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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

도래마을 옛집 ‘생태세밀화 강좌’

by 호호^.^아줌마 2009. 8. 12.

 자연과 생명에 대한 예의를 배우는

 도래마을 옛집 ‘생태세밀화 강좌’  

 

나주시 다도면 ‘(재)내셔널트러스트 도래마을 옛집’에서 ‘생태 세밀화 강좌’가 열린다.

8월 18일에 개강하는 ‘생태 세밀화’ 강좌는 그림에 소질이 없거나 한 번도 그림을 배워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초 소묘와 작품 제작을 통해 자연생태를 관찰하고 자연에 대한 예의를 배우는 가운데 도래마을 옛집 마당과 텃밭의 생태 모습을 담을 예정이다.


■ 대  상 : 세밀화를 통해 자연생태를 이해하고자 하는 분

■ 기  간 : 2009년 8월 18일~10월 20일 / 매주 화요일 (오후 6:00~8:00)

■ 장  소 : 도래마을 옛집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199)

■ 강  사 : 박태규(화가, 자운영미술학교, *광주의 마지막 영화간판쟁이 )

■ 교육비 : 12만원(총 10강, 20시간)

■ 문  의 : 강좌 담당자 061-336-3675 / dorae3@nt-heritage.org


주제와 내용

표현기법 / 과제와 준비물

1

오리엔테이션 / 나뭇잎 그리기(형태잡기)

연필화기초 / 나뭇잎 3장

2

옛집에 핀 들풀 그리기1 / 선과 면

명도단계 과제 / 들풀

3

옛집에 핀 들풀 그리기2 / 명함(관찰)

연필화 / 들풀 야생화

4

돌담 옆 나무 그리기1

연필화 질감 / 나뭇가지와 잎

5

돌담 옆 나무 그리기2

색 연필화 기초

6

텃밭에 살아요 (입체와 질감)

색 연필화 / 텃밭 식물

7

마당에 있는 열매그리기 1 (공간감)

색 연필화 / 색의 명담 / 열매

8

마당에 있는 열매그리기 2

수채화 기초 / 색 명도단계 과제

9

옛집 마당에 있는 곤충그리기1

수채화 / 곤충사진도감

10

옛집 마당에 있는 곤충그리기2 / 작품감상

수채화 / 작품감상


■ 단체 소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 역사적 인물의 흔적을 미래세대에게 영원히 남겨주기 위하여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증과 기부, 모금 운동을 통하여 보전가치가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확보하고 시민의 주도 아래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입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도래마을 옛집

‘도래마을 옛집’은 오래된 전통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전남 나주 도래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인 홍기응 가옥(중요민속자료 제 151호), 홍기헌 가옥(중요민속자료 제 165호)과 이웃하여 있습니다. 도래마을 옛집은 1936년에 지어진 집으로 쓰임에 따라 공간 활용을 자유롭게 하여, 근대 한옥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어 보전가치가 큽니다.

 

2006년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 기금이 시민들의 기부와 후원금으로 모아진 기금으로 매입하여 시민문화 유산으로 지정, 보전 하였습니다. 복권 기금의 지원을 받아 안채와 대문채를 원형으로 복원하였고, 별당채를 현대식 한옥으로 신축하여 시민단체의 회의실 및 참여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원형으로 복원된 안채와 사랑채, 툇마루, 넓은 마당에서 다양한 문화 예술 활동이 기획. 운영되고 있습니다.


- 상설: 일반 방문객 옛집 관람 (무료. 매주 수요일~일요일 오전 10시~오후 4시)

- 2009년 9월~10월 문화재지킴이 교육 (예정)

- 2009년 8월 18일~10월 20일 생태세밀화 강좌 “내가 그린 첫 번째 세밀화” (예정)

- 2009년 8월  4일 다문화가정 어린이 연극놀이 “도래도래 쿵쿵”

- 2009년 8월  3일~4일 연극놀이캠프 “도래도래 쿵쿵”

- 2009년 6월 옛집체험 프로그램 “옛집과 어울림” (다도중학교, 나주 영재원 등 단체 체험프로그램)

- 2009년 3월 21일 도래마을 옛집 개소식

 

■ 박태규 선생은

 

화가. 현재 광주 자운영미술학교 대표.

환경을생각하는미술인모임, 광주환경운동연합 물한방울흙한줌, 광주천지킴이 모래톱 활동, 노동실업광주센터의 동그라미 미술학교, 북구문화의집 마을프로젝트, 환경운동연합의 자연을그리는아이들 등 미술을 매개로 실천하는 생태문화예술 교육사업 진행.

 

 "화가 대신 영화 간판쟁이 택하겠다"  


'마지막 영화간판쟁이 박태규전' 광주에서 열려

 

- 2004년도 오마이뉴스 기사 중 -

 

"화가라는 명함과 간판쟁이라는 명함 중 택일을 해야 한다면 무얼 선택하겠는가?"
"화가 대신에 영화간판쟁이라는 명함을 선택하겠다."

- 간판쟁이라는 직업에 어떤 자부심이라도 갖고 있는가?
"7~8년 전까지는 솔직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생계수단이었다. 3년 전쯤부터 영화간판 일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간판은 바로 나 자신의 영혼을 투영시킨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찾았다. 상업적인 간판에 불과하지만 애정을 갖고 그린 영화간판은 '나의 분신'이다."

- 간판쟁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
"대학 다닐 때 미술패 '매'라는 곳에서 활동하면서 집회나 행사용 걸개 그림을 그렸는데 내가 봐도 못 그렸었다. 길 가다가 극장 간판을 보니 엄청 잘 그린 하나의 '작품'이었다.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에피소드나 어려웠던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큰 맘 먹고 들어갔는데 몇 개월 동안 붓 한번 못 잡아보았다. 대학 나온 놈이 며칠이나 견딜까싶어 붓을 안 준 것이다. 매일 붓이나 빨고 수레에 간판을 싣고 개봉관 7군데로 나르는 단순노동만 하다가 2~3개월만에 붓을 잡을 수 있었다."

- 돈이 벌릴 거라는 생각에 영화간판쟁이의 길을 선택했다는데?"
"당시 마땅한 직업이 없어 신문을 돌리다가 영화간판일을 시작하였다. 지금은 가족부양 등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는 정도다."
   
박 씨는 대학시절엔 벽화나 각종 플래카드, 걸개그림, 깃발, 영정, 만장, 열사도를 그렸다. 91년 졸업 후에는 '광주민미련회원전', '환경과 생명전' 등을 거쳐 2001년에는 '오월 정신전'과 올해 '광주비엔날레 집행유예전' 등에 꾸준히 참여했다.

10년 넘게 간판쟁이로 작업하면서 그는 시민군 윤상원 열사의 삶을 다룬 '마지막 새벽', 노근리양민학살을 다룬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1950년 겨울 함평의 양민학살을 다룬 '바람소리', 오월광주를 다룬 '광주탈출'(광주비엔날레) 등을 영화간판 형식의 작품으로 선보였다. 간판 형식에 사회문제의식을 담은 그의 작품은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감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영화간판쟁이'라는 직업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월급을 많이 받는 직업도 아니니, 더 캐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영화간판쟁이'라는 직업이 조만간 영원히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시회 이름도 '마지막 영화간판쟁이 박태규전'으로 정했는지 모른다. 추억만을 남긴 채 사라져가는 영화간판쟁이라는 직업에 대한 아쉬움이 당사자인 박씨에겐 훨씬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좌석수 1924석으로 동양 최대를 자랑하던 대한극장이 연일 매진사례를 외치던 단일 개봉관 시대를 뒤로 하고 그 자리에 수십 개의 최신 복합영화상영관이 대신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급속한 전파는 이제 100년의 정체를 끝내고 영화 상영 시스템의 본격적인 진화가 이제 겨우 시작했음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탄이라고 극찬하였다.

수년 전 필자는 대한극장에서 마지막 70미리 영화인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서 내내 아쉬움에 휩싸였던 기억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정책적으로 각 도시에 한두 군데 정도는 그런 대형극장을 살려두는 길은 없었을까. 모든 단관이 사라지고 있는 판국에 현재 광주에 유일하게 남은 862석의 중대형 극장인 '광주극장'에서 일하고 있는 영화간판쟁이 박씨의 심사가 어떨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몇 달 전에는 미술실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이 극장 사정으로 떠났다고 한다. 대형간판도 이제는 작고 세련된 포스터 이미지의 실사 간판으로 바뀌어가고 있단다.

영화가 시대의 거울이듯 상업적인 영화간판은 많은 사람들에게 애정과 추억이 묻어 있어 더욱 애정이 간다는 박씨는 간결하고 화려한 색채로 표현되는 영화간판이 역사 속에 묻히지 않고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럼 광주극장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극장 관계자인 김형수(34) 이사와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1933년에 순수 민족자본에 의해 개관된 호남 지역 최초의 문화예술 공간이었던 광주극장은 일본영화보다는 한국영화와 악극단 및 판소리 등을 극화한 창극단에 그 비중을 두어 민족의식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던 광주극장에 대한 자랑을 앞세우며, 그런 역사성과 자부심을 가진 극장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운영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 1957년 '샛별영화사'에서 제작하고 박성복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눈물'의 개봉을 앞두고 극장 관계자들이 '흥행대박'을 기대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얘기하다 보니 현재 운영이 잘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소위 현실과 동떨어진 극장법과 학교보건법이 현재 광주극장을 '정화지역 내 불법유해업소'로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즉, 광주극장은 현행법대로 따지면 불법영업을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에 이전을 하든가 폐쇄해야 할 처지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봤지만 아직까지 별무소득이라고 한다.

해방을 전후하여 백범 김구 선생 등의 애국강연회와 각종 시민사회단체의 집회는 물론 학예회 및 졸업식도 치르고 연극과 영화가 상연되었으며 밤에는 야학을 개설하여 항일 문화교육계몽운동을 하기도 했던, 해방 뒤 오늘에 이르며 스크린을 통해 서민들을 웃기고 울렸던 추억의 광주극장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영화간판 전시회를 찾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한동안 잊었던 과거의 추억에 잠기며 빙그레 향수에 젖어든다는 전시회 소식을 접하며 이제 우리도 앞으로만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뒤도 돌아볼 수 있는 조금의 여유와 함께 낡고 먼지 쌓인 추억들도 차곡차곡 잘 챙기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부디 이번 전시회 주인공인 박태규 화가가 화랑에서 붙여준 '마지막 영화간판쟁이 박태규'가 아닌 페인트 냄새 진동하는 광주극장 미술실에서 간판에 또 다른 자신을 그리고 있는 '영원한 영화간판쟁이'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보내본다.  

아트무브(www.artmov.com)에 가면 사이버전시와 함께 ‘박태규 동영상 인터뷰’를 볼 수 있으며, 광주 롯데화랑 전시가 끝난 후에는 광주극장 영화박물관에서 계속 전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