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인생에서 은혜 충만한 삶 살기까지‘오로지 충성’
전남노회남선교회연합회 43기 회장 취임한 김맹진 장로
“지난 1987년 장성에서 경영하던 사업이 전 사업주의 부도로 문을 닫으면서 빈 손들고 나주에 와서 제2의 삶을 개척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를 맞아준 곳이 바로 나주교회였고 제 신앙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지만 생면부지의 타향에서 제2의 인생살이를 시작한 지 올해로 23년째라는 김맹진(63)장로.
장성에서 통조림공장을 인수해 운영하던 중 전 사업주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빚을 떠안게 된 김 장로는 주변에서 “당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니 조용히 밤중에 떠나라”고 야반도주를 권유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자신을 믿고 일했던 직원들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생각에 남은 재산을 다 털어 직원들 밀린 임금과 부채를 청산하게 됐다. 그리하여 빈 손들고 찾은 곳이 바로 나주였다.
김 장로는 당시 나주에 주산학원, 피아노학원은 있지만 입시학원이 없던 것에 착안해 학원을 냈다. 그리고 교회를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OO교회를 나가기로 마음먹고 있던 터에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나주교회 정남교 목사였다. 김 장로가 장성에서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정남교 목사님께 일부러 연락을 해주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나주교회와 인연을 맺은 것이 또 23년째다.
학원은 처음 2년 동안은 적자운영이었으나 88~89년 무렵부터 학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해 90년께는 학원생이 무려 3천명에 이르게 됐다.
실패한 통조림공장 사장에서 성공한 학원 원장으로 ‘인생역전’을 누리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인생역전을 하게 된다. 92년도에 KBS방송국에 입사를 하게 된 것.
97년부터 2년 동안 서울에서 근무를 하게 됐는데 김 장로는 당시에도 주일만큼은 본교회에서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서울과 나주를 오갔다.
당시 제직회 서기를 맡고 있던 터라 한 주도 빠져서는 안된다는 각오가 컸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번은 버스기사가 졸음운전을 했던지 버스가 차선을 비껴가는 것을 보고 급히 기사를 흔들어 깨워 큰 화를 모면했던 순간도 있었다. 김 장로가 아니었다면 대형참사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던 것.
김 장로의 신앙생활은 고난 속에 연단 받고 은혜로 채움을 경험하는 체험신앙의 연속이었다.
2008년 봄 몸에 이상을 느껴 종합검진을 받은 결과 직장암이라는 진단을 받는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힘겨운 투병생활, 김 장로는 자신의 고통 보다 더 큰 아픔으로 기도와 간병을 해준 아내 이경자 권사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 한다. 아울러 온 교회가 기도하며 성원해준 사랑의 힘이 병마(病魔)를 물리친 원동력이었음을 강조한다.
지난해 연말 정년퇴직한 김 장로는 올해 또 하나의 직분으로 일을 시작한다.
전남노회 192개 교회가 참여하는 남선교회연합회 회장으로서 부름을 받는 것. 김 장로의 각오는 특별하지 않다. 연간 25개 정도의 사업을 추진하게 되는데 원칙을 살려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며, 직분자들이 맡은 바 임무를 최대한 수행할 수 있도록 조정자로서 역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김맹진 장로 부부에게는 세상이 부러워할만한 보물이 있다. 바로 네 명의 딸. 장녀가 태어난 때가 공교롭게도 80년 5월 18일이었다. 가난한 부부에게는 저녁 끓일 양식이 없어 하루를 보내면서도 염려하지 않았던 것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순전한 믿음이었다.
주일 오후 찬양으로 예배를 준비하는 막내딸 선순(아명 꽃님)을 바라보는 부부는 감사함 속에서 은혜가 우러남을 오늘도 실감하며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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