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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근로정신대 출신 양금덕 할머니 '절규'

by 호호^.^아줌마 2010. 8. 14.

◇11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14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의 한과 절규’라는 주제로 한일강제합병 100주년을 맞아 일제 치하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근로정신대 출신 양금덕 할머니의 절규

 

“우리의 피맺힌 절규가 고작 자장면 반 그릇 값이냐?”

11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 근로정신대의 실상 증언 

 

“일본에 갔다 오면 돈도 벌고 꿈에 그리던 여학교도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돌아올 때는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들 ‘나도 가요, 나도 가요’ 하면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열 셋이었습니다.”

 

지난 11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14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의 한과 절규’라는 주제로 한일강제합병 100주년을 맞아 일제 치하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광주 광산구 출신 민주당 이용섭 의원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인 ‘일제피해자공제조합’ 공동주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나주 출신 양금덕(82·광주시 양동) 할머니의 증언이 이어져 눈시울을 뜨거워지게 했다.

 

당일 국회방송으로 생방송 된 이날 증언에서 양 할머니는 철모르는 여학생들이 어떻게 정신대에 징집됐고, 해방 이후 어떤 굴욕적인 삶을 살았는지, 그 삶을 보상받기 위해 일본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어떻게 투쟁해왔는지 피맺힌 절규를 쏟아놓았다.

돈도 벌고 여학교 보내준다고...

 

1944년 5월, 당시 나주대정국민학교(현 나주초등학교) 6학년이던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에 다녀오면 돈도 벌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의 말을 듣고 손을 들었다.

 

교장은 다시 담임에게 그 중에서 머리 좋고 신체 건강한 학생을 10명만 고르라고 했고, 당시 급장이었던 양 할머니는 첫 번째로 지목됐는데 그렇게 나주에서 24명의 여학생들이 일본으로 향했다. 나주와 목포, 순천 등 전남에서 141명, 충남 138명이 함께했다. 모두 13~16살의 소녀들이었다. 군 위안부 문제에 가려 해방 60년이 되도록 그 존재조차 조명되지 않았던 ‘조선근로정신대’의 시작이었다.

 

양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나고야 군함도에 있는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사였다. 돈도 벌고 중학교도 갈 수 있다던 일본땅,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노동과 배고픔이었다. 감금상태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하루 8~10시간의 중노동을 해야 했다.

 

“아침 7시에 밥 먹고 작업장으로 이동할 때는 네 줄로 맞춰서 갔죠. 서서 앞사람 뒷꼭지만 보고 가야 했어요. 잠시 눈이라도 돌리면 어디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발로 툭툭 찼지요. 그러다 보니 맨날 그 길을 지나면서도 어디가 어디인 줄도 모른데다, 돈도 없어 도망갈 수도 없었죠.”

 

굶주림과 심한 노동에 무너진 꿈

 

양 할머니에게 배정된 일은 시너나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아내고,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줄칼로 다듬는 일이었다. 공장에서는 24명의 작업인부에 2명의 일본인 반장이 배치돼 수시로 작업장을 왕래하며 감시했다.

 

특히, 시너의 강한 독성 냄새는 여간 고약한 게 아니었다. 냄새 때문에 두통을 앓고 머리까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한겨울이었지만 장갑조차 지급되지 않아 손 곳곳이 터지고, 찢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 치료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기에, 부상에도 다시 작업대에 서야 했다. 그저 일하는 ‘기계’ 취급이었다.

 

배고픔과 조선인에 대한 멸시도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좋은 밥과 반찬을 배불리 먹은 반면, 조선인은 단무지하고 된장국이 전부였다.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다.

 

“한번은 식당에서 나오는데 일본인이 먹다 버린 쌀밥이 ‘바께스(양동이)’에 있는 거예요. 그 걸 보고 나오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주워 먹을 생각이었는데, 일본 여성이 ‘기타나이 조센징(더러운 조선인)’이라며 내 손을 발로 뭉개는 바람에 그냥 나왔어요. 몰래 숨어서 그 여자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몰래 버려진 쌀밥을 수건에 싸서 구석에 가서 먹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맛있었던 밥은 없었던 것 같아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고국이건만...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였다.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 지진이 나고야 일대를 강타했다. 전라도애서 함께 갔던 6명의 소녀들이 건물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양 할머니도 건물더미에 깔렸고, 옆에 있던 동료 두 명이 죽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때 입은 상처는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한 푼의 월급도 못 받았지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그때는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양 할머니에겐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봉건적 관습이 심했던 시절,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로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당해 오가던 혼담이 깨졌다.

 

혼담이 깨지기를 세 차례, 양 할머니는 스물한 살 때 건축일을 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근로정신대에 다녀온 사실을 숨기고자 급하게 치른 결혼식이었다. 아들 둘을 낳고 살던 어느 날, 술에 취한 남편이 다짜고짜 물었다. “일본에서 몇 명이나 상대했느냐”는 것이었다.

 

뒤늦게 일본에 다녀온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군 위안부’ 취급을 한 것이었다. 남편은 그 뒤로 밖으로만 나돌았다.

 

“6~7년 집에 안 들어오더니 마흔이 넘어서 어디서 머슴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왔어요. 병 걸려 일도 못하게 되자 같이 살던 여자가 도망간 거였어요. 광주 산수오거리에 방 얻어 살다가 막내딸 낳고 두 살 때나 되서 곧 남편도 죽고 말았지요.”

 

남편은 그렇게 여섯 자식을 떠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여섯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다.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봇짐장수를 했다. 명절 때면 애들을 먹이려고 시골로 친척집으로 밥 얻으러, 떡 얻으러 다녀야 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임금소식

 

참으로 힘든 세월, 이제나저제나 일본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돌아가 있으면 월급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해방된 지 5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용기를 냈다. 양 할머니는 지난 1999년 일본 정부와 나고야 미쓰비시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회의 냉담한 시선과 무관심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은 10년이 넘도록 이어졌지만, 철저히 ‘할머니들만의 재판’이었다. 정치권은 물론 자치단체, 언론, 시민단체 어느 누구도 할머니들의 법정 투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위안부’ 취급하는 사회의 냉담한 시선 탓에 일본에 재판 갈 때는 ‘며칠 서울 이모네 간다’ ‘계모임에서 강원도 놀러간다’고 속여야 했다.

 

“서운한 것은 정부예요. 나라가 힘없어 강제로 갔다 왔는데, 노인들이 일본과 재판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관심도 안 둬요. 지금까지 어떻게 사느냐고 따뜻한 말 한마디도 없고….”

 

할머니가 바라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다. 무작정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내가 일했던 것, 우리한테 안 줬던 임금 돌려달라는 것뿐인데…. 일당을 떼어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집에 가 기다리라고 해서 64년을 기다렸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우리 살아 있을 때 한이라도 풀어달라는 것이에요. 징한 세월 보냈는데, 위안부 누명이라도 벗으면 살겠어요.” 할머니의 눈에는 어느덧 참았던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어 힘이 난다. 10년의 기나긴 세월, 함께 해준 나고야의 양심적 시민들이고, 함께하려 나서준 광주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다.

 

정부의 무관심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에서는 우리들이 어떻게 사느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면서 “나이 팔십이 넘도록 내 인생에 웃음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제대로 된 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있을 때 이들의 인력수탈에 앞장섰던 기업들은 어떻게 됐을까. 당시 일본 군함도에서 탄광을 운영했던 회사는 미쓰비시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중 군수산업으로 급팽창했고 전쟁 후에도 지금까지 세계적인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99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이후 10년간의 법정투쟁을 벌여왔던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결국 패소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이유에서였다.

 

10년 법정투쟁에 돌아온 것은 ‘99엔’

 

할머니들의 10년에 걸친 외로운 법정투쟁은 2008년 11월 11일 도쿄 최고재판소가 기각 판결을 내림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판결 후 서울 등 미쓰비시 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금요시위가 촉발되었다.

 

이 금요시위 출발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부터 였다. 일본 나고야 시민 약 1,000명은 지원단을 꾸려 지난 2007년 7월부터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소송은 물론 미쓰비시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시위를  진행해오고 있다.

 

일본 안팎에서 이 문제가 커지자 2009년 말 일본정부가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명목으로 ‘99엔’을 지급키로 했다. 99엔은 우리 돈으로 1,250원 정도. 자장면 반 그릇 값도 안 되는 돈이다.

 

일본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투쟁을 도와 온 ‘근로정신대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일본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10만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대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 일본정부와 전범기업 사죄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추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경술국치 100년이라는 역사적 시점 때문이었을까. 시민모임은 17일 “10만 명 서명운동에 지난 16일 현재 13만 347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서명용지만 A4 용지 2만 6천여 장에 달한다. 이 서명운동엔 서울과 제주도, 영남과 충청 등 16개 광역시도 전역에서 국민들이 참여했다.

 

시민모임은 한국 정부에 대해서 "국익이 최고라며 삼성 이건희 회장을 사면하던 이명박 대통령은 '99엔'의 치욕을 보고도 손을 놓고 있다"면서 "최소 4조 원대로 추정되는 징용 피해자들의 미불임금이 해방 65년 동안 일본에 잠자고 있어도 방치하고 있다"고 적극적 대응을 촉구했다.

 

지난 65년 동안 제대로 한번 웃지도 못하고 살아왔다는 양금덕 할머니. 양 할머니는 살아생전에 웃을 수 있을까.

 

양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외쳤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우리 이야기 알려주는 것만도 고마울 뿐이지요.”

 

일제에 의해 청춘을 빼앗긴 할머니의 바람, 그것은 철모르던 소녀시절 일본인 선생에게 속아 빼앗겼던 노동과 굴욕의 대가를 당당하게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일에 우리사회와 정부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는 간절함을 전하며 증언을 마쳤다.

 

일제에 의해 청춘을 빼앗긴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바람, 그것은 철모르던 소녀시절 일본인 선생에게 속아 빼앗겼던 노동과 굴욕의 대가를 당당하게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우리사회와 정부가 관심을 갖고 그들의 꿈을 완성시캬주어야 할 때다.

 

 

[뉴시스] ‘전범기업’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 협상 나서기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을 강제징용해 군용품 생산에 투입한 '미쓰비시중공업'이 근로정신대 피해 보상을 위한 협상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일본 내 대표적인 '전범기업'으로 구분되는 미쓰비시 그룹의 핵심 계열사가 전후 최초로 강제징용 피해 문제해결에 나섬에 따라 다른 전범기업은 물론, 일본 정부에게도 상당한 부담을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http://cafe.daum.net/1945-815)'은 15일 오전 서구 치평동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쓰비시중공업이 "근로정신대 문제와 관련 협상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전해왔다고 밝혔다.


미쓰비시 측은 전날 오후 본사 총무부장 명의의 공문을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돕는 일본인들로 구성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지원회)'에 보내고 이같은 의사를 전달했다.


시민모임은 회견에서 "'만시지탄(晩時之歎·때가 늦었음을 한탄)'이지만 미쓰비시 측의 결단을 적극 환영한다"며 "이같은 결정은 역사의 순리이자 일제강점기 10만여 명을 강제징용한 '1등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최소한의 도리다"고 말했다.


이어 "협상 수용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12년에 걸쳐 법적투쟁을 펼친 할머니들과 자국의 과오를 묵과하지 않고 24년 동안 싸워온 나고야 소송지원회의 피나는 노력에 굴복한 것이다"며 "과거사 문제 해결을 염원하는 범국민적 저항이 해방 65년 동안 잠자고 있던 전범기업의 양심을 깨운 쾌거다"고 평가했다.


또 "지난해 10월부터 광주에서 진행한 200여 일간의 1인 시위와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에 분노해 들불처럼 일어선 13만4162명에 달하는 서명인단의 응집된 힘도 큰 도움이 됐다"며 "미쓰비시의 전향적 태도는 일제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첫걸음인 만큼, 향후 미쓰비시의 협상과 대일 과거사 문제 해결의 끈을 끝까지 놓치 않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시민모임은 과거사 해결에 뒷짐을 지고 있는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도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이들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일본 정부는 지난 65년간 피해자들의 고통을 회피하고 있다"며 "일본이 '한일협정'을 구실로 역사의 장막에 숨을 것이 아니라 '전후보상 입법'을 통해 역사 앞에 당당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 정부에는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 지급이라는 국가적 치욕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정부의 인식과 태도에 심히 유감을 표명한다"며 "일본은행에서 잠을 자고 있는 4조원대의 징용 피해자 공탁금(미불임금) 환수를 위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번 협상 수용은 그동안 강제징용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미쓰비시 측이 근로정신대 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피해 배상을 검토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어 향후 협상과정에 국민적 관심이 모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모임은 7월중 나고야 소송지원회원들이 방한하면 협의체 구성에 대한 논의를 거친 뒤 8월15일 내 진전된 협상안을 마련할 것을 미쓰비시 측에 촉구할 방침이다.


한편, 시민모임은 지난 6월 23일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를 방문해 한국민 13만4162명과 국회의원 100명의 이름이 담긴 항의서명부를 전달하고 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