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문화, 확실한 콘텐츠를 잡아라④
◇ 고풍스런 풍경으로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나주향교 골목
골목길 접어들 때 가슴 뛰는 스토리텔링도 ‘문화’
낡고 비좁은 골목길, 무너뜨리기 보다는 추억과 애환의 사진관으로
스토리텔링으로 되살아난 대구 골목길 프로젝트 도심 활기 되찾아
역사문화도시 나주, 나주에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일까.
나주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자원이다. 하지만 없는 것 역시 문화다. 가장 나주적이고, 나주를 자랑할 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발끈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세계를 향해 나주의 ‘이곳’, 나주의 ‘이것’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나주문화, 이제는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 이미 콘텐츠는 충분하다. 무엇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관건이다.
도시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 하나는 시민들이 안전하고 편리하며 쾌적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도시 어메니티(amenity)를 갖추는 일, 또 하나는 그 도시만의 독특한 매력과 특성을 제대로 살려 도시 정체성을 살리는 일이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이 ‘뉴타운’으로 일컬어지는 도시재개발 방식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도심의 오랜 자산들을 보존하고, 생활공동체를 유지함으로써 지역특유의 문화를 도시경쟁력으로 삼자는 것이 화두가 되고 있다.
이 가운데 다시 살아나고 있는 곳이 바로 골목길이다. 골목길 사람들의 애환, 골목길 정서, 골목길 문화... 골목길 재생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대구 중구를 다시 찾아가 본다. / 편집자 주
나주가 되살려야할 어메니티는
어메니티(amenity)란 인간이 생태적·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지닌 환경과 접하면서 느끼는 매력·쾌적함·즐거움이나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를 말한다. 농촌의 경우 맑은 강이나 산 등 자연환경, 특산품·토속음식, 지방 고유의 축제나 문화, 야생 동식물 등이 어메니티 자원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함평군이 전통 꽃단지와 나비축제를 통해 관광객 유치에 성공한 것, 강원도 평창군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면 일대에 메밀밭을 조성한 것 등이 농촌 어메니티 자원을 활용한 모범사례로 꼽힌다.
그렇다면 나주의 어메니티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80대 할아버지도, 20~30대 청년들도, 10대 청소년들도 함께 공감하면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나주의 다양한 삶의 터전에서 우선 찾아보자.
가령, 나해철 시인의 시 ‘영산포1, 2’에 등장하는 영산포의 풍경과 송춘희가 부르는 ‘영산강 처녀’에도 추억은 남아있다. 금성관과 나주향교를 중심으로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나 있는 비좁은 골목길에도 나주의 향수가 어려 있고, 지금은 없어져버린, 금성산에서 나주향교와 사매기, 금성관을 거쳐 성북5일시장 미나리꽝으로 흐르던 옛 나주천을 떠올리며 나주를 추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의 터전이 바로 골목길이다.
골목길 자산 가치 찾아가는 대구시
“대구의 도심골목은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자산 가치가 대단하다고 여겼다. 지금 당장 편하자고 골목을 헐고 길을 넓힌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도시가 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 위해 2년여에 걸쳐 기획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난 18일 한국언론진흥재단 대전교육센터에서 열린 ‘도시재생사업과 지역활성화를 위한 언론인 교육’에서 김재경<오른쪽 사진>인문사회연구소 이사가 밝힌 내용이다.
김재경 이사는 대구에 있는 매일신문 특집팀장 출신으로, 대구읍성 복원과 골목길 재생을 위해 직접 ‘골목대장’이 되어 현장을 누볐다.
바닥을 친 건축경기가 되살아날 줄 모르고, 대규모 복합개발의 가능성도 몇 년 내로는 기대하기 힘든 대구 도심이라면 현재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대구 골목은 어떻게 해야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우선 1천개가 넘는 도심 골목들을 정비하는 일이 시급했다. 편하고 안전하게 걸어서 다닐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대구시와 중구청은 지금까지 약전골목이나 야시골목 같은 특화된 거리에 예산을 집중시키는 방식을 택해왔지만, 도무지 성과가 보이지 않는 투자는 차라리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늦었지만 늦은대로 근대골목과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같이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았다면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몇몇 골목들이 제각기 발전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연결이 끊겨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전체적인 골목정비계획을 세우되 도심을 순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
도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도심에 30분~1시간 거리의 골목길 도보 코스가 반드시 필요했다. 도심 각각의 골목에 다양한 테마를 주고 이를 연결시키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함께 살아난다는 사실을 김 이사는 유럽 여러 나라의 사례를 들어 입증하기도 했다.
◇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배경이 된 대구의 약전골목
골목길 스토리를 살리자
나주도 그렇지만 대구의 골목은 대부분 낮다. 낮은 담으로 구획돼 있지만 고개를 돌리면 집안이 다 보인다. 정감이 있는 것이다. 골목은 좁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에 딱 맞은 정도가 대부분이다. 앞에 오는 사람을 살펴야 하고, 아는 체를 해야 부딪치지 않고 지날 수 있다. 골목은 생활터전이다. 마당이 비좁은 아이들은 골목에서 뛰어논다. 아낙네들은 골목에 모여 수다를 떤다.
대구 도심의 대표적인 골목인 진골목을 들여다보자. 진골목은 긴 골목이라는 경상도 말이다. 과거 종로는 영남제일관에서 감영으로 가는 관리들이 지나는 길이었다. 서울의 피맛길처럼 평민들이 만든 돌아가는 길이 바로 진골목, 감영으로 이어지는 좁고 긴 골목이었다.
한국 근대사에 처음 등장한 진골목의 이미지는 부자동네다. 고려시대부터 달성을 중심으로 중구 일대 토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달성 서씨 가운데 서병국, 서병직, 서병기, 서병원, 서병오, 서병규 등이 수백 평씩의 저택을 갖고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뒤이어 코오롱 창업자인 이원만 회장, 로얄호텔 사장 등 대구의 유력인사들이 거처를 삼기도 했지만 해방 후 면모를 잃고 만다.
서 씨들이 하나 둘 떠난 진골목은 저택들이 쪼개져 팔리며 혼란을 겪다 종로의 영향을 받아 요정과 술집 골목으로 바뀌게 된다. 종로는 경상감영에서 일하던 관기들이 일제에 의해 권번의 기생으로 바뀌면서 주요 활동무대로 삼은 곳이다.
1970년대까지 요정이 흥성해 한때 종로 일대에 30여개의 요정에서 500여명의 기생이 일했다고 한다. 유려한 건축미와 잘 꾸민 마당을 갖춘 진골목 한옥들도 하나둘 요정으로 바뀌어 1970년대 중반에는 9개나 됐다. 1975년 매일신문 기사는 ‘양반의 큰 기침소리만 울리던 골목은 접대부들의 교성으로 시끄러워졌고, 밴드소리가 밤을 새워 주민들이 수차례 대구시에 진정했다’고 전한다.
이후 여관들이 여럿 들어서며 윤락가로까지 전락한 진골목은 쇠퇴일로에 접어들다가 1980년대 이후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한옥이 풍기는 정취에 입맛을 당기는 요리, 적절한 가격이 어울린 식당이 하나 둘 들어서며 노년층과 샐러리맨들이 교차하는 지금의 얼굴로 바뀌어왔다. 그야말로 도심 변천과 도시 변화의 일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현장인 셈이다.
이런 골목길에 스토리가 없을 리 없다. 요즘 도시마다 스토리텔링을 통한 지역 알리기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전주시의 경우 한옥마을 이야기 등 다양한 스토리 구성과 발굴, 전달 시스템을 만들어 이야기가 있는 관광홍보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우리 생활이 그만큼 스토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갈 때도 우리는 그 식당의 주인과 음식에 얽힌 사연, 에피소드 등을 떠올린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현재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넓은 범주에서는 스토리다.
대구는 1601년 경상감영이 들어선 이래 400년 가까이 영남의 중심으로 역할을 해 왔다. 단순한 행정 중심지가 아니라 교통과 산업, 문화의 중심이었다. 최근 도심이 쇠락했다고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는 온전히 살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심 재개발이 더뎠던 게 대구의 스토리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된 것이다. 특히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이후 인위적인 훼손이 거의 없는 도심의 1천여개 골목길은 스토리의 보고다.
스토리의 보고인 대구 도심 골목들은 대구 브랜드의 밑바탕이 된다. 거기에 담긴 이야기들로도 얼마든지 세계인의 보편적 정서를 울릴 수 있다. 골목의 작은 집, 돌 하나도 스토리를 담는 순간 콘텐츠가 된다. 골목에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거기에 깃든 사람들이 만들어온 삶의 흔적들이 녹아 있다.
◇ 길바닥에 새겨진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를 따라 걷다보면 대구 문학골목이 나온다.
주민들의 이야기 듣기
골목의 주인은 주민이다. 골목 재생의 핵심은 골목 안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렸다. 전문가집단이나 관(官) 주도로 진행되는 각종 사업들이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면에는 주민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데 있다.
종로 주민들이 중구청 공무원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눈 ‘종로골목 발전방안’을 자세히 들어보면 길이 보인다. 주민들은 우선 종로의 가능성을 모두 인정했다. 예전 대구 도심의 축이면서 중국 화교의 정착지이자 요정골목으로 크게 번화했다가 쇠퇴 일로에 접어든 종로.
하지만 최근 2년 사이 다기, 천연염색, 골동품, 고가구 상점들이 줄줄이 들어서면서 ‘대구의 인사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키워가고 있다. 여기에 현대백화점 공사로 밀려난 떡전골목의 떡가게들이 하나 둘 이전하면서 대구의 역사와 전통이 버무려진 거리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종로골목 상가의 간판을 어떻게 바꾸고, 거리나 도로를 어떤 디자인으로 포장하고, 공공시설물을 어떻게 설치할지는 가장 나중에 검토할 일입니다. 외관이 아름답고 독특한 거리 조성도 좋지만 공연히 월세, 전셋값만 뛰어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겉모양만 번듯하게 만드는 골목사업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결론이 분명해 보이는 이야기다. 행정기관이 의욕만 부린다고 해서 현실이 개선되는 건 아니다. 주민들은 스스로 골목 재생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앉아서 쉬는 공간, 만남의 기회 등을 만들어 달라고 행정기관에 요구했다. 주민들은 행정지원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이 결집하는 게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축제의 필요성과 시기, 다른 업종의 유입 방지를 위한 제도의 필요성, 종로골목 관광·마케팅·공예·한약 알리미를 만드는 등의 이야기도 꺼냈다.
중구청은 약령골목 일대 상가에 기와지붕을 올리고, 내부가 보이는 유리셔터를 만들고, 청사초롱을 달아 새롭게 디자인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지가 없으면 성공은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골목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 골목의 독특한 배경과 역사를 찾고 아이디어를 내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수시로 주민들을 모으고 구심점이 되는 실행기구나 조직을 짜야 한다.
김재경 이사는 말한다. “길었던 골목길의 허리가 잘리며 물리적으로는 짧아졌지만 골목 곳곳의 가옥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긴 골목을 유지하고 있다”며 “진골목만 해도 여타 도시에서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매력들을 가득 담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있는 관광지로 발전시킬 여지가 크다”고.
◇ 대구의 새로운 명물로 부활한 골목길
대구도심과는 다른 향토색 짙은 나주 골목길
나주로 돌아와 주변 골목길을 걸어보았다. 어디선가 찾아온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나주목사내아 골목길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셔터를 눌러댄다. 벼락을 맞고도 5백년을 버틴 팽나무에 단풍이 들어 기와지붕 담장과 함께 골목길을 수놓고 있었다.
4백년 묵은 허리 굽은 해송이 수문장을 하고 있는 이로당(頤老堂)을 지나 서내동 향교길로 들어서니 흙돌담과 시멘트 돌담이 마주하고 있는 골목길이 나온다. 돌틈 사이로 늦은 가을까지 풋풋하게 버티고 남아있는 풀들이 눈길을 끈다.
훨씬 옛스런 정취를 풍기고 있는 향교 주변 골목길은 단풍든 담쟁이와 노란 은행잎이 담장가득 가을을 그려놓았다.
아직까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나주읍성의 골목길은 더러는 시멘트 블록담장으로 바뀌고, 더러는 철제 담장으로 바뀌면서도 그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나마 살려내서 나주의 도시 어메니티로 삼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흙돌담장이 정겨운 서내동 골목길
◇ 나해철 시인의 시 ‘영산포1, 2’의 정취가 배어있는 죽전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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