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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

우는 자들로 함께 울자

by 호호^.^아줌마 2011. 3. 28.

                                                                                                                         ♡ 아래 그림은 문순 作 '선한 예수'

 

  우는 자들로 함께 울자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성경 로마서 12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으로 만난 한 친구가, 일본에 대한 깊은 증오로 연일 천벌(天罰)을 외치는 어떤 이에게 이 말을 보냈더니 “너나 구슬피 울라”는 답이 왔다며 가슴을 친다. 그런데 남의 얘기가 아니다.


보름쯤 전 신문과 뉴스, 인터넷 화면에 일본 지진 소식이 전해졌을 때 “원래 지진 많던 나라 아녔어?” 하며 무심히 넘겼다.  천장이 내려않고 무시무시한 돌덩이가 쏟아져 내리고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밀어닥치는 모습을 보고서야 “어? 저거 심각한데?” 하면서도 “내진 설계가 잘 된 나라라 저만하길 다행이네”하고 또 대수롭잖게 넘겼다.


그런데 사안의 심각성을 일깨워 준 것은 너무도 하찮은 경험에서 나왔다. 산 지 일 년도 안 된 차를 신호위반 차량에 들이받혀 공업사에 넣었다 찾은 지 일주일 내내 입맛이 소태 같았다. 핸들도 무겁디무겁고, 엔진소리도 예전 같지가 않은데도 공업사에서는 정상이라고만 우긴다. 문짝만 유리와 범퍼를 똑같은 부품으로 갈아주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중고보다 못한 고물차가 돼버리고 만 것 아닌가 하는 불만이 내내 가슴속에서 부글거렸다.


그런데 방송에서 멀쩡한 차들이 쓰나미에 둥둥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저 차, 저 아까운 차... 과연 저 상황에서 저 차가 아깝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그래. 사고를 당했으니 손해가 크다고 하자. 그래도 몸 무사하고 함께 타고 있던 아이들이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그제야 나의 쫀쫀함에 눈을 뜨면서 일본에서 사업한다던 선배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대학 동기들의 인터넷 카페에서는 연일 그 선배의 안부가 꼬리를 물었고, 다행히 출산을 앞둔 부인과 아이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며 안도할 수 있었다.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 공식적으로는 재난의 아픔을 동정하면서도 결코 가슴 아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진심으로 애통하며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있었다.


의원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모금함을 들고 시장을 돌 때도, 교회에서 구제헌금 봉투를 돌릴 때도, 전화 한 통에 성금을 낼 수 있는 ARS 모금에도 진심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어쩌면 당연한 얘기 같지만 실상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다.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나고, 슬픈 일을 당해 우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고소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죽했으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을까.


하지만 ‘너희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세리라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5장 46절)’ 하는 말에서 답을 찾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도 마찬가지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높은 차원의 이야기라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사람들은 스타일이 다르거나, 성격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르거나, 대화하는 방법이 다르면 불편해하고 답답해한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고 더 나아가 즐거워하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늘 부럽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일본의 대참사에 아픔과 위로를 전한다. 나주에 함께 하고 있는 일본인 가족들에게도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