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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풀뿌리 언론들과의 만남

by 호호^.^아줌마 2009. 4. 23.

 

풀뿌리 언론들과의 만남

 

 광주에서 그 지역 주간신문 기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가 있었다. 사흘 간의 집중강의였는데 나는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을 맡았다. 저녁에는 자유토론이 있었고 이때 대화들이 열기를 띠면서 막걸리집으로 이동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야 말로 세미나를 방불케 하는 진지한 얘기들이 쏟아졌다. 그들도 느낀 것이 많았겠지만 나 또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의 일간지 기자 생활만 한 사람이, 그들에게 신문 편집에 관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라고 말하는 것이 가당한 일이기는 할까. 그들의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은 다음에 ‘강의’를 했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지역에서 발행되는 주간지들은 ‘지역지’라고 부른다. 지방의 일간지들을 ‘지방지’라고 부르는 것과 비교해볼 만 하다. 지역과 지방은 커버리지의 넓이 차이다. 지역은 좀 더 좁은 곳이며 지방은 몇 개의 지역을 합한 개념이다. 두 개의 낱말이 정말 그런 변별력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쓰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도시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대개 ‘지방신문’이며, 소도시나 군과 읍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지역신문’이다. 지방신문은 대개 일간지이며 지역신문은 주간지인 경우가 많다.


지역신문이 주간지인 이유에 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 일간지와 주간지의 차이는 매일 발행되느냐 혹은 일주일에 한번씩 발행되느냐 하는 ‘발행 횟수’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게 함의하는 내용은 뜻밖에 크다. 주간지는 발행 비용이 적게 든다. 찍는 부수가 적기 때문이다. 대개 일간지의 6분의 1(일요일 신문이 쉬는 관행을 생각할 때)만 찍으면 된다. 거기다가 한번에 찍어내는 부수 또한 일간지에 비해 적다. 주간신문의 인력 구성이나 임금을 보면 가히 놀랍다. 편집국장과 기자 단 두명이서 신문을 만드는 경우도 있고, 아예 편집기자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임금은 200만원이 넘으면 박수를 쳐줄 만한 곳이다. 최소한 인건비와 제작비라야 ‘빈약한 수입 여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땅의 주간신문은 게릴라라 할 만하다. 정규전으로 싸움을 할 수 있는 조직은 아니다.


주간신문을 풀뿌리언론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 태생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열악한 독자 환경 속에서 잡초처럼 피어나 생존한다. 그것은 이 땅의 언론의 시작이며 기반이라 할 만하다.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일견 눈물겹지만, 그런 몸부림의 와중에서 ‘사이비언론’의 폐해를 뿌려온 것도 사실이다. 소도시나 군의 인구 5만의 지역에서 5천부를 유가부수로 발행하는 지역신문이라면 상당히 견실한 모범생이다. 5천부를 찍는 인쇄비와 종이값, 그리고 인건비와 배포 비용을 따져보면 그들의 사업 모양새가 빤히 드러난다. 그 비용에서 신문값과 광고 액수를 따져보면 살림살이가 보이지 않는가. 16개 면을 하루에 혼자 제작한다는 ‘람보 편집기자’에게 그 수고에 걸맞는 돈을 주지 못하는 건, 주간신문 사업주들이 악덕경영주이기 때문 만은 아니다. 그의 고생을 줄이기 위해 인력을 증원하지 못하는 것 또한, 지방지의 경영이 악랄하기 때문 만은 아니다. 제작비 최소화로, 작은 시장에서 생존해야 하는 그들이 채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자’의 양심과 도덕성에 대해 강조하는 일은, 어찌 보면 참 한가해보인다. 절제된 편집과 독자 마인드를 역설하는 것 또한 공염불처럼 보인다. 그들은 애당초 편집 따위는 배우지도 않았고, 헤드라인과 디자인의 중요성 따위에는 그리 큰 관심도 없다. 그냥 다른 신문과 비슷하면 된다. 우리 고장에도 이런 신문이 나온다,라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얘기가 된다. 경영에 방심하다간 곧 넘어진다. 그날 내가 갔을 때도 한 신문이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우던 이웃이 넘어진 것을 그들은 섬뜩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우리도 저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다짐처럼 공유한다.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에는 이른바 지역주간신문들이 있으며 그들은 ‘벼룩같은 시장’에서 생존해가고 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왜 이런 신문사들을 만드는 것일까. 한 기자는 이런 대답을 해준다. “지역언론 사주들은 대개 지방에서 건설사를 가지고 있는 사업자입니다. 신문사를 차려서 나가는 비용을 따져보면, 안 차렸을 때 주위에서 뜯기는 비용보다 적다고 합니다.” 주위라고 표현된 것은 다른 지역언론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옛날처럼 노골적인 공갈 비리는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업의 껌껌한 부분을 물고늘어지는 신문사들은 있다는 얘기다. “석재 채취하는 현장에 신문사가 사흘만 카메라 들고 서있으면 건설사들은 대개 못견딥니다. 서류에 적힌 대로만 채취를 하다가는 사업을 하기 어려우니, 대개 신문사들에게 일당을 주듯 돈을 주고 돌아가게 합니다.” 이런 돈들이 지역신문의 빈약한 재정을 채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지역 신문사 사주는, 사업의 방패로 언론을 가지기도 하지만 또 지역 유지로 행세하는 부가적인 이익을 누린다. 신문이 창간되면 처음에는 지자체 관청들과 불화가 있지만 몇 년 안 가서 서로 뭔가를 주고받는 공생관계가 된다. 신문이 조지고 나면 관청은 태도가 부드러워지고, 또 신문도 관청의 광고나 부수 확장 등의 은혜를 입으면 점잖아진다. 그러면서 신문도 ‘살고’ 관청들도 ‘산다’. 지역신문은 이런 환경 속에서 피어나 있다.


물론 우량아로 자라난 지역신문도 있다.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를 잡아 여론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관청이나 기업과 타협하지 않고 강건하게 논조를 유지하기도 한다. 뛰어난 편집기자가 지역에 정착해서 지역 독자를 위한 독창적 서비스로 탄탄한 경영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이나 다른 사업과 연계하는 방식에 일찍이 눈 떠서 신문의 빈약한 사업구조를 개선하는 곳도 있었다. 이런 신문들의 편집 담당자들은 자부심과 열정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들은 자기 지역에서 조중동이나 무등일보 등의 광역일간지가 발붙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랑을 한다. 지역 주간지를 들여다 보면, 광역 대중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특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네방네의 시시콜콜한 기사들이 골목의 반찬가게처럼 널려있는 이 신문들의 강점을 어설픈 백화점형 신문이 이기기는 어렵겠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강의하고자 했던 내용들을 모두 포기했다. 대신 가장 기초적인 지면 정리 방식에 대해서 얘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목을 다는 다양한 노하우를 설명하려던 계획도 취소했다. 대신 주제목과 부제목으로 된 주부제형 제목이라도 하나 똑바로 배워서, 우선 독자와 ‘속시원한’ 소통을 할 수 있도록이라도 도와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주부제형 제목의 사례들을 여러 개 보여주고, 또 기사를 ‘출제’해서 제목을 달아보게 하였다. 무척이나 어려워했지만, 그래도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얘기들인지 즐겁게 받아들였다.


어쩌면 지금이 풀뿌리 언론시대의 시작인지 모른다. 지방자치가 뿌리를 내리고, 지역 독자들이 상당히 성숙해 있다. 여론과 정보의 유통이 ‘지역’ 만큼 절실한 곳도 없다. 이제 대중지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소규모 타겟을 겨냥한 지역신문의 비전을 얘기하기도 한다. 내게 편집을 배워간 기자들은 그러니까 ‘한 시대 변경의 언론운동’을 하고 있는 전사(戰士)들이기도 하다. 풀뿌리 언론이 건전해지기 위해서는, 국가가 무작정 돈을 지원해주는 건 아닌 듯 하다. 그보다는 건전한 지역언론 모델을 발굴하고 그런 언론들이 ‘나쁜 환경’에 굴복하거나 휩쓸리지 않도록 해주는 보다 치밀한 언론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 옥석을 가리고, 환경을 정비해주는 일들에 공을 기울일 때다.

 

출처 빈섬

원문 http://memolog.blog.naver.com/isomis/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