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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

아무리 못 다한 말이 있다한들

by 호호^.^아줌마 2011. 3. 22.

 

아무리 못 다한 말이 있다한들

 

얼마전 새학기 개학을 앞둔 광주지역 한 초등학교에 불이나 입학식이 미뤄진 일이 있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이 학교에 기간제 교사를 신청했다가 탈락한 교사지망생이었다. 어찌 저런 무모한 짓을 할 수가 있느냐며 혀를 찼는데 이같은 일이 과거에도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정조 8년(1784) 9월 우부승지 김재찬은 정조에게 병조에서 올라온 것이라면서 방화미수 사건 한 건을 보고한다. 공천(孔賤)이라는 사람이 봉두산 봉화에 불을 지르려다 잡힌 사건이다.

 

공천은 열세 살 때 중이 되었으며, 동래 국청사(國淸寺)로 지내던 중에 민폐와 승폐(僧弊)에 대해서 조정에 알리려고 상경했는데 중은 도성에 들어올 수 없는 엄한 법에 발이 묶여 넉 달 동안이나 머리털이 자라기를 기다렸다.

 

겨우 상투를 틀 정도가 되자 성 안으로 들어와 배오개의 여객(旅客)에서 머무르며 11조의 폐막(弊瘼)을 썼다. 봉화군에게 잡힌 그날 불을 질러 주의를 끈 다음 그 종이쪽의 내용을 조정에 알리려고 할 참이었다.

 

공천은 불을 지르지는 못했지만 체포되어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 11개 항목에 이르는 사회의 폐단을 지적했다. 각 고을의 환곡의 질이 극히 열악한 것, 한정(閑丁)이 모두 포대기에 쌓인 아이로 충원되는 것, 각 고을의 시장에서 음주를 금하는 일, 각 곳의 여점(旅店)에서 빚은 놓고 이자를 지나치게 많이 받는 일 등등.

 

공천은 당연히 처벌을 받았다. 김재찬은 공천이 불을 지른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봉화대 근처에서 숨어 있다가 불을 지르려는 계획은 너무나도 못된 짓거리라면서 정조에게 엄하게 처벌할 것을 청했고, 정조는 엄하게 형을 가한 뒤 귀양을 보내라 명했다.

 

공천의 11조의 폐막 중 환곡과 환자, 그리고 여점과 부자의 돈놀이는 거대한 사회문제였다. 고원제의 경우, 아전과 관의 백성 착취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결코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말은 조정의 관료와 왕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무지렁이 백성들이 꺼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천의 사건을 처리하면서 김재찬은 이렇게 말한다. “근래 법과 기강이 엄하지 않아 습속이 갈수록 악해져서 번번이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불을 지르는 죄를 애써 범하는 자가 없는 해가 없다.” 백성이 자신의 생각을 조정에 전하기 위해 방화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예사로 쓴다는 것이다.

 

공천이 불을 놓으려 했던 것은 오늘날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묻지마 방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다만 오늘날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 불을 내서라도 소통을 하고 싶은 그런 사람들은 없는 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날은 신문과 방송도 있고, 인터넷에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공간도 얼마든지 열려있는데 소통이 불통이 돼서 불(火)통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