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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사람들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건립추진위 최정웅 위원장

by 호호^.^아줌마 2009. 4. 11.

인터뷰…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건립추진위 최정웅 위원장


“안성현 선생, 월북 굴레 벗고

 

민족음악가로 새롭게 조명돼야”

 

 일제치하에서 우리민족의 광복을 애절하게 노래했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작곡가가 안성현 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교과서와 노래집에는 김소월 시, 작곡가 미상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과 3년 전 이 노래의 작곡가가 월북음악가 안성현이며, 그가 나주 출신이라는 사실은 지역사회에 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던 터에 이를 예사롭지 않게 여긴 이가 바로 최정웅(70·남평읍 남석리)씨였다.

 

광주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최 씨는 고향을 떠난 지 35년 만에 환(還)고향해 모교인 남평초등학교 100년사 발행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200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00년사를 마무리할 무렵 언론을 통해 알게 된 안성현의 부고기사는 최 씨에게 또 다른 사명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제자들에게 작곡가 미상으로 가르쳤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작곡자가 고향 선배였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던 것.

 

이때부터 안성현의 행적을 좇아 동분서주했던 최 씨는 안성현이 광주사범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광주교대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다행히 지인의 도움으로 서류보관창고를 뒤진 지 2시간 만에 안성현의 재직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남평초등학교  100년사 편집위원으로 함께 했던 지인들과 힘을 합쳐 ‘엄마야 누나야 노래연구회’를 발족하게 됐다. ‘안성현연구회’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그가 월북음악가라는 장벽으로 인해 노래연구회로 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단체를 결성하고 보니까 일이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안성현이 1936년말 아버지와 함께 함흥으로 이사를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남평읍사무소를 찾았을 때 당시 박명문 읍장의 흔쾌한 협조로 창고를 뒤진 끝에 호적 전적부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후 남평 출신의 김종 시인과 정경진 문화원장, 그리고 지역 안팎의 문화·예술계 후원에 힘입어 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게 됐다.

 

현재 목포시는 부용산음악제를 열고 있으며 목포시와 보성군 벌교읍은 노래비를 두고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다투다 2000년 벌교읍에, 2002년 목포여고에 각각 노래비를 건립했는데, 유독 작곡가의 고향인 남평은 조용했던 것이다.

 

최 위원장은 “바로 이웃한 광주 남구의 경우 정율성 선생이 중국의 대표적인 군가와 행진곡을 만들었지만 우리국민의 애창곡은 전무한데도 냉전의 사고에서 벗어나 ‘광주의 음악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마당에 남평인으로서 할 말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최 위원장은 “장성과 곡성에서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인 홍길동과 심청을 내세워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마당에 실존했던 위대한 민족음악가를 이대로 놔둬야 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더구나 똑같은 월북음악가인 가야금 명인 최옥삼, 정남희,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음악가로 손꼽히는 김순남 등은 이미 음악적으로 통일을 이룬 셈이다. 그러면 안성현과 그의 부친 안기옥 역시 냉전논리를 떨쳐버리고 우리 민족의 음악가로 재조명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최 위원장의 간절한 소망이다.

 

최 위원장은 지난해 11월에 열린 제4회 나주문화원의 날 노래비 건립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나주문화원(원장 정경진)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 김양순 기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건립의 숨은 공로자 최정웅 위원장이 지석강을 찾은 광주환경운동연합 관계자들과 노래비 앞에서 기념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