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임칼럼… 손가락
“손가락이라고 기능이 다 같은 건 아닙니다.”
드레싱 중인 의사선생님께선 다섯 손가락의 역할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신다.
각 손가락이 가진 기능 중 물리적인 힘, 동력에 의거한 가치판단이다. 엄지가 50%, 검지가 30%, 그리고 중지가 20%를 담당한단다. 하니 내가 다친 소지와 약지는 덤인 셈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모양삼아 붙어있는 격이란다.
불의의 사고로 혹여 그 두 손가락이 송두리째 상실될지라도 장애척도의 적용조차 되지 않는단다. 하필 오른손이어서 유감이긴 하지만 우수리격인 두 손가락의 상해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랄까.
망중한이라던가. 바삐 치닫던 내 생에 처음 맞는 휴가 아닌 휴가다. 한가로이 침상에 누워 하나하나 손가락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러다 붕대 감긴 오른손의 네 번째 손가락, 그에 시선이 머문다. 약속, 맹세 등등 우리 생의 자못 거룩한 행위에 동원되는 새끼손가락은 그나마 대접받은 셈이다.
생에 빛나는 날의 반지조차 왼손의 몫이니 이 손가락은 호사와도 거리가 멀다. 별다른 소용없는, 적절한 쓰임 없는 존재의 고독에 발동한 측은지심일까. 주인의 부주의로 입은 손상으로 붕대 칭칭 동여 맨 처지에 이른 그 손가락이 어쩐지 애잔하다.
늙어 되돌아 볼 추억이 없는 이가 가장 불쌍하다던가. 손가락은 편히 산, 생 통틀어 그 어떤 격정에도 휘말린 적 없는 사람을 닮았다. 당신은 무얼 하며, 무얼 추구하며 살아냈느냐, 어느 새 나는 그 특징 없는 오른손의 네 번째 손가락을 의인화한 공상으로 치닫는다. 한 몸에 달렸으나 판이하게 다른 두 손의 역할처럼 한 부모에, 한 세상에 태어났으나 각기 다른 행로를 가는, 참으로 공평치 않은 인생길이다.
유년의 어느 밤 어머니의 무서운 얘기가 시작되기 전 우리 형제들은 자주 다퉜다. 공포에 안온한 그러니까 이불의 한 가운데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다. 저보다 키 작고 약한 형제를 맨 가로 밀쳤으니 결코 만만치 않은 성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유추해 낸 그의 궤적 역시 지루하다. 호리한 체격에서 지상병담(紙上兵談)에 능한 책상물림의 묵은 냄새 풍긴다. 결단코 블루칼라의 직종이 아닌 선비풍 인상에 걸맞은 모나지 않는 생, 그렇다면 지극히 단조로운 생을 꾸린 그에게 닥친 이번 사고의 정체는, 아니 의미는 뭘까.
문득 떠오른 단어가 하방(下放)이다. 하방은 중국에서 지식인들의 지적권위주의 행태를 뜯어 고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상산하향(上山下鄕), 말하자면 산간벽지와 북방의 광활한 황무지에 보내 노동을 하게 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왼손이야 어차피 출신부터 귀품이니 제쳐두자. 졸지에 오른손을 묶이니 세수도, 밥도, 제대로 씻을 수조차 없다.
오호라! 내 모든 일상이 오른손의 노고로 지탱 되었구나. 긴 세월 수고한 내 오른손을 내 왼손이 천천히 어루만진다. 껍질 벗겨지고, 물집이 생기는 건 다반사였다. 때론 베어 뚝뚝 피 흘리며 치열하게 살아낸 오른 손은 마디마다 상흔이다. 가난한 집, 형제들의 희생으로 유일하게 안존하였던 네 번째 손가락은 이제야 몸소 하방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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