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나주 목사고을시장 사람들⑤ 태양수산 이재석 대표
◇ ◇고객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선한 수산물을 제공하겠다는 이재석 사장의 꿈은 태양수산 프랜차이즈를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하늘을 날고 싶었던 ‘스튜어드’의 꿈 수산시장 세계화로 꼭 이룰 터
새벽시장 나가는 엄니 따라 나가 배웅하던 기특한 장남, 가업 이어 수산시장 CEO로
“목사고을시장은 돈 버는 공간 아닌 배움의 터전, 가장 싱싱한 생선으로 승부합니다”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오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문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2년 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오늘의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대중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나주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왔던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목사고을시장 주름잡는 DJ 이재석
“오늘도 변함없이 목사고을시장을 찾아주신 상인과 고객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잘 생긴 DJ 이재석과 이쁜이 공주 배현숙이 진행하는 상인라디오 방송입니다.
오늘도 펄떡펄떡 뛰는 생생한 늬~우~~스와 목사고을 퀴~~이즈가 준비돼 있는데요, 소식 전하기에 앞서 오늘 상품부터 소개해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상품 보시면 지금 당장 시장으로 달려오고 싶으실 걸요? 장날에 오셔서 장도 보시고, 라디오도 듣고, 상품도 타가는 좋은 시간되시길 바라면서 시장라디오 소식 전해드립니다.”
4일과 9일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목사고을시장 상인방송 진행자 이재석·배현숙 콤비. 명쾌하면서도 재치있는 진행으로 시장상인들은 물론 고객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워낙 진행이 매끄럽다보니 외부에서 전문 MC를 섭외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두 진행자는 모두 시장상인들이다.
이 가운데 태양수산의 젊은 CEO 이재석(42·나주시 대호동)사장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반듯한 외모에 유머가 넘쳐 보이는 표정이 자칫 연예인(?)으로 오해를 살 만하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의 짐을 나눠져야 한다는 애어른의 성장기를 거쳤다.
새벽시장 나가는 엄마를 배웅하며
이재석 사장은 어릴적 추억이 깃든 고향이 많다. 나주시 서내동 사매기가 탯자리지만 아버지의 고향인 강진군 도암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는 외가가 있는 영암군 신북면에서 보내고 지금의 생활터전은 나주시 대호동, 일터는 영암을 종횡무진하며 생활을 하고 있다.
2남1녀 중 장남이었던 이 사장은 7세 무렵부터 새벽시장에 나가는 어머니를 배웅하기 위해 이른 새벽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갔다가 들어와 곤히 잠든 동생들을 깨워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를 가는 기특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나는 장사는 안 해야지” 하는 다짐과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회사원’을 꿈꾸며 지극히 소박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이재석은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됐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성적은 늘 중위권에 머물렀다. 아마도 워낙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건강이 안 좋았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결국 대학입시에 두 번의 고배를 마신 뒤 어머니를 도와 운전일을 돕던 재석은 스물한 살 때 군대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게 됐다. 그런데 대한민국 남자들 대부분이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군 생활이 재석에게는 ‘신세계’와도 같았다고 한다.
군에서 하는 혹한기, 혹서기 훈련이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한 트레이닝 같았고, 고생을 통해서 점점 강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제대한 뒤에도 한 1년 동안은 매일 아침 군 시절 기상시간에 맞춰 일어나 아침구보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공부를 시작해 전문대 관광학과에 진학한 재석은 새벽이면 어머니를 도와 남광주시장과 양동시장으로 배달을 다니며 용돈벌이를 했고, 1학년과 2학년 때 과 대표를 맡아 활동하며 남다른 리더십으로 학생들과 교수들의 인정을 받게 됐다.
졸업을 앞두고 호주 리스본으로 한 달 동안 어학연수를 다녀온 재석은 ‘멋진 신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낯선 이방인에게도 관대하고 여유있게 대하는 현지주민들을 보면서 외국에서 살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고 그 꿈은 항공사 승무원(스튜어드)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로 나타났다.
장남이기에 접어야 했던 승무원의 꿈
이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동신대 영문학과에 편입하게 된 재석은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부모님을 도와야 하는 이중생활을 이어나갔다.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졸업을 앞두고 연로한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돕느냐, 스튜어드의 꿈을 안고 항공사에 취업을 하느냐 기로에 선 재석은 지도교수와 상담 끝에 “후회하지 않고 살려면 1년 동안만이라도 부모님을 돕도록 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수산물트럭을 운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재석은 1년이 지난 뒤 국내 항공사는 연령제한에 묶여 엄두를 못 내고, 연령제한이 35세인 외국항공사에 도전장을 내려 했으나 결국 장남이라는 부담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가업에 매진하게 됐다.
그래서 였을까? 그 때부터 사업이 잘 되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부모님 일을 맡아 시작한 지 1~2년 되던 해에 사업이 잘 돼 비닐하우스였던 물류창고를 새 건물로 건축하게 되고, 32세 되던 해에 결혼도 하게 됐다.
물론 두 동생의 뒷바라지와 트럭일을 하던 아버지의 일이 어렵게 되면서 고비도 있었지만 꿋꿋하게 이겨냈다.
일에 대해서만큼은 남다른 승부욕을 가졌던 때문인지 이재석 사장의 사업은 정상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직접 바다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수산물을 고르고,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납품한 수산물에 불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수산물의 신선도와 고급화에 신경을 쏟았다.
밤이면 현장 물류창고에 마련된 콘테이너 임시숙소에서 아내와 함께 돈 세는 재미로 심신의 피로를 씻었다.
그러다 평소 알고 지내던 매일홍어 박재민 사장의 제안으로 목사고을시장에 가게를 내게 됐다. 늘 현장만 뛰다 직접 점포를 운영하다 보니 신경 쓰이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7.5평 매장에서 고객들에게 가장 편안하게 수산물을 고르게 하기 위해 수족관과 냉장고의 위치를 바꾸고 또 바꿨다. 자신을 대신해 고객들을 맞이할 15년 경력의 파트너도 얻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싱싱하고 신선한 수산물을 공급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목사고을시장은 배움의 터전
이재석 사장은 시장상인회에서 운영하는 상인대학에서 배운 성공의 노하우를 직접 실천하기 위해 두 배의 발품을 팔았다. 고객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장사수완도 아니고 인맥도 아닌 친절과 최상의 상품이라는 생각으로 정신무장을 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목사고을시장은 돈 버는 공간이 아닌 배움의 터전이 됐다고.
이 사장의 꿈은 나주시내 어엿한 중심상권에 3층짜리 주상복합건물을 지어 수산물 도매와 즉석에서 싱싱한 회를 공급하는 전문식당을 함께 경영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 프랜차이즈 점포를 운영해 대한민국 수산시장의 새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야심찬 꿈도 키워나가고 있다.
현재 목사고을시장상인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재석 사장은 목사고을시장이 신생시장으로서 다양한 문화사업과 이벤트로 손님들의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발전방안은 목사고을시장 고유의 맛과 멋을 창출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 국제시장의 경우 마약김밥 하나로 손님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비는 것을 볼 때 목사고을시장도 전통시장으로서 먹거리와 고유한 콘텐츠를 창출해 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
이를 위해 이재석 사장은 시장 상인들과 더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면서 “나 혼자만 잘 되는 시장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 되는 시장을 만들자”는 각오를 힘주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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