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뛰어넘은 북학 사상의 선구자, 유수원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1. 북벌에서 북학의 시대로
두 차례의 호란을 경험하고 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조선후기 사회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사상적으로 여전히 숭명반청(崇明反淸)과 북벌(北伐)의 분위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군사강국 청의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청은 여전히 오랑캐의 나라라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었고 명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중국의 선진문화의 계승자는 조선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 즉 소중화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집권층의 일각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불어 왔다. 주자성리학을 사상의 중심으로 하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청나라의 선진 문명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학풍인 ‘북학’은 이전까지 청을 적대시하여 정벌하자는 ‘북벌’과는 완전히 다른 사상 논리였다. 1980년대까지 반공정책을 철저히 고수하다가, 1990년대 이후 러시아 등 동구권 공산국가 및 북한, 중국과도 정치, 문화, 경제적 교류를 하는 현대사와도 유사하다고 할까?
당시의 청나라는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6~1795)가 연이어 재위하여 중국 역대문화들이 정리되고 서양 과학기술 문명 도입이 활발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북학사상 전파의 선구적인 역할을 학자가 있었다. 소론 출신이었고 역모죄로 처형된 까닭 때문에 여전히 그 이름이 생소한 유수원이다.
2. 장애를 극복하고, 개혁서 『우서(迂書)』를 저술
유수원((柳壽垣:1694~1755)은 1694년(숙종 20) 충주에서 출생했으나, 그의 친족은 주로 서울과 그 근교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중견관료 가문이었다. 당색으로는 소론에 속하였다. 유수원은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5세에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에 정언, 낭천현감, 지평, 단양군수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나, 1755년(영조 31) 나주의 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나주 괘서사건은 전라도 나주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의 도탄이 심하여 거병하노라’는 벽보가 붙은 데서 유래한 사건으로, 영조대에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대거 화를 입었다.
유수원이 실제 역모에 가담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와 함께 처형된 심악이라는 인물이 마지막 공초에서 “수원이 사형된 것은 흉언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대역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 수원과 함께 죽게 되었으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가”라고 한 것에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유수원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유수원은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했지만, 그의 나이 40세를 전후한 시절인 1729년(영조 5)~1737년(영조 13)에 걸쳐, 귀머거리인 신체적 장애로 시달리면서도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내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우서』를 저술하였다.
『우서』는 그가 가장 혈기왕성하면서도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던 시절 그의 울분과 정열을 연구와 저술에 쏟아 부어 맺어진 하나의 결실이었다. ‘우서’라는 제목은 ‘우활(迂闊:사정에 어둡고 실용에 적합하지 못함)하여 세상에 쓰이기 어렵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이것은 단지 저자의 겸손함을 보여줄 뿐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초기 북학 사상의 주요한 내용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우서』가 지니는 내용의 혁신성은 당시 많은 지식인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1736년 마침내 『우서』는 영조에게 보고가 되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은 각각 세 사람씩 천거하고, 정부의 서벽(西壁)과 육조, 비국 당상, 삼사의 장관, 양국(兩局)의 대장(大將), 팔도의 감사, 양도(兩都)의 유수는 각각 두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라.”하였다. 비국 당상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단양 군수 유수원이 귀는 비록 먹었으나 문장을 잘합니다. 책을 한 권 지었는데, 나라를 위한 경륜을 논한 것입니다. 헛되이 늙는 것이 아깝습니다.”하였는데,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 역시 그 책을 보았는데, 책이름을 《우서(迂書)》라 합니다. 주장과 논변이 매우 이채롭습니다.”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명하여 구해 올리게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13년 10월 24일(무신)
영조는 『우서』를 읽어 본 후에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술은 선유(先儒)의 말을 뽑아 모아서 공교(工巧)로움을 구하는 데 지나지 않는데, 이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만을 기술하였으니, 참으로 귀하다’고 하여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귀가 먹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유수원은 신체적 장애를 지닌 인물이었다. 장애를 극복하고 완성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서의 의미는 보다 각별하다.
3. 백성 모두가 일하고, 상공업을 진흥해야
『우서』는 문답체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 구성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논문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77개의 항목이 논지의 전개에 따라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는데, 처음 6개 항목은 서론, 다음 69개 항목은 본론, 마지막 2항목은 결론에 해당하고 있다.
서론에서 유수원은 국허민빈(國虛民貧)의 원인을 ‘사민불분(四民不分)’, 즉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백성 모두가 각자의 생업에 전업하지 못하는데서 찾고 있다. 양반 문벌 중심의 신분질서가 변화되지 않으면 백성들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지 못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민일치(四民一致)’, 즉 신분제 질서를 파기하여 백성들의 평등을 이루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제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신분제 질서의 파기를 위한 구체적인 개혁 방안들을 정치·경제·사상·신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제시하고 있다. 신분제 질서의 해체에 관한 견해로는 「논문벌지폐(論門閥之弊)」, 「논과거조례(論科擧條例)」등이 있으며, 관료기구의 적절한 운영에 대해서는 「논관제지폐(論官制之弊)」, 「논구임직관사례(論久任職官事例)」등이 있다. 그의 개혁안 중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상공업의 진흥을 통해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40항목의 논설이 정리되어 있는데, 화폐, 공장(工匠), 군제(軍制), 어염(魚鹽) 등 다양한 내용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유수원은 위의 논설들을 통하여 무위도식하면서 문벌에 끼려고 애쓰는 양반들을 전업시켜 농·공·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사·농·공·상을 평등한 직업으로 만들어 전문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농업에 있어서는 무리한 토지개혁 보다는 상업적 경영과 기술의 혁신을 통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상업에 있어서는 상인 서로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규모의 확대와 상인이 생산자를 구성하여 생산과 판매를 주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대상인이 학교와 교량을 건설한다든지 방위시설을 구축하여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대기업이 사회간접 자본을 투자하거나 낙후된 지역사회의 개발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유수원에 의해 제시되었던 초기 북학사상은 그의 뒤를 잇는 박지원, 북제가, 홍대용 등의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18세기 후반 조선후기 사회를 풍미하는 시대사상으로 부각되게 된다. 한 장애 학자의 선구적인 업적이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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