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적]
남도의 젖줄 영산강. 영산강 중류 나주 영동리에서 지난 2005년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5~6C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안엔 놀랍게도 인골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체로 남아 있었다. 15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인골은 발굴과 함께 논란에 휩싸였다.
김재현 교수 동아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영동리 인골은 일본 큐슈지역 사람들과 상당히 닮아 있다.”
인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발굴 팀은 전문기관에 DNA 검사를 의뢰했다. 고인골의 세포에서 의미 있는 시료를 추출하는 데만 1년 정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광호 교수 중앙대학교 생명과학과
“영동리에서 나온 인골은 유전적으로 일본의 현대인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정호 교수 동신대학교 문화기획학과
“이번 결과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고고학적으로 굉장히 흥미롭다.”
왜 이곳에서 현대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인골이 나온 것일까. 1500년 전 이곳엔 과연 누가 살았을까.
영산강 아파트형 고분의 미스터리
영동리 고분에서 발굴된 인골은 모두 23구. 1500년 전의 인골이 이처럼 많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1500년 전이라고 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그리고 인골이 발굴된 전라남도 나주는 우리가 백제지역으로 알고 있었던 곳입니다. 헌데 속속 들어나는 고고학적 증거의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백제와는 사뭇 다른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인골이 발굴된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지난 2005년 밭을 갈던 한 주민이 돌무덤 속 인골을 발견하면서 영동리 고분군은 세상에 알려졌다. 최근까지 4차에 걸쳐 발굴한 결과 이곳엔 웬만한 왕릉에 버금가는 7개의 커다란 봉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략 4C~6C에 걸쳐 조성된 봉분 안에는 40여개 무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인골의 발견이었다. 1500년 전 인골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무더기로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떻게 인골은 1500년을 버텨낸 것일까.
홍진석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학예 연구원
“여기 보시면 색깔이 두 개가 차이가 납니다. 여긴 연두색이고 반대편은 적갈색을 띠고 있는데 연두색을 띠고 있는 흙이 이 인근에 있는 영산강의 갯벌의 흙을 퍼 와서 석실을 만들면서 주변주변 빈 공간들을 전부 밀폐를 합니다. 그렇게 밀폐가 됐기 때문에 이 안에 들어있던 인골은 15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좋은 생태로 보존되었다.”
매장 방식도 독특했다. 무덤 하나에 많게는 다섯 구까지 여러 구의 인골이 함께 안치돼 있었다.
이정호 교수 동신대학교 문화기획학과
“처음에 한 두 사람을 안치했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때 안쪽에 추가로 안치했다. 뼈만 남은 것은 한쪽으로 가지런히 정리하고 새로 인골을 안치했다.”
인골이 발견된 무덤 두 곳에선 눈길을 끄는 다른 뼈도 함께 발굴됐다. 똬리를 튼 모양의 뱀뼈. 허물을 벗는 뱀처럼 사자의 환생을 기원하는 고대인의 제의 식이었을까. 마치 고분 전시장을 보는 듯 무덤 양식도 다양했다. 돌을 쌓아 시신이 들어갈 방을 만든 백제식 돌방(석실)무덤이 8기. 넓적한 돌로 상자처럼 네모난 곽을 만들어 관을 안치했던 석곽묘도 확인됐다.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옹관묘. 큰 항아리를 관으로 사용한 옹관은 현재까지 28기가 확인 됐는데 특이하게도 똑바로 세운 체 매장한 직치 옹관(세로로 세운 옹관)도 발굴됐다.
홍진석 학예연구원
“대부분 고분이 봉분 하나에 석실 하나인데 비하여 아파트형 고분은 다장의 형태로 석실 등 여러 무덤 양식이 한 봉분 속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아파트형 고분은 백제의 중심지였던 부여나 공주에선 보기 힘든 무덤 양식이다. 부장품이 어느 지역의 것인가를 두고 학자들 간의 의견도 분분했다. 이 지역에 관한 사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부장품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무덤에서는 다양한 토기들로 쏟아져 나왔다. 백제뿐 아니라 신라, 가야 등 주변국가들의 토기가 뒤섞여 있어 이들이 활발한 교류를 했음을 짐작케 한다. 함께 묻힌 철검은 묻힌 이의 정치적인 위상을 말해준다.
이정호 교수
“이 고분에 묻힌 사람들은 영산강 다시 평야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수장세력으로 추정된다.”
영산강 유역을 발판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던 영동리 고대인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다양한 무덤 양식이 섞여 있는 영동리의 아파트형 고분들. 이곳은 영산강 인근 평야를 지배했던 수장으로 무덤으로 추정이 되는데요. 발굴된 인골들은 15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대단히 양호했습니다. 발굴 팀은 이 인골의 형질과 유전정보를 얻기 위해서 전문기관에 분석을 의뢰했는데요. 과연 이 인골들이 기록엔 전혀 나와 있지 않는 영산강 고대사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인골의 대량 출토는 뜻밖의 성과였다. 정체가 불분명한 아파트형 고분의 주인을 밝히기 위해선 인골의 형질 정보가 중요했다. 동아대 고고학 연구실은 전국 각지에서 발굴된 고인골의 집산지다. 두개골의 형태상 특징과 각 부위의 길이 측정, 치아 상태 등을 살펴보므로 피장자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다른 지역의 고인골이 많지 않아 비교분석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영동리에서 수습된 인골 23구 중 석실의 인골이 가장 보존 상태가 좋았다. 그런데 석실은 전형적인 백제식 무덤. 석실 하나에 한두 명만 매장하는 백제와는 달리 영동리에선 최대 다섯 구의 시신이 함께 발견됐다.
김재현 교수
“뼈들이 치워지고 그 다음 사람이 들어가기 위해서 자리를 확보했다. 1~2세대 만에 구성된 가족묘가 아닌 3~4세대 이상의 구성원으로 된 가족묘로 추정된다.”
몇 세대의 걸친 다장은 영산강의 유역의 고유한 풍습으로 무덤 주인이 토착세력이었음을 말해준다.
“영산강 쪽 인골은 눈, 코, 입이 중앙으로 집중된 좁은 이목구비의 특징을 가진다. 신라나 가야 지역 인골들과는 다르다.”
한눈으로 보아도 영동리 인골의 차이점은 확연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굴된 인골과는 다른 생김새다.
“영동리 인골은 일본 큐슈지역 사람들과 상당히 흡사하다.”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중앙대학교의 DNA이 분석을 의뢰했다. 연구자의 신체 접촉으로 고인골 표본이 오염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살아있는 세포와는 달리 고인골은 DNA 체취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세포 속에 많이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가장 많이 활용한다.
‘고인골처럼 죽은 세포에서도 추출이 가능하여 일반 DNA검사가 불가능한 경우에 많이 활용된다.’
1500년 전 인골이 베일을 벗기까지 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2호석실의 여자와 1호 석곽의 남녀는 모계 유전자가 같았다. 다른 인골도 마찬가지여서 모계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광호 교수
“서로 다른 무덤에 묻힌 몇몇 인골들이 DNA 분석결과, 같은 모계의 가족으로 밝혀졌다.”
영동리 인골의 유전자를 백제, 신라, 일본의 고인골 유전자와 비교해봤다. 표본수가 적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결과는 놀라왔다.
‘저희들이 분석한 결과로서 해석을 해보면 영동리 인골은 현대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유사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영동리 인골은 유전적으로 백제, 신라보다 현대 일본인과 훨씬 가까웠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1) 5세기 당시 일본에 살았던 사람들과 영산강 유역 영동리에 산 사람들이 같은 집단일 가능성.
2) 5세기에 영동리에 살았던 사람이 일본에 이주해서 유전자를 남겼을 가능성.”
이 지역 토착세력으로 추정되는 영동리 인골. 유전자 분석결과는 영산강 유역 세력이 한반도보다는 일본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연 이들의 영향권은 어디까지였을까.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보다 현대일본인들과 더 유전적으로 가까운 영동리 고분의 인골 어떤 형태로든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의미일텐데요. 백제 왕실이 오사카, 교토 등 일본 중앙과 교류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은 영산강 유역 세력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문헌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과연 영산강 유역과 일본은 어떤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던 걸까요.
한반도 땅 끝 전라남도 해남. 고대부터 한중일 해상교류의 거점이었다. 얼마 전 해남 옥천면에서도 영동리 고분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 하나가 발굴됐다. 넓적한 돌로 만든 네모난 곽에 관을 안치했던 석곽무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흥미로운 부장품이 출토되면서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모양의 토기 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서수형 토기란 용과 같이 상서로운 동물을 형상화한 토기를 말하는데 이 지역에선 처음 발견된 것이다. 죽은 사람이 서수를 타고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길 바라는 제2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해남의 서수형 토기에는 성기를 드러낸 토우 즉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 올라타 있다. 토우는 신라의 대표적인 조형양식이다.
김용성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사람이 올라가 있습니다. 성기를 굉장히 과장해 놓았는데 신라 양식 토기들의 장경호라든지 고배 같은 곳에 붙는 토우들이 대부분 성기를 과장한다든지 했고 이렇게 점토 띠를 갖다가 주물러서 대략 앉히는 그러한 모습으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역시 신라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러한 물건들 자체가 해남지역에 나온다는 것은 아마 저 토기 이외에도 신라 토기가 6C가면서도 보이고 해남지역에서 백제, 왜 가야 토기 등 여러 양식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해남 지역이 해상 교류의 기착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출토된 유물은 그야말로 국제적이었다. 이모가이 조기로 만든 팔찌. 조개 팔찌는 일본 남쪽 오키나와에서 서식하는 이모가이나 세지가이 조개로 만드는 대표적인 일본 특산품이다. 이런 조개 팔찌는 신분이 높은 사람만 착용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만의총의 주인이 국제상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 가야 그리고 일본과 교류했던 국제상인. 이들 역시 영산강 유역을 장악한 세력 중 하나였다. 만의총에서 출토된 새발무늬 토기는 영산강 유역의 고유 토기다. 마치 밟고 지나간 듯 새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강봉룡 교수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백제계통의 유물보다 오히려 더 많은 유물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영산강 유역이 백제의 일부였다라고 하는 어떤 그런 부분을 뒷받침하기는 어렵지 않느냐 유물상으로 볼 때는...... 물론 백제하고도 교류를 했지만 가야와 왜와 교류를 더 활발하게 진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순신의 명량대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명량해협. 그는 험한 물길을 이용해 대승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해남 울돌목은 해류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물살이 빨라 물길을 모르면 통과 자체가 쉽지 않다. 영산강 세력은 이런 바닷길을 장악함으로써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성낙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관장
“영산강 유역은 백제가 왜와 통교할 때 중간에 꼭 거쳐야 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영산강 유역 세력이 향도(길 안내)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산강 세력권은 어디까지 확대됐을까. 지금도 우리나라와 활발히 교류를 하고 있는 일본의 후쿠오카. 지리적 조건 때문에 고대로부터 영산강 유역과 교류가 활발했다. 후쿠오카의 반즈카 고분. 이곳에선 백제계 토기들이 상당수 출토됐다. 하지만 토기는 백제계라기보다는 영산강 유역 토착세력의 것이었다.
‘이것이 반즈카 고분에서 출토된 새발무늬 토기입니다.’
토기 겉면에 새겨진 선명한 새발자국. 영산강 유역의 새발무늬 토기다.
미야모토 가즈오 큐슈대학 인문학연구원 교수
“이것은 6세기 유물입니다만 이것도 역시 전라남도에서도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라남도와의 관계는 (고대부터) 항상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반즈카 고분에서 발굴된 새발무늬 토기는 이것이 영산강 토착 세력의 영향권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정호 교수
“조족문(새발무늬) 토기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 계통 토기이다. 일본에서도 조족문 토기는 영산강 유역에서 건너간 것이 확실하다.”
지난 85년에 발굴된 일본 나라현의 후지노키 고분, 조성 시기는 6C 말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분에선 금동신발이 출토됐다. 화려하게 장식된 금동신발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물고기 장식. 물고기 장식 금동신발은 지금껏 발굴된 적이 없었다. 일본은 자기들만의 독창적인 유물이라며 흥분했다. 그런데 10여년이 흘러 지난 90년대 중반 한반도에서 또 하나의 물고기 장식 금동신발이 발견됐다.
전남 나주시 복암리 고분. 영동리 고분처럼 다양한 묘제가 혼합돼 있는 아파트형 고분이다. 금동신발은 옹관이 안치된 석실에서 발견됐다. 신발의 형태와 물고기 장식이 일본 후지노키 고분의 것과 흡사하다. 조사결과 나주 복암리의 금동신발이 후지노키의 것보다 100년가량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에 것에 비해 장식이 절제돼 있는 복암리 금동신발. 물고기 모양도 훨씬 사실적이고 정교하다.
학자들은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의 규모나 부장품의 수준으로 보아 영동리보다 큰 세력으로 보고 있다. 복암리에선 특이하게 석곽에 매장한 무덤도 발견되는데 그와 똑같은 무덤이 일본에서도 확인 됐다. 후쿠오카의 신마치 유적. 새발무늬 토기와 영동리 지역 특유의 아궁이가 발견돼 주목을 받았다. 이곳 역시 여러 가지 무덤 양식이 뒤섞여 있는데 석곽 안에 옹관을 넣어 매장한 방식은 복암리의 것과 판에 박은 듯 똑같다.
속속 드러나는 일본 내 영산강 세력의 유적은 이들의 영향권이 광범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DNA가 현대일본인과 유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최성락 목포대학교 박물관장
“3~4세기대에 영산강 유역 사람들이 일본 큐슈, 오사카 지역으로 이동하여 형질인류학적으로 비슷하다.”
이정호 교수
“영산강 유역의 왕성한 해양활동을 했던 다양한 흔적들이 보입니다. 이런 해양활동을 했던 흔적들이 단순히 어떤 물건이 왔다 갔다 한 그런 관계가 아니라 또는 무형의 문화들이 왔다 갔다 한 그런 관계가 아니라 인적인 교류도 충분히 있었다라고 생각되어 진다. 일본에서 보이는 영산강 유역의 계통의 그런 유적이나 유물들을 봐서는 영산강 유역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정주를 하고 뿌리를 내렸다라는 얘기가 된다. 그 사람들이 현대 일본인을 형성할 수 있는 그런 형질의 영향을 줬다라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들은 영산강 세력이 큐슈, 후쿠오카 뿐 아니라 일본 중앙인 나라, 오사카 지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백제 중심으로 서술되었던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사는 그 보다 앞서 문화를 전파했던 영산강 세력을 중심으로 새롭게 조명돼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영동리와 복암리 이 두 아파트형 고분들은 모두 3세기 옹관고분부터 시작이 된 무덤입니다. 이 옹관은 특이하게도 남도의 젖줄로 불리는 영산강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이른바 옹관고분 세력으로 불리는데요. 과연 이들은 어떻게 백제와 다른 문화를 만들어 갔던 걸까요.
지난해 나주문화재 연구소에서 대형옹관재현에 나섰다. 진흙에 모래를 섞어 강도를 높이고 점토를 가래떡처럼 빚어 한줄 한줄 쌓아올리는 1500년 전 제작 방식대로 그대로 성형에 들어갔다. 복암리 인근에서 발굴된 가마터를 바탕으로 4미터에 달하는 가마도 재현했다. 옹관은 건조에만 2개월이 걸렸다. 무거운 옹관을 가마까지 옮기기 위해 바닥에 모래를 깐 다음 굴려서 파손을 방지했다. 꼬박 하루 24시간 일주일 동안 10톤이 넘는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옹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이 가고 깨어졌다. 1500년 전 고대인들은 어떻게 옹관을 제작했던 것일까.
김성범 국립나주문화재 연구소 소장
“아마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대체로 10개월 내지 12개월 정도는 소요됐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인집단들을 관리하고 제어하고 통제함으로 해서 굉장히 영산강 유역을 아마 장악하고 이끌어가는 부족장 내지는 국가 성립 이전의 단계의 유력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옹관만 500여개. 아직도 곳곳에서 옹관을 깨내고 있다. 거대한 옹관 제작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는 만큼 옹관은 그 자체로 권위의 상징이었다. 크기가 다른 항아리 한 쌍을 맞물려 관으로 사용한 옹관. 그들은 왜 옹관을 고집했던 것일까.
성낙준 박물관장
“토기를 둘러 합치면 마치 알처럼 보이거든요. 형태로 봤을 때 그래서 그 알 속으로 집어 넣는다는 그래서 우리가 원래 태어날 때 알속에서 태어났지요. 아마 그런 것을 알고 알 속으로 집어넣어서 빨리 부활해라, 재생의 의미, 이런 뜻을 가지고 토기를 사용했지 않았나 보여 집니다.”
더러 아이를 매장하기 위해 작은 항아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수장 층을 매장하기 위해 대형옹관을 사용하는 곳은 영산강 일대가 유일하다. 5~6C는 옹관이 최고조로 달하는 시기로 2미터가 넘는 대형 옹관도 출토된다.
최성락 박물관장
“옹관묘에서는 부장품이 화려하거나 그런 것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초기에는 철제 칼 도자라든지 토기 몇 점, 옥, 옥류 몇 점 정도 나오지만 5세기 되어야 비로소 장검이 나온다든지 그런 무기류가 나옵니다.”
이 시기를 거치며 옹관고분 세력들은 정치적으로도 강력해진다. 백제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에 버금가는 화려한 금동관과 금동신발, 환두대도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옹관 고분을 공유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이 국가 형성 전의 연합체 단계까지 정치력을 키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했을까? 옹관고분의 발굴지는 영산강 유역 평야지대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이들은 농업보다는 해상 교역을 위주로 하는 상업세력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백제 왕릉에 버금가는 유난히 큰 옹관고분의 봉분이 해상세력의 흔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영산강 유역 쪽의 옹관고분들의 위치를 보면 입지 지형들이 대체로 보면 강가,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그런 나지막한 언덕들입니다. 그래서 강이나 바다에서 바라다 봤을 때 쌓아올린 봉토들이 한 눈에 그냥 다 보이는 그런 입지적 조건을 갖고 있거든요. 그 얘기는 다른 말로 풀이하자면 거기에 묻힌 사람들이 강이나 바다에서 수상활동들을 활발하게 했기 때문에 그 표식을 보고 그냥 바로 찾아 올 수 있는 이정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옹관세력이 영산강 유역을 주 무대로 한 것은 영산강이 최대 규모의 내륙수로였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영산강 유역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배 조각이 발굴됐다.
안재철 영해문화재연구원 연구원장
“2006년 영산강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초기의 선박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발견된 고려시대의 선편 모두 일곱 개가 수습됐는데 파편의 크기로 미뤄보면 대략 200톤가량의 대형선박이 만들어진다.
“배밑판하고 외판을 연결해주는 부분으로 L자 형태의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선편 규모로 봐서 길이가 약 32m~42m 정도의 대선으로 추정됩니다. 또 그런 고려시대 때의 문헌 기록에도 대선기록들은 남아 있습니다. 나주에는 영산창이 있어가지고 옛날 조창이 있었거든요. 약 100~200톤 대선”
쌀 천석을 실을 수 있을 정도의 대선이었던 나주선은 영산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실어 날았다. 영산강 하구 목포항에서 나주 영산포까지 불과 100년 전만에도 영산강은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내륙수로였다.
“강 옆으로 충적퇴지가 형성되면서 수로가 좁아졌다. 영산강의 강폭은 지금보다 6배 정도 더 컸었다.”
지금은 충적평야가 돼 옛 영산강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5대 수역은 현재와 비교해 대략 6배 이상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야말로 바다처럼 넓은 강이었다.
성낙준 관장
“돛을 달고 배가 나가면 빠른 경우에는 거의 20노트(Knot=40Km)까지도 갈 수가 있습니다. 굉장히 빠르거든요. 강은 고대의 고속도로라고 했습니다.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물과 친숙하면서 그런 수상활동들을 활발하게 하면서 아마 일본열도라든지 중국대륙과 활발하게 교역활동을 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영산강과 수로로 연결된 서남해 바다를 장악했던 영산강 세력들. 1500년 동안 묻혀있던 영동리 고분과 인골의 발굴로 이제 한반도 서남해 지역의 고대사가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1500년 전 해양시대를 열었던 영산강 유역 세력들. 그들은 해상 교역을 통해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또 전해주기도 했던 개방적인 세력이었습니다. 1500년 전 인골이 현대 일본인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영향력이 광범위 했었다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1500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고대인들과 함께 한반도의 해양 교류사는 다시 기록돼야 할 겁니다.
▲ 나주 영동리 고분 중 제4호분 발굴현장
▲ 나주 영동리 출토 토기들
▲ 해남 만의총 서수형 토기
※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
[요약본]
영산강 아파트형 고분의 미스터리
지난 2005년 영산강 중류 지역인 전라남도 나주 영동리에서
5~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0여구가 발견됐다.
1500년 전의 인골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발굴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게다가 이 고분군 안에는 백제의 영향력을 벗어난
여러 양식의 무덤들이 나타났는데..
여러 종류의 무덤이 아파트처럼 얽혀 있는
영동리 고분에 대한 의문은 깊어만 갔다.
과연 1500년 전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옹관 고분의 등장이 주는 단서
나주 영동리 고분은 지난 2005년 밭을 개간하는 과정 중 석실과 인골이 노출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4세기~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고분에는 다양한 무덤 양식을 볼 수 있다. 돌로 방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한 백제식 돌방무덤, 판석으로 관을 만든 돌널무덤, 옹관으로 된 무덤까지..... 이 중 인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은 6세기 것으로, 석실이 6개, 7개씩 붙어있는 형태의 아파트형 고분.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은 어느 시대, 어떤 정치체제의 집단이었을까?
“인골 분석 결과, 현대 일본인과 유사하다”
외부 세력의 유입? 또 다른 일본 전파의 흔적?
영동리 고분 발굴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1500년 전 인골이 무려 23구가 발굴된 것이다. 수습된 인골은 두개골의 이목구비가 모여 있어, 그 동안 한반도에서 수습된 다른 두개골과 차이가 있었다. 또한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어서 형질분석과 DNA분석이 가능했다. 분석 결과 유전적으로 신라, 가야인과 차이를 보였고, 조선인들과도 차이가 있었다. 놀랍게도 인골은 현대 일본인과 가장 가까웠는데... 이러한 유사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옹관고분을 사용했던 독립적 정치세력이 있었다”
다국적 출토 유물이 보여주는 세력의 정체는?
최근 영산강 유역의 고분에서 주목 받는 무덤 양식이 바로 옹관이다. 크기가 큰 옹기 한 쌍을 관으로 이용해 시신을 매장하는 방식으로, 최근 영산강 일대의 영동리, 복암리 고분에서 수장급이 사용한 무덤의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옹관고분을 사용한 세력이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정치연합체라는 점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부장품에서도 백제보다는 신라나 가야, 심지어는 왜에 가까운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결국 이들이 백제보다는 다른 지역과 더 많이 교류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영산강은 해상 세력에 의한 자유무역지대였다.”
비밀 해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영산강
상서로운 동물이 나타나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 유물이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
해남 군곡리 패총과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고려 시대의 배편들은 과거 영산강이 300톤 정도의 배가 드나들 정도로 큰 강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것을 통해 옹관 고분 세력은 4~6세기 경 영산강 유역에 다양한 지역과 활발히 교류한 해상 교역 세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교류는 일본의 마루쿠야마 고분과 일본 신마치 집자리에도 영향을 주는데....
이러한 새로운 교류 세력을 입증하는 유적과 유물의 발굴은 영산강 유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과제를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이다.
원문출처 : http://www.kbs.co.kr/1tv/sisa/tracehistory/vod/review/1585306_28170.html
참고로 HD 역사스페셜의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방송분과 금동신발에 대해선 <최초발굴. 금동신발 속의 뼈, 그는 누구인가>을 보시면 도움을 받을 것이다. 또한 역사스페셜의 <나주대형옹관의 미스터리 고대영산강에 왕국이 있었다>의 방송분도 참조하시기를......
'나주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에 새긴 백제시대 희귀기록 ‘화제’ (0) | 2009.06.07 |
---|---|
나주선(船) 천년만의 출항 ‘카운트다운’ (0) | 2009.06.06 |
유감천만 이 사진 (0) | 2009.06.03 |
백제 기밀문서 봉검(封檢) 등 목간(木簡) 30여점 밝혀져 (0) | 2009.06.03 |
나주 산포뜰 새들의 천국 (0) | 2009.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