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이야기

1929년 나주역 사건의 재구성...박찬승 교수

호호^.^아줌마 2013. 11. 8. 11:48

* 아래 글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이 되었던 1929년 나주역사건에 대해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가 <다산이야기>에 기고한 글입니다.

오늘 제게 메일로 전달된 내용을 전문 그대로 싣습니다.

 

 

1929년 나주역 사건의 재구성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 1929년 11월 3일에 있었던 광주학생운동은 그 나흘 전인 10월 30일 나주역에서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작은 충돌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이튿날 양측 통학생들의 충돌로 이어졌고, 결국은 11월 3일 광주 전체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때문에 여러 역사교과서에서 상자기사로 그 경과를 소개할 만큼 나주역 사건은 관심을 끌어왔다.

 

나주역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교과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에 실린 이 사건의 경과를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그날 광주에 통학하던 조선인 여학생들이 나주역 개찰구를 빠져나오던 때에 후쿠다 등 일본인 남학생들이 박기옥이라는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분기하여 후쿠다를 꾸짖었고, 후쿠다가 박준채에게 ‘조센진 주제에’라고 하자 박준채가 주먹을 날려 둘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술은 과연 얼마나 실상에 가까운 것일까. 위와 같은 ‘댕기머리 사건’의 줄거리는 사실은 <신동아> 1969년 9월호에 실린 박준채의 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929년 당시에는 ‘댕기머리’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동아일보>1929년 12월 28일자 호외에는 일본인 남학생 3명이 박기옥이라는 여학생의 앞을 가로막고 희롱을 하여, 이를 본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들을 꾸짖었으며, 양측 간에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 역구내에 있던 순사가 이를 제지하고 박준채의 뺨을 때렸다고 보도하였다. 다른 신문의 보도에도 댕기 머리 이야기는 없었다.

 

또 당시 현장에 있었던 여학생 세 명 중의 한 명인 이광춘은 1999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기옥은 당시 휴학 중이어서 당일 통학열차를 타지 않았으며, 조선인 여학생 3명이 개찰구를 빠져나오려 할 때 일본인 남학생들이 한 학생을 밀쳐서 그 학생이 여학생들과 부딪쳤다. 당시 박준채는 우리보다 앞서 개찰구를 빠져나가다가 우리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돌아보고 쫓아와 일본인 남학생 후쿠다와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 남학생 다나카는 일본인 학교였던 광주중학교 동창회지에 훗날 기고한 글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나주역을 빠져나올 때 조선인 남학생들이 후쿠다를 불러 ‘왜 조선인 여학생의 앞을 가로질러 개찰구를 빠져나왔느냐’고 꾸짖었다. 이에 후쿠다는 ‘여럿이 함께 몰려나오다 보니 때로는 앞으로 가고 때로는 뒤로도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하였다”고 썼다.

 

또 당시 나주경찰서 순사였던 일본인 우치다는 훗날 <광주학생사건 노트>라는 책에 기고한 글에서, “박기옥이 정기권을 역원에게 보여주고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순간, 2~3명의 학생이 한 명의 학생을 뒤에서 밀쳐 그에게 부딪쳤던 것이며, 그녀는 비틀비틀하며 넘어질 뻔하였을 뿐이다. 이로 인해 모여 있던 학생들의 말다툼이 있었지만, 역원의 제지로 별일 없이 끝나고 삼삼오오 해산하였다”고 썼다.

 

이처럼 당시 사건에 대한 증언자들의 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로 다른 여러 이야기 가운데 두 가지 쟁점을 뽑아 정리해보자. 첫째,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은 현장에 있었는가. 둘째, 일본인 남학생들은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겼는가, 아니면 뒤에서 부딪쳤는가, 그것도 아니면 앞에서 길을 가로막았는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보도와 증언

 

박기옥의 광주여자중학교 학적부를 보면, 1929년에 중도 퇴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언제 중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당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기사에는 모두 박기옥이라는 여학생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정무총감에 보고한 기록에서도 현장에 박기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박기옥이 당일 현장에 없었다는 이광춘의 기억에는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들을 어떻게 괴롭혔는지에 대해 다나카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가로막았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인 순사와 이광춘은 일본인 학생들이 뒤에서 부딪쳤다고 했다. 그리고 박준채는 댕기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박준채는 여학생들의 앞에 있었기 때문에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후쿠다를 밀쳐서 후쿠다가 조선인 여학생에 부딪혔다는 이광춘과 우치다의 증언이 사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처럼 불과 5~10분 사이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주역 사건이라는 작은 사건의 경우에도 그 사실을 재구성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요즈음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보도하는 신문, 방송의 기사는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 안에도 잘못된 정보, 부정확한 증언 의도된 왜곡과 은폐, 과장과 축소 등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권위주의적인 사회, 부정과 부패가 심한 사회, 언론의 자유가 위축된 사회일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클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일이든 현재의 일이든 이에 대한 보도, 기록, 증언, 회고 등을 너무 쉽게 믿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글쓴이 /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교수

· 현 한국구술사학회 회장

· <Korea Journal> 편집위원

· 저서 : 『마을로 간 한국전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1조 성립의 역사』

『근대민중운동의 사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