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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상식

신숙주, 충절과 변절의 차이(이이화 강연)

by 호호^.^아줌마 2012. 9. 24.

* 이 글은 나주사랑시민회와 나주시민역사교실이 공동 주최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초청강연 강연내용이며, 사진은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의 사진을 스크랩해왔습니다.

 

신숙주, 충절과 변절의 차이…민족문화의 공헌자

 

 

신숙주(申叔舟, 1417~75)는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리하여 사육신의 충절이 빛을 더하면 더할수록 그는 반비례해서 변절자나·겁쟁이 또는 시세를 추종한 자로 붓방아를 받아야 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어린 임금 단종을 저버리고 씩씩한 기상으로 뻗어가는 수양대군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동료인 성삼문(成三問) 등이 절의를 지키고 죽은 것과는 달리 새 임금에게 빌붙어서 영화를 누렸다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절의’를 목숨보다도 중시한다. 이것은 ‘충’과 같은 개념의 것으로, 아무리 부당한 임금이나 상전이라도 끝까지 받들어야지 찬탈한 새 임금이나 상전을 받들어서는 인간의 도리,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다.

 

절의는 숭상할 만한 것이요, 변절은 매도되어야 할 경우가 많지만 이것이 민족 또는 민중적 차원으로 확대 적용될 적에는 새로운 해석이 가해져야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신숙주의 경우를 다시 비추어본다.

 

세종은 일대 문화진흥의 꿈을 안고 집현전을 설치하고 인재들을 모아들였다. 이렇게 모인 10명 또는 20명의 학사들에게는 온갖 편의를 주어 학문에 열중하게 하였다. 집현전의 경비를 넉넉하게 함은 물론, 때로는 절이나 집에 돌아가서 공부하게 하고 그 경비를 모두 국가에서 대게 하였다. 이를 사가독서(賜讀暇書)라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기에 뽑히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다.

 

신숙주도 물론 여기에 뽑혔고 8학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타고난 학자요 문사였다. 집에 있는 책을 모두 독파한 그는 궁중에 있는 장서각(藏書閣)의 책을 모조리 읽을 결심을 했는데 스물네 살에 집현전에 뽑혔다. 많은 책을 읽을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입직(入直:숙직)할 적마다 장서각에 파묻혀 지냈고, 숙직을 번갈아하게 되어 있는데도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 그는 숙직하는 동안 많은 책을 갖다 놓고 읽어댔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세종은 내시를 시켜 집현전에 숙직하는 학자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이때 입직하고 있던 신숙주는 밤이 깊었는데도 촛불을 켜놓고 독서에 열중했다. 내시는 서너 차례나 가서 엿보았는데, 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든 모습을 보았다. 내시가 이일을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은 입고 있던 돈피 갖옷을 벗어 신숙주에게 덮어주라고 하였다. 곤히 잠들었던 신숙주는 아침에 일어나서야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학자들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열심히 학문에 열중했다고 한다. 세종 또한 밤늦도록 학문에 열중했는데, 그야말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쟁하듯 촛불을 켜놓고 밤을 샜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독서법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세조는 한명회·신숙주와 함께 궁중에서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세조는 신숙주에게 자기 팔을 잡으라고 하였는데, 신숙주는 몹시 취하여 임금의 소매 속에 손을 넣고 팔을 잡아당긴 탓으로 임금이 “아파, 아파”하고 비명을 질렀다.

 

연회가 파하고 신숙주가 집으로 돌아가자, 한명회는 청지기에게 “범옹(泛翁:신숙주의 자[字])은 아무리 술이 취해도 조금 깨면 일어나 등불을 켜고 글을 읽고 나서야 자는데, 네가 가서 오늘밤은 글 읽지 말고 자라고 내가 특별히 당부하더라고 전하라”하였다. 청지기가 가서 보니 과연 신숙주는 글을 읽고 있었다. 청지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신숙주는 잠자리에 들었다.

 

세조는 이때 내시를 신숙주의 집에 보내 글을 읽고 있는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내시는 돌아와 “그가 자더라”고 전했다. 한명회는 임금이 신숙주의 동정을 살필 줄 알고 먼저 선수를 쳐서 곯리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열성이었으니 호학(好學)의 군주 세종의 눈에 들 수밖에 없었다.

 

훈민정음 창제에 절대적 공헌

 

신숙주는 3년 동안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바쳤다.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그리고 성삼문 등과 함께 밤잠을 자지 않고 이 일에 매달렸다. 임금은 신숙주와 성삼문을 요동에 귀양와 있는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黃瓚)에게 보내 중국의 음운을 연구하게 했는데 이때 이들은 때도 없이 요동길을 드나들었다.

 

마침내 1445년(세종 25)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 그러자 구태의연한 의식에 젖은 유학자들이 들고일어나 “몽골·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서번(西蕃)과 같이 중국 문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가 되는 것이다”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세종은 이들의 어리석음을 타이르고 신숙주를 중심으로 한글을 활용하게 했다. 그리하여 신숙주는 ?운회?(韻會)를 번역하고 이어 「용비어천가」 등 훈민정음을 사용한 글이나 번역을 돕기도 하고 맡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주목할 것은 신숙주가 뛰어난 언어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종래 설총이 사용했던 이두(吏讀)는 물론, 중국어·일본어 그리고 몽골어·여진어에 능통했고, 인도어와 아라비아 문자까지도 터득하고 있었다. 실로 그의 언어학의 지식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훈민정음의 창제는 지지부진했으리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공이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 등의 말에 능통해서 때로 통역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뜻을 통했다. 뒤에 공이 손수 모든 나라의 말을 번역하였는데 통역들이 이에 힘입어서 스승에게 일부러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세조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

 

그는 한글 창제를 위해 언어학의 지식을 동원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외교를 위해서 여러 나라 말본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학식으로 이룬 외교의 업적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 세종은 신숙주를 일본으로 보냈다. 세종이 이종무를 시켜 쓰시마를 정벌한 뒤 일본과의 왕래가 끊어졌는데 그때 일본은 구체적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내달라고 간청해왔던 것이다. 세종이 신숙주를 서장관(書狀官:문서 또는 실무를 관장하는 사신의 한 자리)으로 뽑아 보낸 뜻은 특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은 우리의 문화를 늘 숭상했다. 그리하여 신숙주를 통하여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일본에 과시하려 한 것이다.

 

신숙주가 일본에 도착하자 가는 곳마다 일본의 문사와 승려들이 밀려왔다. 그들은 신숙주에게 시를 지어달라거나 글씨를 써달라기도 하고 학문을 물어오기도 하였다. 신숙주는 서슴없이 이에 응답했고 부탁을 들어주었다. 일본의 승려와 문사들은 이 청년문사의 재주에 흠뻑 빠졌다. 그 뿐만 아니라 신숙주를 스승으로 받들기도 하였다.

 

이때 신숙주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의 동정을 살폈다. 신숙주는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했고, 그들의 제도·풍속, 그리고 대신들의 족계(族系)와 각지의 영주들의 강약을 기록했다.

 

공식적인 사행(使行)의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그는 이런 모든 내용을 적어 도면과 함께 나라에 바쳤다. 이것이 유명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이다. 이것은 최초로 일본의 사정을 적은 책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 일본 사정을 알려거나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일본안내서가 되었던 것이다.

 

세종은 또 중국의 문장가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오자, 신숙주와 성삼문을 보내 글을 겨루게 했다. 예겸은 신숙주 앞에서 오금을 펴지 못하고 돌아가 신숙주를 중국의 굴원(屈原)으로 비겨 칭찬해 마지않았다. 세종은 이런 신하를 두고 무척 자랑스럽게 써먹었던 것이다. 그 뒤 세종은 그를 집현전 학사의 우두머리인 직제학으로 삼았는데 불과 서른세 살의 나이였다. 세종은 늘 “신숙주는 큰 일을 맡길 만한 자이다”고 말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숙주에게 채 큰일을 맡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세종이 죽은 후 몰려오는 시련

 

이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새 왕 문종(文宗)은 너무 어질기만 했을 뿐 병에 늘 시달렸고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속에 신숙주는 또 중국에 가게 되었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중국에 갈 적에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뽑힌 것이다.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몇 달 동안 먼 이국 땅을 함께 넘나들며 그야말로 의기가 투합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는데 한 사람은 기개가 넘치는 왕자였고 한 사람은 차분한 학자였다.

 

신숙주는 이때 분명히 보았다. 수양대군의 커다란 포부와 꺼질 줄 모르는 정열, 그리고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왕재(王材) 같은 것을. 이리하여 두 사람은 뜻이 맞았다. 참으로 이 만남은 한편으로는 두 청년의 꿈이 실현되는 계기였고, 한편으로는 찬탈·변절로 역사의 비난을 받게 되는 갈림길이었던 것이다.

 

이 길에서 돌아와 신숙주는 죽음을 앞둔 문종으로부터 어린 왕자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종은 수양대군의 기개를 알고 신숙주·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 출신들에게 어린 왕을 부탁한 것이다.

 

수양대군은 이때 할아버지 태종의 행동을 익히 알고 있었다. 태종은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이어 맏아들이 아닌 셋째 왕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만약 세종이 태종처럼 둘째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일은 아주 순조롭게 되었을 것이요, 또 문종이 큰할아버지 정종처럼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도 일은 수월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덜컥 죽었다. 어린 단종은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 왕을 받들고 종사(宗社)를 지킨 경우는 역사에서 흔하게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당시 왕자들 중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명망이 있었다. 특히 안평대군은 글씨와 그림에 능한 문사였으므로 당시의 재상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이 따랐다. 이에 맞서 수양대군은 권남 한명회 등을 끌어들였으나 이들은 별 영향력도 없는 인사였다.

 

한명회는 문사들보다 무사를 사귀라고 수양대군에게 권했고,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꾀를 받아들여 ‘활쏘기’란 명목으로 무사들을 모아 매일 모화관 황학정 등에서 무사들과 어울려 활쏘기와 술잔치를 벌이며 사귀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사일을 정해,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받들고 역모를 꾀한다는 핑계를 대어 김종서·황보인을 죽였고, 이어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이때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을 적은 ‘생살부’(生殺簿)를 쥔 자는 한명회였다.

 

이 사건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부르는데, 이때 수양대군은 실권을 쥐고 영의정이 되었다. 온 조정은 수양대군의 세력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이때 신숙주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수양대군과의 친분 탓인지,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신숙주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어 공신의 호칭이 내려질 적에도 얌전히 따랐다. 이와 달리 성삼문은 집현전을 잘 지켰다 하여 공신의 칭호를 주자 부끄럽다고 밥맛을 잃을 정도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공신들이 돌아가며 잔치를 베풀 적에도 성삼문만은 잔치를 베풀지 않았다.

 

현실에 대처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절친한 동지의 관계가 점차 서로 죽이고 살리는 적의 관계로 치닫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의 세력이 은 조정을 덮어 누르자, 열다섯 살의 어린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겁을 먹고 끝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건네주었다.

 

신숙주는 도승지로 있으면서 수양대군 즉위를 곱게 받아들였고, 새 왕은 그를 곧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하였다. 문사·학자로서 가장 영광된 자리를 얻은 것이다. 그러니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그를 복위모의에는 끼워주지도 않았다. 신숙주는 새 왕의 즉위를 중국에 알리는 주문사(奏聞使)의 소임을 띠고 북경에 가서 맡은 일을 완수했다. 이 공으로 그는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1456년(세조 2)에 들어 단종의 복위운동은 더욱 비밀스럽게 익어갔다. 그리하여 새 왕 세조의 백부인 양녕대군마저도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임금 앞에 와서 단종을 멀리 쫓아버리라고 청했다. 이에 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단종이 거처하는 곳을 엄히 단속하게만 하였다.

 

이 해 6월에 들어 중국의 사신이 왔을 적에 창덕궁에서 단종과 함께 잔치를 베풀기로 했다. 복위세력은 이 틈을 타 성승·유응부로 하여금 운정(雲劍)을 들고 칼춤을 추게 하면서 세조의 근신들을 모두 제거하기로 했다. 이때 각기 처치할 사람을 맡았는데, 성삼문은 “신숙주는 나의 평생 친구이지만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여 신숙주도 처치의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한명회가 이 잔치에 운검을 들이지 못하게 하여 그들 계획에 차질이 왔다. 이에 거사를 뒷날로 미루자, 진짜 변절자인 김질이 모든 계획을 임금에게 고해바쳤다. 이리하여 성삼문 등은 임금 앞에 끌려왔다.

 

성삼문은 신숙주가 임금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옛날 원손(元孫)을 잘 돌봐달라는 세종의 부탁을 잊었는가?”라고 꾸짖었다. 이에 세조는 신숙주에게 “뒤편으로 피하라”고 일렀다. 이리하여 사육신이 생겨났다. 이 날 신숙주가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부인이 두어 자 되는 베를 가지고 대들보 밑에 앉아 있었다.

 

“왜 그러고 앉아 있소?”

“영감께서 성 학사와 형제같이 지냈는데 오늘 성 학사의 옥사가 있어서 영감께서도 그들과 함께 죽었을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이 말에 신숙주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고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그를 미워하는 자들의 날조였다. 그의 부인은 이 사건이 있은 뒤 여러 해를 살다가 죽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숙주와 성삼문은 생사를 달리했고, 그 이름에 대한 평가 또한 상반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고 조작이었다.

 

결국 그는 두어 가지 일에 끼어들었다. “단종을 서울에 두지 말고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정승들이 연명으로 건의할 적에 그도 동참한 것이다. 또 노산군(단종을 강등시킨 칭호)을, 정승들과 함께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노산군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 비난이 정인지와 신숙주에게 쏟아졌다. 이런 그의 처신은 분명히 그 전과는 다른 것이었고, 또 정승의 반열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늘 세조 가까이에서 신임을 받다

 

어쨌든 노산군이 죽고 난 뒤에 세조는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그 밑에서 신숙주는 좌의정·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그는 세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 세조를 왕으로 추대할 적에 그 공으로 따지면 한명회·정인지 등이 으뜸일 것이다.

 

그런데도 세조는 이들을 제쳐두고 늘 신숙주를 ‘나의 위징(魏徵)’이라 했다. 이 말은 저 당나라 태종의 문화통치에 헌신적으로 노력한 ‘위징’을 뜻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도 당 태종처럼 문화통치를 이루면서 신숙주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었다.

 

이 말처럼 신숙주는 익혀온 학문을 세조의 문화사업에 바쳤다. 후세 왕의 귀감이 될 선대 왕의 말을 모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했고, 세종이 국가의 기본질서를 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교정·간행했으며,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을 새로이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발전·보급시키는 사업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 의해 불경 등 많은 고전이 번역되었고, 또 그 간행을 대부분 맡아보았다. 성삼문이 죽은 마당에 그도 죽였다면 이 일을 누가 해냈겠는가?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학자였다. 그가 비록 높은 벼슬을 누렸지만 정치적 수완을 별로 부리려 하지 않았고 다만 문화정책에 매달렸던 것이다. 이런 사업을 벌일 적에야말로 집현전 시절과 함께 그의 득의의 시기였다. 이런 신숙주를 세조는 늘 가까이 두고 다정한 친구처럼 지냈다. 활도 같이 쏘며 시를 주고받았고 술잔을 나누며 함께 장난을 쳤다.

 

함경도에 야인이 발호할 적에 세조는 신숙주를 보내 정벌하게 하였다. 그 까닭은 신숙주가 젊을 적에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그곳에 6진을 개척하고, 또 조정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았기에 내린 조처였다. 이것이 신숙주가 세조가 왕이 된 뒤 그 곁을 떠난 딱 한 번의 사례였다. 신숙주가 하직할 적에 궁궐 담장에 덩굴박이 초라하게 매달려 있었다. 세조는 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물 것 같소?”

“뻗어나지도 못하는데 철이 늦었으니 결실이 안 되겠습니다.”

얼마 지나자 하나가 여물었다. 세조는 박을 쪼개놓고 이렇게 시를 썼다.

 

경은 내 말을 비웃었지만

내 박은 여물었다오

쪼개 잔을 만들어

그지없는 정 보이겠소

 

그리고 신숙주에게 술을 내려 떠나는 길을 위로했고, 박잔의 모양대로 사기잔을 만들어 시를 새기고는 자신의 술잔을 삼았다. 이 술잔을 항상 곁에 두고 먼 길을 떠난 신숙주를 생각했다고 한다. 신숙주가 세조의 기대대로 야인들을 토벌하고 돌아오자, 세조는 그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늙어가는 나이에 이들의 정은 더욱 두터웠다. 세조는 틈이 나면 신숙주를 불러 농담을 일삼았다.

 

영의정 신숙주 아래 우의정으로 구치관을 새로 임명하였을 적에 세조는 두 정승을 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내가 오늘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는데 대답을 잘못하면 벌주를 내리겠소”하였다.

 

세조 : 신정승!

신숙주 : 예.

세조 : 내가 새로 된 정승인 신정승(新政丞)을 불렀는데 왜 신정승(申政丞)이 대답하오?

곧 벌주가 내렸다.

세조 : 구정승!

구치관 : 예.

세조 : 내가 묵은 정승인 구정승(舊政丞)을 불렀는데 왜 구정승(具政丞)이 대답하오?

 

또 벌주가 내렸다. 세조는 각기 대답에 따라 신(新)·구(舊)라 우기기도 하고, 또 신(申)·구(具)라 우기기도 하며 연이어 벌주를 먹였다. 뒤에 가서는 불러도 둘이 대답이 없자,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네”하고 또 벌주를 주어 끝내 세 사람은 크게 취하였다.

 

이토록 임금과 신하가 어우러진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신숙주는 세조가 죽고 난 뒤에 예종(睿宗)·성종(成宗) 때에도 새 임금들을 도와 많은 일을 했다. ?성종실록?을 쓴 사관은 그가 죽었을 적에 많은 업적과 칭송을 적고 나서, 그의 단점을 ‘세조를 섬기면서 받들어 따르기에 힘썼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사육신과 단종의 문제를 두고 암시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임금에게 맞서 잘못을 강하게 따지는 성품이 아니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는 도통 사람을 죽이거나 권모술수를 부리는 인물이 못 되었다. 그가 사육신에 끼이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런 성품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성찰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신숙주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런 그의 인품을 나타내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첫 벼슬길에 나왔을 때, 서리가 그를 꺼려서 직첩을 전해주지 않아 맡은 일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이를 알고 서리를 탄핵했다. 이에 서리가 쫓겨날 것을 염려하여 신숙주가 거짓 자복했다. “서리가 직첩을 전해주었지만 내가 스스로 나가지 않았다”(?성종실록?, 6년). 이리하여 서리는 벌을 모면했고 신숙주는 파직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덕망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가 일본에 갔을 적에 일본이 여자를 바쳐 잠시 데리고 살았다. 그런데 그 왜녀가 임신을 하자 버리고 올 수가 없어서 데리고 배에 올랐다. 쓰시마로 오는 길에 풍랑이 심하자, 배에 탄 사람들이 계집이 배에 타서 용왕이 노해서 풍랑이 인다고 왜녀를 바다에 빠뜨리려 하였다. 이에 신숙주는 풍랑이 곧 그칠 것이라고 말하며 한사코 말려 끝내 구했다. 아끼는 계집이어서가 아니라 인명을 아낀 것이다.

 

단종이 죽을 적에 그 연루자들의 가족을 모두 종으로 삼아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단종의 비인 송 씨도 종이 되었는데 신숙주는 송 씨를 자기 집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이 허락되지는 않았지만 그 뜻은 딴 데에 있었다. 송 씨를 잘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늘 종들을 따뜻이 대해주었고 종들의 신공(身貢:종이 상전집에서 나와 살 적에 몸값으로 바치는 물품 또는 돈)이 멀리거나 내지 않아도 내버려두었다 한다. 또 어려운 친척에게는 늘 먹을 것을 보내주고 잠잘 곳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그가 어릴 적부터 친분을 나눈 후배였으나 18세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김시습은 서울에 와도 그를 찾지 않았다. 어느 날 김시습이 서울에 와 머물자, 그 집 주인에게 “김시습에게 술을 많이 먹이라”고 당부했다.

 

김시습이 술에 곯아떨어지자 가마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김시습이 술이 깨어 신숙주 집인 것을 알고 나가려 하자, 손을 잡고 “어째서 말 한 마디 않는가?”고 안타까워했다. 김시습이 소매를 뿌리치고 말없이 가자, 그는 조용한 눈으로 김시습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다.

 

명예를 잃었으나 문화업적 남겨

 

이 대목에서 그의 문학을 통해 쌓은 업적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후배인 임원준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는 글을 남겼다.

 

문장에 능숙한 자가 반드시 정치를 잘 하는 것도 아니요 정치를 잘 하는 자는 본시 문장에 능숙하지 못하나니 두 가지 재능을 겸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신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의 시호)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게 우수하고 덕스러운 인품이 일찍이 이루어져 옛 전적을 열심히 공부하고 문필의 세계에 한가히 노닐어서(보한재집 서문)

 

이 평가는 신숙주가 문장에 능숙한 재사로 정치적 업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또 그보다 훨씬 후대의 문사인 김종직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가 문장을 지으면 모두 인의와 충신에 근본을 두었고 여유 있고 화창하며 뛰어나고 넓어서 번거롭게 먹줄을 대서 깎고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법도가 있었다. 비록 붓을 놀려 희롱삼아 갑작스레 지어도 또한 실로 덕 있는 사람의 말씀이 되었다.(앞과 같음)

 

그는 중국과 일본에 가서 수창외교(酬唱外交)를 맡았으며 문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글을 지을 적에 현학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상투적인 공자왈... 맹자왈....을 읇조리지 않았다. 또 시에서는 용사(用事)를 거의 쓰지 않고 표현에만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난해하지 않았다. 한편 김시습처럼 농민의 고통을 담는 사회사를 쓰지도 않았다. 순수시에 열중하였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는 남원 광한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싯귀를 남겼다.

 

뜬 구름같은 부귀공명 따질 것이 못되니

임천(林泉)의 흥취 아직 버리지 못하겠노라...

인생에 천명 있음 이제야 믿겠노니

공명은 물리치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워

 

그는 부귀영화의 부질없음을 담담하게 읇조리고 있다. 또 이렇게 읇기도 하였다.

 

세상 속인 공명 만족한 줄 안 지 오랜데

가을바람에 또 고향 생각 나누나.

 

문사의 기질 또는 인생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이런 시 경향은 많은 후배들에게 연향을 끼쳤다. 한편 그는 만년에 들어 결백한 선비의 길, 명리를 멀리하고 한가한 삶을 누리며 문학에 정진하겠다는 뜻을 자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아호를 보한재(保閑齋, 한가롭게 글 읽는 곳)라고 지었다. 그는 고향 나주로 가서 살고 싶어했다.

 

검소하고 청렴한 삶

아무튼 그는 여느 벼슬아치와는 달리 검소한 생활을 했고,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면 부가 따르는 법이요, 더욱 부당하게 권력을 잡으려는 동기는 재산을 탐한 데에서 나오는 것이 흔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는 부를 탐하지 않았고 공평하게 사람을 썼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는 죽을 적에 자손들에게 장례를 검소하게 하라고 당부했고 자신의 무덤에 책만 넣어놓으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렇게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벼슬아치로서도 결함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나약할지언정 포악하지 않았으며, 현실적이었을망정 술수를 부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결함으로 지적되는 것은 물론 훼절(毁節) 실절(失節)이었고, 이것이 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면서 곰곰이 따져볼 여지도 없이 윤색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잘 쉬는 나물을 숙주나물이라 하였다. 여기의 숙주는 신숙주의 이름을 뜻한다고 한다.

 

한 인간의 평가는 전체를 보아야지 국면만 보아서는 제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절의란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한 사회를 위한 것일 적에 애국자도 되고 위인도 된다. 그러나 한 개인을 위한 것일 적에는 그 이해의 각도가 다양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신숙주는 목숨을 부지하여 고종명(考終命)한 대신 명예를 잃었다. 성삼문은 한 목숨을 바친 대신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버릴 수 없는 것은 성삼문은 그 이상 이룬 것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사육신의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가치관의 혼란만을 가져온다 말할 수 있겠다.

 

신숙주는 분명히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업적보다 절의가 중한지의 문제는 방법과 목적과의 관계처럼 미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미묘함이 신숙주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숙주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갔을 뿐, 그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또 그는 비난받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깨끗한 벼슬아치였다. 그의 행적은 보통 사람이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정도의 것이었지만, 그가 뛰어난 학자요 또 세종·문종의 총신이었기에 따르는 유명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생육신처럼 초야에 묻혀 지냈더라면 그가 역사에 얼마만한 업적을 남겼을까?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많이 죽인 세조 밑에서 신하 노릇했다는 것만으로 신숙주를 비난해서는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여담으로 밝혀두면, 그가 살아남았기에 우리 역사 속의 두 거인이 그의 자손들에서 태어났다. 독립투사인 예관(晲觀) 신규식(申圭植)과 민족사가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그들이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에도 후손들이 독립운동가 그리고 언론인 정치인 등으로 많은 활동을 펼쳤다.

 

*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소장과 서원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역사대중화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재단이사장과 국치 100년 한일공동행도 상임대표를 맡아 과거사 청산에도 앞장 서왔다. 저서로는 한국사 이야기(전 22권),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10권), 만화 한국사(전 9권), 영원한 제국 등 100여권이 있다. 현재는 식민지시대를 중심으로 한 시민역사관 건립위원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