 격조를 중시한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추사체가 조선말기에 유행하였다. 그 영향으로 동국진체의 세가 줄어들었지만 매우 중요한 자각적 예술 운동으로 남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전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국진체는 실학의 영향으로 개성을 강조한 글자로 참됨(眞)을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로움을 표현하여 가짜 나(假我)에서 벗어나 참된 나(眞我)를 찾는 것이다. 18세기 당시 청에 대한 문화의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의 심성을 드러내는 글자로 심층 깊은 곳에서 나온 우리만의 독특한 서예 양식이다. 영자팔법(永字八法)을 함께 연구한 옥동 이서와 공재 윤두서로부터 시작된 동국진체는 자유분방한 필치에 해학과 여유를 내재시키는 형상성을 추구하였다. 북송의 미불에게 영향을 받은 백하 윤순은 온아하고 단정한 글씨를 썼으며 원교 이광사는 윤순에게 사사받고 동기창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서풍을 이루었다. 원교 이광사는 1762년에 신지도로 23년간 유배되면서 자신의 원교체를 완성하여 그의 동국진체는 남도지방의 선승들에게 이어져 혜장 등 필명 높은 선승들을 탄생시켰다.

 

일제시대 이후 허백련, 손재형, 황현, 구철우, 안규동에 전해져 남도의 서예를 풍부하게 하였다. 해방 후 진도출신 손재형은 한글 예서체의 새로운 서체 완성으로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보성출신 안규동은 허백련과 함께 활동하다 구철우 등과 같이 광주서예연구원을 개설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이 지역의 서예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손재형의 동국진체는 하남호에 이어져 스승의 서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일궜다. 안규동의 동국진체는 조기동, 이돈흥, 이규형, 고기임, 박경래 등에 이어져 동국진체의 전통은 호남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근대 이후에는 남도를 중심으로 맥이 이어져 가고 있다.

 

6. 남도 한국화 의의와 전망

 

남도는 예향이라 불리듯이 한국화, 서양화, 조각, 영상, 설치 등 뚜렷한 색채를 지닌 많은 미술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런 현대 남도 미술계가 형성 된 뿌리에는 조선말부터 현대까지 많은 미술인을 양성한 남종화의 전통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남도는 80년대까지 누구나 서화를 즐기려고 하며 적극적인 경우는 직접 붓을 들고 작업에 임하는 여기화가의 숫자도 많아 이런 배경이 남도 한국화의 화맥을 이루게 하였다. 이후 남도의 남종화는 사회와 비평가들의 냉담과 무관심 속에 작품 활동이 많이 위축되었지만 남도의 화풍 창작에 전념해 온 다수의 남종화가들이 존재하며 정신적 바탕과 이념을 기본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수용하여 계승되어 왔다.

 

남도 미술의 정신적 바탕은 남종화로 정신적 가치와 삶을 담아왔던 소중한 형식이며 예술이다. 남종화 전통은 남도를 배경으로 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다양한 형식 변화와 시도를 하고 있다. 허련, 허형의 남종화를 유교적 관점에서 이(理)를 강조한 이황의 이기이원론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후 근현대기에 남도의 풍경과 정서가 가미된 허백련과 그의 제자들은 이(理)를 중요시하지만 작가적 개성인 기(氣)를 존중한 이이의 이기일원론적 철학에서 보편적인 정신에 개성을 둔 작품을 제작하였다. 남도채색화전통과 1970년대 이후 남종화 기법을 토대로 양명학과 실학을 적용하여 기를 강조한 진경산수화, 남도 동국진체는 작가의 개성, 즉 당시의 민족주의와도 연결이 된다. 이와 같이 남도 남종 한국화는 이치를 담고 있으며 시대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

 

한국회화사의 다양성과 전통을 이루는 화맥을 형성한 의재와 남농은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화파나 가(家)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소치 허련에서 나온 남도의 남종화풍은 남도의 자연관에 기초한 관념적이고 사의적인 형태로 수용되거나 남종화를 바탕으로 대상의 실사를 기초로 한 진경산수화풍으로 발전하였으며 남도 회화사의 중심이 된다.

 

이들은 명대 초기 민족주의와 복고주의를 바탕으로 대진, 오위의 절강성 출신으로 이루어진 명대 절파와 강소성 오현을 중심으로 심주를 시조로 삼은 문인화 전통의 명대 오파, 청나라 때 개성이 강한 강소성 양주의 양주화파, 상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화파 등 지역적 특성을 이룬 화파들과 같이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화파로 정리 되어야 할 것이다. 즉 남도의 허련에서 나온 남도 남종화파는 한국미술사에서 조선 초기 안견파와 조선후기 정선파와 같이 많은 제자를 기르고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한 중요한 미술 계파이다. 따라서 지역을 딴 남도파 또는 인명을 딴 허련파로 미술사적 정립이 되어야 한다.

 

중국은 근현대 미술의 대가로 문인화의 최고봉에 오른 제백서, 팔대산인과 석도의 영향을 받은 장대천, 현대 화풍의 서비홍 등 다양한 대가를 인정하며 북 제백서가와 남 서비홍가를 이루고 있다. 중국은 현대미술과 함께 전통 회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양식의 작품을 높게 인정 하여 세계에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은 남종화 전통의 남도만이 아닌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루하고 진부하다고 여겨진 한국화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발전을 모색할 필요성에 대한 하나의 본이 된다.

 

그러나 남도 전통화단은 평론가와 미술계의 지원이 미흡하고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80, 90년대 새로운 개념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진화해야 한다는 모더니즘 관점과 비평으로 남도 전통 산수화는 고루한 관념 산수화로 매도되어 설자리를 잃었다. 이런 모더니즘 미술이론은 90년대 중반까지 한국화단에 영향을 미쳐 남종화의 전통은 현실을 도외시하고 실험정신이 빈약한 작품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버렸다.

 

현대 한국미술계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미술이 주도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대표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서양 철학의 이성주의적 로고센트리즘에 빠져 있으며 이성주의적 로고센트리즘은 언어로 세상을 확정 지으려는 발상이라고 격분하였다. 바로 이성적 합리주의는 A는 B라는 논리로 나치의 대학살과 핵폭탄을 만들어 참상을 빚었다는 것이다. 결국 타자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확정성을 통해 주장하는 것은 의미의 부정직한 횡포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미술에서도 주변화된 타자의 조건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계급, 인종, 젠더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으며 페미니즘과 복합 문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상하게 된다. 깊은 철학적 개념과 한국적인 자연을 담으려는 남도 한국화도 모더니즘 사고에 의해 희생된 타자이며 남도 한국화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비평과 평가가 필요하다.

 

현재는 동양의 상생 철학을 담은 남도 한국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현대 미술의 능동적 수용을 통해 동·서양의 철학을 반영한 이 시대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새로운 남도 한국화의 탄생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모더니즘적인 형식보다 내용이 점차 중요해 졌다. 이런 경향은 독일의 신표현주의와 미국의 뉴페인팅으로 불리는 미국의 신표현주의 작가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더니즘적 새로운 양식의 발명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지 않고 미술사에서 차용한 여러 양식들과 정신을 통해 집단의 역사나 개인의 감수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남도가 가진 남도 남종화와 동국진체 등의 정신과 기법은 다양한 양식과 분야에서 현대적인 개념과 양식을 담을 수 있어 독특한 남도만의 한국화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시작은 1970년대 브루스 나우만, 존 반데사리, 폴 메카시와 같은 뒤샹의 내용을 받은 개념주의 미술가로 이들이 길을 닦고 후배들이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꽃피웠다. 이들은 깊은 철학적 내용을 담은 비평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진정한 포스트모던의 내용을 실천한 작가로써 존경을 받으며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세계 미술을 주도할 뿌리가 된다. 이들의 영향으로 1980년대 로버트 롱고, 줄리앙 슈나벨과 같은 상업적 보수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피터 핼리와 하임 스타인벡과 같은 상업적 절충주의 포스트모더니즘, 1990년대 세계적인 스타가 된 폴 메카시와 같은 진보적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를 낳았으며 상업적인 형식미와 함께 심오한 개념을 담은 미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즉 동양과 한국인의 정신을 담고 있는 남종화의 개념과 기법은 비판 대상이 아닌 후대에 그 정신을 잇는 새로운 양식과 형식미를 강조하는 다양한 남도 예술이 나올 수 있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교육적 측면에서 남도의 전통 산수화는 과거에는 도제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 교육이 서구식 모더니즘 미술교육이 주도하여 인해 남종화의 정신과 기법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현 시점에서 미술대학은 남도 한국화에 대한 정신과 기법에 대한 연구와 전승을 통한 맥의 연결, 현대 미술의 다양한 개념과 양식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그 결과 새로운 남도 한국화와 그 양식을 수용한 영상, 설치, 조각, 회화 등이 만들어져 강력한 힘을 가진 시대정신을 함유한 새로운 미술 사조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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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남도의 전통회화

- 홍선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남도 화단의 연원

 

‘예향 남도(藝鄕 南道)’는 근대 서화계에서 지방 화단 최대의 인맥을 이루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남도 전통 화단의 이러한 위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조선후기 초에 가장 많은 ‘외방화사(外方畵師)’들이 활동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 ‘남중(南中) 화사’는 화가 최고의 영광이었던 왕의 초상을 그리는 어용(御容)화사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숙종기(1674~1724)에 어용 도화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면서, 도화서 화원을 포함하여 8도에서 뛰어난 화가들을 구할 때, 평양의 ‘관서(關西)화사’와 함께 ‘전라도화사’로도 지칭되던 ‘남중화사’들이 거명된 바 있다. 그리고 영조 11년(1735)의 어용 도화 때, ‘남중화사’인 이태(李珆)와 김익주(金翊冑), 양희맹(梁希孟)이 선발되어 각각 주관화사와 동참화사, 수종화사로 활약하고 그 공로로 상직을 제수 받은 사실이 『승정원일기』등에 전한다.

 

이와 같이 조선 8도에서 명성이 높았던 ‘남중화사’의 전통은, 고려시대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고려청자 명산지인 전라도 서남부의 강진과 부안에서 제작하여 해로를 통해 왕실 등에 납품한 명품들의 문양은 도자공이 아닌 화공의 솜씨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려 초부터 공예품의 문양을 그리던 ‘화업(畵業)’들이 자화공(瓷畵工)으로 대를 이어 상주하며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특히 공필화조화의 시조인 오대의 황전(黃筌)에 의해 확립된 ‘육학(六鶴)’의 도상을 연상시키는 <청자상감화죽수금문판>(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의 좌우로 세 마리씩 병렬되어 있는 백로들의 양태나, 화조화의 명수인 북송 휘종의 <서학도>와 유사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간송미술관)의 비학문(飛鶴文)들은 고려 회화사의 자료로도 중요하다. 상감기법이나 진사로 묘사된 청자의 동자상(童子像)들 또한 영아도(嬰兒圖)의 정감을 반영한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고려청자의 자화공들이 불화사나 외방화사로 전업 또는 화업을 넓히면서 남도의 전통회화 전개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 성종 6년(1476)에 그려진 강진 무위사의 후불벽화와, 명종 22년(1567)에 광주 인근에서 근무하거나 연고가 있는 과거 급제 동기생들이 광주 충장동 부근의 희방루에서 모임을 가진 것을 기념하여 그린 <희방루방회도>(동국대박물관)는 이들 화맥에 의해 제작된 화적일지도 모른다.

 

남도는 16세기를 통해 문사와 시인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시단과 가단(歌壇)이 형성되었고,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 등에 연루되어 낙향했거나 유배 온 고운(高雲 1479~1530)과 양팽손(梁彭孫 1488~1545), 신잠(申潛 1491~1554) 등에 의해, 시· 서· 화 겸비와 수장 및 감평 풍조가 파급되었다. 고운과 양팽손은 화명이 특별하지 않았으나, 신잠은 당시 묵죽에서 명성이 높았다. 양팽손의 회화활동과 관련하여 아직도 거론되고 있는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는 작가미상의 작품으로, 필자가 1992년에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남도 화단은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왕에게 아뢰었듯이 ‘화사심다(畵師甚多)’의 지역이며, 어용화사로도 선발될 만큼 뛰어난 ‘화상(畵像)의 선수(善手)’들을 배출할 정도로 1700년 전후하여 눈에 띠게 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팽창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회화 이념과 화풍의 갱신을 주도한 해남 출신의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그 자손에 의해 조선 회화사의 흐름을 새롭게 빛낸 화맥으로 각광받게 된다.

 

윤두서 화맥의 명성

 

조선 회화가 문인화의 창작 이념과 남종화법을 수용하여 기존의 사조를 비판하며 갱신을 도모한 것은 숙종기 부터이다. 이들 요소는 이전 시기에 전래된 바 있지만, 이를 문인주의와 문인화 우월론에 기반한 문인화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창작 태도와 화풍의 쇄신을 이끈 사람은 윤두서로, 이념적 문인화가의 효시이기도 하다. 당시 감평가들도 윤두서를 종래의 문인화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고전관에 의하여 기존의 창작풍토를 개혁하면서 “회화의 새 시대를 열은” 작가로 평했는가 하면, 영조는 그를 “아국명화(我國名畵)”라며 최고의 대가로 칭송한 바 있다.

 

윤두서의 회화 창작과 감평 취미는 16세기 초에 기묘명현들의 남도로의 낙향 및 유배로 파급된 서화 애호풍조를 수용한 윤구(尹衢 1495~1549)와 윤행(尹行 1508~1592), 윤선도(尹善道 1587~1671) 등 선대의 유습에서 유래되기도 했지만, 문인화가로의 자의식과 회화관은 어려서 상경한 이후 근기남인(近畿南人)과의 교유와 고전서 및 한문 번역의 서학서(西學書)에 대한 새로운 독서경향에 의해 형성되었다. 특히 방대한 서화 관련 서적에 대한 섭렵은 괄목할 만하다.

 

윤두서는 고전의 형식적 모방과 상투적 답습이 아닌 그 정신의 현실적 활용을 강조했으며, 형사적(形似的) 전신(傳神)에 의한 사물의 참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창작이념과 함께 기존의 여기적(餘技的)인 주제의식에서 탈피하여 ‘박이우정(博而又精)’ 즉 넓고도 정묘하게 다루는 문인화가로서 새로운 타잎의 작가상을 추구하였다. 그가 도석 및 고사인물화와 성현도, 초상화, 미인화, 산수화, 화조· 동물화, 잡화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각종의 기법을 구사하며 다룬 작품들을 남긴 것은 이와 같은 작가상을 실천한 소산이라 하겠다. 특히 새로운 주제의 확충과 함께 자화상과 풍속화 등의 개척도 각별하며,『고씨화보(顧氏畵譜)』와『당시화보(唐詩畵譜)』와 같은 화보류에 의한 고전의 습득과 응용, 서양화법의 부분적 수용을 통한 묘사법의 개량화와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을 지배하는 남종화법의 선구적 사용 및 조선풍 남종화의 창출 또한 그의 업적으로 길이 빛나는 것이다. 그는 만년에 해남으로 돌아와 이러한 작업들을 화학(畵學)에 깊이 몰두했던 지식을 토대로 이론으로 정리하며 여생을 보냈다.

 

윤두서의 장남인 윤덕희(尹德熙 1685~1766)는 아버지의 유작들을 모아서 해남 종가를 통해 후대에 전존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창작태도와 이념, 주제의식, 화제와 화풍 등을 계승하여 해남 윤씨 일가의 화맥 형성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에서의 주류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윤두서의 예술 재능을 이어 받은 그는 선염풍 서양화법을 곁들여 정밀한 묘사력이 돋보이는 도석인물화를 가장 많이 그렸을 뿐 아니라 해상군선도 형식을 새롭게 견인한 것을 비롯하여, 청 초기 안휘파(安徽派)의 신흥양식을 수용하여 남종산수화풍의 쇄신을 도모했는가 하면, 명승지의 사생을 통한 실경산수화의 개성화와 같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윤용(尹愹 1708~1740)은 윤덕희의 차남으로 젊어서 타계했지만, 새로운 타잎의 문인화가로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할아버지의 예술이념을 따라 형태의 세밀한 관찰과 이모를 통해 참모습을 재현하려고 했으며, 풍속화에서의 묘사력 증진과 시· 서· 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격조 높은 작품 세계의 구현 등으로 가문의 화맥과 화단의 발전에 공헌한 바 크다. 이러한 성취에 대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윤용의 경지가 할아버지 윤두서 때부터 3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더 정묘하게 된 것으로 예술이란 갑자기 이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뿌리가 깊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고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허련의 활약과 중흥

 

윤두서 일가의 화맥에 의해 조선 후기 화단에 뿌리를 내리며 회화의 격조를 높이고 심화시킨 화풍 중에서 남종문인화 경향을 호남의 전통회화로 중흥시킨 작가가 소치 허련(許鍊1808~1893)이다.

 

진도 출신인 허련은 20대 후반 무렵 해남에서 윤두서의 화적을 통하여 그림에 입문하고 예술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대흥사의 초의선사 주선으로 30대 초반에 상경하여 서화계의 거벽이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문하에서 그림과 글씨를 배우며 급성장했다. 그는 김정희가 1841년에서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 목숨을 건 험난한 여행을 통해 세 차례나 적소를 방문했을 정도로 의리를 다하여 존경하고 따랐다.

 

허련은 당시 남도의 행정 구역이었던 절해고도 제주도의 대정 적소에서 모두 1년간 시중을 들면서 시· 서· 화를 연마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룩하고, 감평이 까다롭기로 이름 난 스승으로 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만한 그림이 없다”는 절찬의 평을 듣게 된다.

 

그리고 40대 초에 헌종의 부름을 여러 번 받고 입궐하여 용상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왕과 함께 고서화에 대한 품평을 나눈 후 그의 명성은 조선 8도에 자자해졌다. 허련은 남종문인화에 의한 서화시대의 마지막 꽃을 피우고, 이를 저변화 또는 세속화하여 남도 서화계를 중심으로 근대로의 이행에 원천적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남도의 전통회화 뿐 아니라 우리 전통회화사 전개에도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이다.

 

허련은 모든 분야의 그림에 통달했지만, 산수화와 함께 ‘허모란’으로 불리웠을 정도로 화훼괴석화에서도 뛰어난 경지를 보였다. 그의 산수화는 남종문인화의 정수인 ‘예황법(倪黃法)’의 구도 및 필묵미와 윤두서와 김정희의 필의를 토대로, 성글고 거친 독필(禿筆)과 푸르스름한 담청을 활달하게 구사한 초솔함을 특징으로 한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을 문인풍의 먹으로만 그린 묵모란과 같은 특유의 화목을 창출하기도 했으며, 괴석 그림과 기명(器皿) 그림에서는 강렬한 붓 터치와 함께 신감각의 이색적인 화풍을 구사한 바 있다. 그리고 창생의 거친 힘과 수묵미 넘치는 묵죽과 매화를 비롯한 사군자화와 소나무와 연꽃 그림들도 잘 그려 오군자 또는 육군자 그림의 명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연폭 병풍의 대형 화면 가득히 한 그루의 기굴(奇崛)한 고매화를 그려 넣은 대담한 구성과 빠른 붓질의 활달함은 명성에 값하는 그의 기량과 격조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한편 손가락 끝으로 그리는 지두화법(指頭畵法)을 활용하여 수묵화 자체의 비인위적인 조형성을 모색하면서 ‘기격(奇格)’을 이루고 극도의 표현적인 화풍을 선보이기도 했다.

 

허련의 이러한 화풍은 고향 진도로 돌아 와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와 주유를 거듭하며 창작하는 50대 초부터 더욱 힘차고 분방해진다. 그러나 높은 명성에 따른 수요의 증가로 창작량이 많아지면서 주문자의 요구에 응대하여 호기와 객기를 부린 작품도 생기게 되었고, 만년으로 갈수록 그의 회화세계는 이와 같이 탈속성과 세속성을 혼성하거나 그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형식화와 말폐 현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문인화의 저변화와 함께 ‘수기자오(修己自娛)’의 개인적인 수양과 여기적인 아마추어 차원에서 창작과 주문에 의한 ‘작품’과 ‘상품’으로서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도 있다.

 

허련은 남도 화단의 성지로 불리는 운림산방에서 예술의 절정기를 이루면서 우리나라 화가로는 최초로 자서전과 같은 『소치실록』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화가 가운데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 말기의 상류층 및 지식인 사회와 서화계를 종횡하며 최고의 명사들과 어울렸던 교유담과 자신의 예술관 및 창작론 등을 서술하여 글로 남김으로서 문인화가로서의 이념과 전문적인 기예가로서의 자의식과 자존감을 지닌 새로운 수응(酬應)화가로서의 작가상을 보여 준 것이다.

허련의 이러한 회화 세계와 예술 정신은 그의 장남인 허은(許溵 1848~1865)과 넷째 아들 허형(許灐 1852~1931)으로 이어졌다. 제자인 김익로(金益魯 1845~1915)와 임삼현(任三鉉 1874~1948) 등을 통해서도 확산되었다. 허련의 화맥은 4남인 허형으로 이어졌는데, 아버지의 화풍을 빼어 닮게 그리던 허은이 18세로 요절함으로서 맏형의 별호인 ‘미산(米山)’을 물려받아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허형은 안목이나 격조, 기량 등에서 특출했던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지만, 전통 회화사의 맥락에서 허련이 이룩한 ‘화예(畵藝)’와 ‘화도’의 세계를 평생 충실하게 따랐으며, 이를 근대로 전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남도의 양대 산맥, 허백련과 허건

 

‘예향’으로서의 남도는 근대기를 통하여 전통회화에서 서울에 버금가는 최대의 인맥을 자랑하게 되는데, 이러한 번성은 허형에게 그림을 배운 허련의 방손인 의재 허백련(許百鍊 1891~1977)과 허형의 4남인 남농 허건(許楗)에 의한 양대 산맥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이다.

 

진도에서 출생한 허백련은 유배 온 한말의 저명한 한학자인 정만조(鄭萬朝 1858~1936)에게 수학하고 운림산방에서 허형에게 전통화법을 배웠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개화문명’의 중심지로 부상된 도쿄에서 일본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을 사사하면서 동양회화의 심오한 세계와 함께 전람회 미술로 개편된 관전풍(官展風) 남종산수화를 습득하고 귀국하여 초기 조선미전에서 동양화부 수석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명성은 이 무렵부터 높아졌으며 전국 각지와 일본에서의 여러 차례 개인전을 통해 확대되었다. 40대 후반에 광주에 정착하여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하고, 동생인 허행면을 비롯하여 정규원, 구철우, 정규, 김옥진, 성재휴 등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거나 함께 화파를 형성하며 광주화단을 남도 전통회화의 중심으로 조성하면서, 동양미술의 정수로 새롭게 조명된 남종화의 부흥과 확장에 주력하였다. 서구적 근대를 초극하고 동양의 전통과 고전을 강조하는 흥아주의가 팽배하던 1930년대의 시대사조와 결부되어 전개된 것이다.

 

허백련의 남종화는 양식적· 제재적 차원이 아니라, 동양 정신과 예술의 본질이며 정화로서 추구되었다고 본다. 미(美)와 도(道)의 합일적 경지를 지향하며, 아(雅)와 야(野)가 융합된 창생의 격조를 특유의 수묵담채로 전형화하여 남종화의 새로운 고전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

 

진도에서 태어나 강진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지 허형에게 서화를 배운 허건은 목포에 정착하여 1930년대를 통해 조선미전에서 연속 입선하며 명성을 높였으며, 1944년의 마지막 회에서는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남농연구원을 개설하여 조방원· 신영복· 김명제· 곽남배· 이옥성 등을 배출하는 한편, 국전에서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목포화단을 남도 전통회화의 양대 산맥의 하나로 육성하였다.

 

초기에는 가전 화풍을 구사하다가, 도쿄에 유학하여 관전풍의 신남화를 배운 동생 허림(許林 1917~1942)을 통해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 채색이 증가된 신남화식 사생풍으로 바꾸어 향토경의 미화를 추구하였다. 남도의 산수를 새로운 조형감각의 풍경화법으로 이상화하면서 전통의 갱신을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구남화와 신남화의 융합을 시도하며 전통성과 시대성의 종합화를 꾀했는가 하면, 허건 특유의 노송화를 창출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원숙한 경지에서 정신성이 증진된 초탈한 수묵담채풍의 남종산수를 즐겨 그렸다. 남도 전통회화의 뿌리로 귀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