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임 칼럼…콩물국수를 먹으며
점심으로 콩물국수를 먹는다. 행사준비에 바쁜 언니는 일찌감치 식사를 마쳤고, 본디 면 종류를 즐기지 않는 데다 줄곧 어떤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자꾸 느릿 거리고 두 배쯤 양이 많은 그릇의 형부도 아직 멀었다.
“형이라고는 이 세상에 딱 한 분뿐이었는데....”
‘죽음’이란 명제에 사로잡힌 내 속내를 알아채셨을 리 만무건만 이렇게 시작된 형부의 얘기다.
임파선암에, 전립선암이 겹쳐 신장 기능도 30%만 가동, 결국 6개월이란 시한부 생을 통고 받은 남달리 절친했던 형님이다. 볼썽사납게 퉁퉁 부은 몸을 이끌고 이왕에 죽을 목숨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환향했단다. 우연히 소식을 접한 형부는 형의 사주를 밤새워 톱아 보았다. 결단코 죽을 운이 아니더란다.
형부의 장담에 반신반의, 대신해 그동안 자신을 얽어매었던 일도, 곧 죽을 암환자라는 강박감도 풀어 던졌다던가. 이미 병원에서도 포기한 환자이니 별다른 치료도 없이 틈만 나면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고향마을의 산과 들길을 쏘다녔을 뿐. 놀랍게도 신장 기능회복에 이어 암세포 75% 소멸,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전 빠른 이야기 전개에 놀라 멍해진 내게 “요 근래 100% 완치 판정! 많아, 많아!”를 연발하며 도저히 불가능한 양이라더니 어느새 말끔히 비운 형부의 콩물국수 그릇과 우연의 일치랄까.
우주의 무게에 버금가는 제 생명줄을 놓아버린 그 사람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삼성그룹 창업주의 손자다. 하긴 그의 친가 뿐 아니다. 처가도 부호의 반열이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죽음, 형의 구속, 잇따른 경제적 악재로 5년 간 월세 아파트에 홀로 살며 가끔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던가.
난 안다. 골수에 파고들었을 그의 외로움을. 돌이켜 보면 해마다 이어지던 우리 집안의 연례행사였다. 할머니를 위시해 큰집 가족, 다섯 고모네 등등, 김씨 대가족이 모여 치르던 봄맞이 창경원 벚꽃놀이와 무등산 물맞이 행사는 언제부터 자취를 감추었을까.
맞다. 망치소리 요란하던 아버지의 공장이, 하얀집으로 각인된 불로동 집이 사라질 무렵 함께 사라졌다. 오래 전 멸종된 조류명(鳥類名) 같은 게 사람들의 인심이었다. 집안의 몰락과 함께 찾아 온 극심한 소외감은 때때로 예민한 감성의 나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비록 땅에 돌조각으로 그었지만 밟으면 놀이에서 여지없이 탈락되던 유년의 금은 금기(禁忌) 터득의 표식이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결코 내가 범해서는 안 되는 평행선을 내 환(幻) 속에서 교차시키기 몇 번이었던가.
고통, 단절, 끝, 침묵 같은 어두운 면을 떠올리는 게 죽음인가하면 자유, 해방, 시공간의 확장 같은 밝은 면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죽음이이서인가. 사랑을 잃었을 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슬픔이 목까지 차오를 때, 급기야 우리는 죽음을 생각한다. 불행을 잊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의 절반을 얻은 것이라 했다. 가연(佳緣)도 악연(惡緣)도 먼먼 후일 순간의 기시감(旣示感)으로 잠시 해후(邂逅)할 뿐. 이 강을 건너면 추레한 현실과는 영원히 이별이라는 것이 가장 강력한 유혹이었으리라.
국수 그릇을 씻는다. 툭 끊긴 면발 몇 조각을 쓰레기통에 쓸어 담는데 울컥 치미는 체증, 안타깝다. 죽음과 악수를 청할 만큼 처절했을 한 사람의 고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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