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3.1만세운동의 주역 김영기 선생(나주 봉황면)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기옥, 이창신 선생을 기억합니다.
제74주년 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178명 포상
‣ 오는 15일(목)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이봉구 선생, 박기옥 선생 등 178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여 그 분들의 나라사랑과 독립정신을 널리 알림
‣ 포상 자는 건국훈장 49명, 건국포장 28명 등이며, 이중 생존애국지사는 1명, 여성은 10명으로 향후에도 적극적인 독립유공자 발굴 추진 |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오는 15일(목)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지난 1919년 4월 경기 화성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받은 이봉구(李鳳九) 선생과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기옥(朴己玉) 선생 등 178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49명(독립장 1, 애국장 8, 애족장 40), 건국포장 28명, 대통령표창 101명으로, 이중 생존 애국지사는 1명(백운호, 89세)이며, 여성이 10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4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본인과 유족에게 수여된다.
15일(목) 중앙기념식에서는 포상자 중 유일한 생존애국지사로 항일비밀결사에 참여하고 1942년 사회 질서와 안전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초를 겪는 등 조국독립에 기여한 백운호 선생(대통령표창)이 직접 포상을 받을 예정이다.
- 또한, 1925년부터 제주청년연합회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1931년 6월 비밀결사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돼 징역 5년을 받은 고(故) 김한정 선생(남, 건국훈장 애국장)과 1920년 7월 프랑스에서 재법한국민회 제2대 회장으로 활동하고 같은 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는 등 조국독립에 기여한 고(故) 홍재하(남,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의 증손과 자녀가 각각 포상을 수여받는다.
- 여기에 191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사무국 사리원 지국장으로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징역 7개월을 받은 고(故) 제갈관오(남, 건국포장) 선생과 1929년 10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당해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백지동맹에 참여한 고(故) 박기옥(여, 대통령표창) 선생의 손자와 자녀가 각각 포상을 받을 예정이다.
이번 포상을 포함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014명, 건국포장 1,308명, 대통령표창 3,367명 등 총 15,689명(여성 444명)에 이른다.
앞으로도, 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유관기관과 사료수집 등 협업을 활성화하고,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그 분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독립정신을 드높이는 노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 격렬한 투쟁으로 무단통치의 폭압에 항거한 투사, 이봉구 선생 |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이봉구(李鳳九) 선생께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서울 순화동의 한 여관에서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9년 4월 경기도 화성시 장안․우정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징역 12년이라는 중형을 받고 큰 고초를 겪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을 목도한 선생은 바로 고향인 장안면으로 내려가 1919년 4월 3일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 우정면 화수리 경관주재소 등을 공격․파괴하는데 앞장섰다. 선생은 화수리 경관주재소에서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후 2년 가까이 피신하였다가 1921년 1월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4.15)과 『매일신보』(1921.1.23) 등 여러 건의 신문기사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무단통치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일제의 폭압에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다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중형을 받은 사례이다. 한편, 독립만세운동 당시 경기도 안성과 더불어 전국적으로도 격렬한 항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화성시에서 포상을 신청한 것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에 지방자치단체와 보훈처가 협업한 사례이다. |
❖ 사제(師弟)가 하나된 독립만세의 함성, 전주 신흥학교의 세 영웅 |
스승과 제자가 하나되어 3․1운동에 참여한 전주 신흥학교(신흥고등학교의 전신)의 유병민(劉秉敏)․문병무(文秉武)․김경신(金敬信) 세분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유병민 선생과 문병무 선생은 전북 전주에서 미국 기독교계 선교사가 운영하는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사로 1919년 3월 초 학교와 인근 자택에서 제자인 신흥학교 학생들 십여 명을 대상으로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체포된 유병민 선생은 징역 1년을 받았고, 체포를 피한 문병무 선생도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김경신 선생은 위 유병민․문병무 선생의 제자로 조선독립을 역설하는 두 교사의 역설에 공감, 1919년 3월 13~14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학생 및 시위군중과 함께 전주시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료학생 10여 명과 시내 교회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은 종교단체에서 주동하였으니, 예수교인들은 예배시간에 독립의 성취와 구금된 애국동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원하여야 한다”고 연설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다. 주목할 것은 김경신 선생의 독립운동이 3․1운동 참여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후에도 그는 1921년 11월 전주 동료의 자택에서 ‘워싱턴회의’(1921.11.12~1922.2.6)에 맞춰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유병민․문병무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24; 12.24)과「수형인명부」, 김경신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24; 1922.3.13, 대구복심법원, 1919.7.28.,1922.5.1, 고등법원, 1919.10.9)과 「수형인명부」등 행형기록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한편, 세분은 전주시에서 포상을 신청한 것으로, 지방자치단체와 보훈처가 협업한 사례이다. |
❖ 전남 나주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기옥 선생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앞장선 최현수 선생 |
전남 나주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기옥(朴己玉) 선생과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앞장선 여성 독립운동가 최현수(崔賢守)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박기옥 선생은 1929년 10월 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등교길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을 당해 전민족적 항쟁으로 번진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듬해 1월 시험거부 백지동맹 등 학내 항일시위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포상기준 개선에 따라 학적부 등에서 퇴학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선생이 희롱을 당한데 격분하여 일본인 학생들을 응징한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 1990 애족장), 백지동맹(白紙同盟) 동지 이광춘(李光春, 여, 1996 건국포장)이 이미 포상을 받았다.
최현수 선생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1930년 1월 서울에서 사립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항일격문을 필사하는 등 동료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정보보고(1930.1.15)에 따르면, 선생 등은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가담하게 된 이유에 대해 동료 학생들에게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사건에 관하여 현재 전국적인 문제로 부상하여 모든 학교에서 이에 동정하여 동맹휴교를 하고 있으나, 이화학교만이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는 것은 면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사회에서 배일학교로서 숭배를 받아온 체면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때에 반드시 뭔가 운동을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는 말로 시위를 하도록 선동”했다고 한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일제 정보보고(1930.1.15)와 신문조서(1930.1.19; 1.30), 신문기사 등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선생과 함께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은 최복순(崔福順), 최윤숙(崔允淑), 김진현(金鎭賢) 선생에게도 이미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 한글과 국사(國史)의 수호와 보급에 앞장선 민족문화 지킴이, 권덕규 선생 |
식민지 지배의 엄혹한 상황에서 한글 및 민족사의 수호와 보급에 앞장선 권덕규(權悳奎)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85년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1921년부터 서울에서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와 「조선유기(朝鮮留記)」등을 저술하고 ‘한글사’를 설립(1927)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 조선어학회 순회강연에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1934년 진단학회 찬조회원, 1935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 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3․1운동 직후부터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1940년대 이후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를 돌며 한글보급을 위한 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한글의 수호와 보급에 전력을 기울였다. 식민치하의 엄혹한 시기에 권덕규 선생의 한글, 민족사의 저술과 보급 활동은 ‘문화 독립운동’의 모범적인 사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 프랑스 파리에서 조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숨은 애국자, 홍재하 선생 |
이역만리 프랑스 파리에서 조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홍재하(洪在厦)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92년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1913년 중국 만주를 거쳐 노령으로 들어가 노동에 종사하다 볼세비키혁명 때 피난을 와 무르만스크까지 왔다. 1919년 11월 프랑스로 건너가 시프를 거쳐 1922년 파리로 이주해 정착했다. 1920년 1월경 프랑스 최초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조직에 참여하여 7월부터 제2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동년 9월 시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이끌던 황기환(黃玘煥, 1995 애국장)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구성원으로 1920년 10월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韓國民國際聯盟改進會) 결성을 주도하여 이 단체의 서기장으로 활약하는 등 국제연맹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선전하는 일에도 노력했다. 선생의 조국사랑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제3차 유엔총회(1948.12)가 파리에서 개최될 때 장면(張勉) 등 대표단의 한국승인 외교를 측면에서 적극 도왔고 1949년 파리에 대한민국 공관이 설치될 때에도 이를 후원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한국적십자회를 통해 적지 않은 기부금을 출연하여 대한민국 주불공사로부터 감사서한을 받기도 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작년 일부 언론의 조명 이후 프랑스 거주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선생의 서신(사본), 최신의 연구논문 등을 통해 독립운동 공적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재법한국민회와 선생의 활동은 한국민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 적의 패전사실을 알려 조국광복의 희망을 전한 염준모 선생 |
일제말기 단파수신기로 청취한 태평양전쟁의 전황(戰況)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염준모(廉準模)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38년 3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서울에서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에 근무하던 중 단파수신기를 만들어 중국 중경,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을 청취하고 태평양전쟁의 전황 등을 비밀리에 전파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2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단파수신기를 통해 청취한 내용은 “중국군은 일본공군과 교전하여 다수의 비행기를 격추했다”, “재중국 조선동포는 중국정부 원조하에 조선독립의 준비를 하고 있다”(이상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방송), “연합군은 버마전선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미국비행기는 도쿄와 오사카 등을 공격하여 군사시설에 큰 손해를 입히고 전부 무사 귀관했다”(이상 샌프란시스코 ‘미국의 소리’[VOA] 방송)는 등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선전과는 반대로 일본의 패전이 임박해있음을 알려주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1942년 말~1943년 초의 이른바 ‘단파방송사건’으로 150여 명에 달하는 인사가 검속되었고 이들 가운데 성기석(成基錫, 1990 애족장), 박용신(朴龍信, 2005 건국포장), 송진근(宋珍根, 2018 애족장) 선생 등이 포상되었다. 선생 등의 위험을 무릅쓴 활동으로 수신된 내용이 여러 경로를 통해 시중에 유포됨으로써 일제말 암흑기에 조국광복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
참고 1 |
| 광복절 정부포상자 전체 명단 (178명) |
건국훈장 독립장 (1명)
이봉구 李鳳九 (3·1운동)
건국훈장 애국장 (8명)
권덕규 權悳奎 (문화운동)
김한정 金漢貞 (국내항일)
김흥식 金興植 (3·1운동)
박영문 朴泳文 (3·1운동)
이종필 李鍾弼 (국내항일)
전도선 全道善 (3·1운동)
황석현 黃奭顯 (만주방면)
황칠성 黃七星 (3·1운동)
건국훈장 애족장 (40명)
강평국 姜平國 (일본방면)
김경신 金敬信 (3·1운동)
김근식 金根植 (3·1운동)
김동섭 金東燮 (학생운동)
김복개 金福介 (만주방면)
김봉근 金奉根 (3·1운동)
김정국 金正局 (국내항일)
김정수 金丁洙 (3·1운동)
김종태 金鍾台 (3·1운동)
남호섭 南灝燮 (3·1운동)
문병무 文秉武 (3·1운동)
박금우 朴금우 (미주방면)
박병주 朴秉珠 (만주방면)
박종은 朴鍾恩 (국내항일)
박춘언 朴春彦 (의 병)
서도인 徐度寅 (국내항일)
서병돈 徐炳敦 (3·1운동)
서성칠 徐星七 (3·1운동)
서영완 徐永琬 (중국방면)
염준모 廉準模 (국내항일)
우용현 禹鎔鉉 (국내항일)
유병민 劉秉敏 (3·1운동)
유창덕 劉昌德 (국내항일)
유창열 劉昌烈 (국내항일)
윤덕룡 尹德龍 (국내항일)
윤학송 尹學松 (3·1운동)
이규직 李奎直 (3·1운동)
이완백 李完伯 (국내항일)
이혜근 李惠根 (노령방면)
임창모 林昌模 (미주방면)
전옥결 全玉玦 (3·1운동)
전홍기 全洪基 (학생운동)
정동화 鄭東華 (국내항일)
정암우 丁岩右 (일본방면)
정호근 鄭鎬根 (3·1운동)
조흥환 曺興煥 (학생운동)
최차도 崔次道 (학생운동)
현호옥 玄好玉 (일본방면)
홍재설 洪在卨 (계몽운동)
홍재하 洪在厦 (구주방면)
건국포장 (28명)
국채진 鞠埰鎭 (국내항일)
김귀문 金貴文 (국내항일)
김영기 金永琪 (3·1운동)
김장수 金長洙 (3·1운동)
김태근 金泰根 (국내항일)
김판철 金判哲 (3·1운동)
김효배 金孝培 (일본방면)
박광남 朴光男 (3·1운동)
박기호 朴基豪 (국내항일)
박찬문 朴贊文 (3·1운동)
배종훈 裵鍾勳 (학생운동)
배창아 裵昌兒 (국내항일)
유석순 兪錫順 (3·1운동)
윤석봉 尹錫鳳 (의 병)
이고명 李高命 (국내항일)
이국표 李國杓 (3·1운동)
이기하 李起夏 (3·1운동)
이병환 李炳煥 (3·1운동)
이조헌 李兆憲 (중국방면)
장용근 張用根 (3·1운동)
전사옥 全駟玉 (학생운동)
정영운 鄭永云 (국내항일)
제갈관오 諸葛寬五 (중국방면)
조흥종 趙興鍾 (3·1운동)
주장암 朱張岩 (3·1운동)
최풍룡 崔豊龍 (국내항일)
홍금돌 洪今突 (3·1운동)
황맹석 黃孟錫 (3·1운동)
대통령표창 (101명)
강사채 姜四采 (학생운동)
강자연 姜子然 (의 병)
강준구 姜俊求 (3·1운동)
구창서 具昌書 (3·1운동)
권봉화 權奉和 (3·1운동)
권임상 權任相 (3·1운동)
권중원 權重遠 (의 병)
김공서 金公西 (의 병)
김기동 金基洞 (3·1운동)
김두채 金斗采 (학생운동)
김민석 金玟錫 (학생운동)
김사현 金士賢 (3·1운동)
김상원 金相元 (3·1운동)
김성한 金星漢 (3·1운동)
김성환 金成煥 (국내항일)
김순언 金順彦 (의 병)
김시찬 金時贊 (국내항일)
김여옥 金汝玉 (3·1운동)
김용응 金鏞應 (국내항일)
김장학 金章鶴 (3·1운동)
김정희 金錠熙 (3·1운동)
김진영 金鎭永 (3·1운동)
김창윤 金昌允 (3·1운동)
김필호 金弼浩 (3·1운동)
김학선 金學善 (3·1운동)
김한용 金漢龍 (3·1운동)
김현균 金玄均 (3·1운동)
김홍기 金洪基 (3·1운동)
남궁우룡 南宮又龍 (3·1운동)
노성용 盧成用 (3·1운동)
모재명 牟才明 (3·1운동)
문종석 文鍾錫 (3·1운동)
민성숙 閔成淑 (3·1운동)
박계수 朴桂壽 (일본방면)
박극수 朴克壽 (3·1운동)
박기옥 朴己玉 (학생운동)
박덕주 朴德柱 (3·1운동)
박상선 朴尙鮮 (3·1운동)
박생진 朴生珍 (국내항일)
박창규 朴昌奎 (3·1운동)
배광석 裵光錫 (3·1운동)
백운호 白雲豪 (국내항일)
복만길 卜萬吉 (국내항일)
서가마 徐加馬 (국내항일)
서병규 徐丙珪 (3·1운동)
서봉운 徐奉雲 (3·1운동)
서승효 徐承孝 (국내항일)
손정채 孫正彩 (국내항일)
송계득 宋癸得 (3·1운동)
양만석 梁萬石 (3·1운동)
유동복 柳東馥 (3·1운동)
유만수 柳萬壽 (3·1운동)
유연기 柳淵琦 (3·1운동)
유영하 柳永夏 (학생운동)
유한종 劉漢鍾 (3·1운동)
윤경문 尹京文 (국내항일)
윤화정 尹和鼎 (3·1운동)
이경재 李敬載 (국내항일)
이계동 李啓東 (3·1운동)
이규연 李圭連 (의 병)
이상준 李相俊 (3·1운동)
이승우 李承祐 (3·1운동)
이영직 李英稙 (3·1운동)
이오길 李吾吉 (국내항일)
이용선 李容先 (국내항일)
이원섭 李元燮 (국내항일)
이원영 李遠榮 (국내항일)
이인희 李仁熙 (학생운동)
이창규 李昶奎 (3·1운동)
이창신 李昌信 (학생운동)
이판쇠 李判釗 (3·1운동)
이학서 李鶴西 (3·1운동)
임영식 任永植 (3·1운동)
장영안 張永安 (3·1운동)
장태중 張太仲 (3·1운동)
전병창 全炳昌 (3·1운동)
정경식 鄭景湜 (일본방면)
정규원 丁奎源 (3·1운동)
정삼모 鄭三模 (3·1운동)
정수만 鄭水萬 (3·1운동)
정순완 鄭淳完 (3·1운동)
정희근 鄭禧根 (3·1운동)
조경제 趙京濟 (3·1운동)
조만봉 趙萬琫 (국내항일)
조용명 趙鏞明 (3·1운동)
조용철 趙龍喆 (3·1운동)
조해규 趙海奎 (3·1운동)
주승환 周昇煥 (3·1운동)
차학봉 車學奉 (3·1운동)
최갑쇠 崔甲釗 (3·1운동)
최규원 崔圭元 (국내항일)
최만화 崔晩華 (3·1운동)
최선유 崔善有 (3·1운동)
최준달 崔俊達 (3·1운동)
최현수 崔賢守 (학생운동)
한상엄 韓相嚴 (국내항일)
홍순정 洪淳鼎 (만주방면)
홍태식 洪台植 (만주방면)
황순태 黃順泰 (3·1운동)
황오봉 黃五峰 (3·1운동)
황정수 黃正秀 (3·1운동)
참고 2 |
| 광복절 주요 서훈자 공적 세부내용 |
? 고(故) 이봉구 선생
■ 인적사항
유공자명 | 생년월일 | 본 적 | 훈 격 |
사망년월일 | 주 소 | ||
이 봉 구 (李鳳九) | 1897년 | 경기 수원군 | 건국훈장 독립장 |
미상 | 서울 순화동 |
■ 공적개요
- 1919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현 화성시)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장안․우정면사무소와 우정면 화수리 경관주재소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받음
■ 활동의 의의
-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후 도피하였다가 2년 후인 1921년 1월 서울에서 체포
-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폭압에 격렬하게 항거한 사례
■ 참고사항
- 「판결문」(1921.4.15) 등 행형자료와 「매일신보」(1921.1.23) 등 여러 건의 신문기사 등에서 공적내용 확인
※ 홍보자료
- 매일신보(1921. 1. 18.)
- 매일신보(1921. 1. 23.)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 1921. 4. 15.)
「매일신보」 1921년 1월 18일자 기사. 이봉구 선생이 1919년 4월 만세시위 당시 순사를 처단하고 도주하였다가 2년 후인 1921년 1월 체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원문 옮김>
◦ 수원의 순사 살해범 체포, 얼마동안 종적을 감추었던 자
수원군(水原郡) 장안면(長安面) 수촌리(水村里) 773번지에 거주하다가 경성부(京城府) 화천정(和泉町) 51번지에 의거하던 이봉구(李奉九, 24)는 1919년 3월에 수원군 독립만세 소요사건이 발생한 때에 순사 천단(川端)을 때려죽이고 즉시 도망하여 이제껏 간 곳을 모르던 바 마침내 지나간 이달 아흐레 날에 동대문경찰서로부터 위에 기록한 범인이 경성시내에 돌아다니는 것을 체포하여 방금 엄중히 취조하는 중이더라.
「매일신보」1921년 1월 23일자 기사. 이봉구 선생이 1919년 4월 3일 수원 장안면에서 촌민 수백명과 독립만세를 부르고 장안면사무소를 습격, 우정면사무소, 우정면 화수리 경찰관주재소 등을 파괴하고 주재순사를 처단 후 체포되어 검사국으로 송국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원문 옮김>
◦ 수원사건의 순사 살해범, 동대문서에서 취조를 마치고 나서 검사국에 송치
시내 화천정(和泉町) 51번지 영창여관(永昌旅館)의 청객군인 이봉구(李奉九, 25)는 이미 동대문경찰서 우메다(梅田) 부장에게로 취조 중이던 바 지나간 21일 서류와 함께 검사국으로 보내었는바 지금 그 범죄사실을 들은즉, 1919년 3월 4일(4월 3일의 오기로 보임) 오전 9시경에 수원군(水原郡) 장안면(長安面) 수촌리(水村里)와 석포리(石浦里)에 거주하는 수백 명의 촌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장안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동 사무소를 파괴하고 계속하여 동군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오후 2시경 우정면(雨汀面) 화수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할 때 이미 동 주재소는 먼저 온 자들의 폭동으로 인하여 반소되었는바 그 때 주재순사 천단신태랑(川端新太郞) 외 조선인 순사 일동은 사무소를 피해서 달아나고자 함에 (중략) 무참히 살해를 하고 그 후 경성에 들어온 것을 체포한 것이라더라.
「판결문」(경성지방법원 : 1921. 4. 15.)
<원문 번역>
◦피고 : 이봉구(李鳳九, 25세), 일명 이봉구(李奉九)
본적․출생 :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 735번지
주소 : 경성부 화천정 51번지 영창여관 내 피고인
◦주문 : 보안법 위반 및 소요․살인, 징역 12년
◦理由
피고는 1919년 3월 1일 경성부 내에서 손병희(孫秉熙) 외 32명 이름으로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선내 각지에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중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운동을 행하자,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장안면(長安面) 석포리(石浦里) 구장(區長) 차병한(車炳漢) 외 수 명이 주모자가 되어 위 취지에 찬동하여 각지와 동일 행동을 하기 위해 동면 내 주민 다중과 함께 동년 4월 3일 동면(同面) 어은리(漁隱里) 소재 장안면사무소, 동군 우정면(兩汀面) 사기리(沙器里) 소재 우정면사무소 등에 몰려갈 때 그 취지에 찬동하여 이에 참가하고 위 각 면사무소 부근에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 (하략)
? 고(故) 전주 신흥학교 유병민․문병무(교사), 김경신(학생) 선생
■ 인적사항
유공자명 | 생년월일 | 본 적 | 훈 격 |
사망년월일 | 주 소 | ||
유 병 민 (劉秉敏) | 1885년 | 전북 전주 | 건국훈장 애족장 |
미상 | 상동 | ||
문 병 무 (文秉武) | 1887년 | 전북 전주 | 건국훈장 애족장 |
미상 | 상동 | ||
김 경 신 (金敬信) | 1902.7.7. | 전북 정읍 | 건국훈장 애족장 |
미상 | 전북 전주 |
■ 공적개요
○ 유병민․문병무 선생
- 1919년 3월 전북 전주 신흥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모아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 문병무 선생은 궐석재판에서 형을 받음(1919.12.24)
○ 김경신 선생
- 1919년 3월 14일 전북 전주 완산교(完山橋)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 1921년 11월 전주 대화동에서 ‘워싱턴회의(1921.11.1~1922.2.6)’에 맞춰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 활동의 의의
- 신흥학교 교사 문병무, 유병민 선생이 학생 김경신 등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전주시장 만세시위를 주도
- 두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김경신은 1919년 3.1운동 시위로 징역 1년, 1921년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 참고사항
-「판결문」과 「수형인명부」등 여러 행형기록에서 1919년 3월 13일 전주시장 만세운동의 공적내용과 상호 인적관계 등을 확인
※ 홍보자료
-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1919. 12. 24.) * 문병무, 유병민 선생
-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1919. 6. 24.) * 김경신 선생
-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1922. 3. 13.) * 김경신 선생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1919. 12. 24.)
<원문 번역>
○피고(1) : 유병민(劉秉敏, 35세),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사
전라북도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피고(2) : 문병무(文秉武, 33세 정도)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사
전라북도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주문 : 보안법위반, 징역 1년
○이유
피고 두 명(유병민, 문병무)은 모두 전라북도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부근에 미국 기독교 선교사가 경영하는 신흥학교 교사로 1919년 3월 상순 동교 및 부근의 자택에서 동교 생도인 김경신(金敬信), 남궁현(南宮炫) 외 십 수 명에게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그 시위운동을 선동하여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하략)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1919. 6. 24.)
<원문 번역>
○피고 : 김경신(金敬信, 18세), 신흥학교(新興學校) 학생
전라북도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주문 : 보안법위반, 징역 1년
○이유
피고 김경신(외 명단 생략)은 1919년 3월 14일 하오 3시 경, 다수 군중과 함께 전주군(全州郡) 전주면(全州面) 완산정(完山町) 완산교(完山橋) 부근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동면 본정 부근까지 행진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
피고 김경신은 그 전날 군중과 함께 동면 서정(曙町) 전주교 부근으로부터 대정정(大正町) 우편국 부근까지 한국독립만세를 절규하고 소란을 피우며 행진하는 등 치안을 방해하였다. (하략)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1922. 3. 13.)
<원문 번역>
○피고 : 김경신(金敬信, 당 21세) 전주신흥학교 고등과 3년생
전북 전주 전주 대화정 최두환(崔斗煥) 의 집
○주문 :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90일 본형에 통산)
○이유
(상략) 제3. 피고 경신(敬信)(외 명단 생략)은 전부터 조선독립을 기도하여 1921년 11월 2일 전주군(全州郡) 전주면(全州面) 대화정(大和町) 피고 두환(斗煥)의 집 객실에서 조선독립에 관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두환은 ‘華盛頓(워싱턴)회의’의 유래를 피고 경신에게 물으니 경신은 이번 ‘워싱턴 회의’는 태평양에 인접하는 여러 국가간의 문제를 제의하는데 있으니 우리 조선도 문제로서 제의될 수 있음에 그때 각 곳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쳐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자 피고 두환은 경성에서는 물론 만세를 부를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한 진안방면에서도 머지않아 독립만세를 크게 외쳐야 하는 것인 피고도 그때 크게 만세를 고창하고 서로 호응하여 독립운동을 도움으로써 초지(初志)를 수행할 것을 말하고 피고 경신, 인환은 이에 공명하고 독립운동을 돕겠다고 결의함으로써 안녕질서를 방해하려고 한 자이다. (중략)
피고 경신은 1919년 7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에 의해 징역 1년에 처해지고 1920년 4월 28일 본 형을 징역 6월 10일로 변경되어 그 당시 그 형의 집행을 마친 자이다. (하략)
? 고(故) 박기옥 선생(여)
■ 인적사항
유공자명 | 생년월일 | 본 적 | 훈 격 |
사망년월일 | 주 소 | ||
박 기 옥 (朴己玉) | 1913. 10. 25. | 전남 나주 | 대통령표창 |
1947. 6. 2. | 상 동 |
■ 공적개요
- 1929년 10월 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을 당해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됨
- 이후 시험 거부 백지동맹 등 항일시위에 참여하다가 퇴학을 당함
■ 활동의 의의
-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인물
- 광주학생운동의 일환으로 백지동맹 등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
■ 참고사항
-「학적부」,「조선일보」,「동아일보」,「신한민보」,「사상에 관한 정보」(경성지방법원 편철문서),「한민」등에서 공적 내용이 확인됨
※ 홍보자료
- 박기옥 선생 사진
-「학적부」(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동아일보」(1930. 1. 17)
박기옥 선생과 이광춘 선생
옛 나주역
<원문 옮김>
ㅇ 광주여고보생 12명 검거 - 과격한 격문을 산포하여, 모종 조직체 발각
지난 15일 새벽 4시에 광주경찰서와 전라남도경찰부가 연합하여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수십 명의 가택을 수색하는 동시에 여학생 10여 명을 검속하였다 함은 기보하였거니와, 이제 그 자세한 내용을 도경찰부의 조사에 의하면 작년 11월 3일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와 광주일본인중학생들이 충돌되었을 당시에 자기 여자고보생들은 광주고보생들 측에 가담하여 붕대와 약품을 준비하여 가지고 따라다닌 후 남학생들을 많이 검속하는 것을 보고는 일제히 등교치 아니하기로 하고 등교를 하여서도 수업에 응치 아니하다가, 연말을 당하자 휴학하였다가 지난 8일부터 다시 등교는 하였으나 제2학기 시험을 9일부터 시작하게 되었으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려고 백지동맹을 하기로 하였는데, 지난 13일 제3학년 학생 이광춘(李光春) 양이 시험 중에 돌연히 등단하여 “우리는 좌우간에 동일한 행동을 취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의미로 격려연설을 하고 과격한 문구를 나열한 삐라를 준비하여 산포하려고 하였던 것이 경찰에게 발견되자 이 여자고보생들을 중심으로 어떠한 조직체가 있다 하여 그와 같이 검속하였다는데, 검속자 박계남(朴季南) 양 외 1명을 도경찰부와 광주경찰이 나눠 가지고 엄중히 취조하는 중이라 한다.
? 고(故) 최현수 선생(여)
■ 인적사항
유공자명 | 생년월일 | 본 적 | 훈 격 |
사망년월일 | 주 소 | ||
최 현 수 (崔賢守) | 1911. 12. 24. | 함남 원산 | 대통령표창 |
미 상 | 서 울 |
■ 공적개요
- 1930년 1월 서울에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활동함
- 항일 격문을 필사하는 등 학우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 활동의 의의
- 3․1운동 이래 ‘배일(排日) 학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참여
- 동료 학생 최복순(2014, 대통령표창), 최윤숙(2017, 대통령표창), 김진현(2019, 대통령표창)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
■ 참고사항
-「신문조서」,「동아일보」(1930.2.11),「중외일보」(1930.2.11),「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공적 내용 확인됨
※ 홍보자료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 ?중외일보?(1930. 2. 11)
일제강점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원문 옮김>
ㅇ 허정숙(許貞淑) 이하 8명 보안법으로 수(遂) 기소(起訴) - 오후 3시에 대체 확정, 즉일로 공판 회부
여학생만세운동사건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구속 중에 있는 근우회 허정숙(許貞淑) 이하 여학생 32명, 합계 33명에 대한 처분 여하인데, 10일 오후 2시경까지 아직 가부 간의 결정은 못 본 모양 같으나, 오전 중 학교 책임자를 소환하고 구속 중의 학생에 관하여 이등검사가 여러 가지로 금후 학생의 전도에 관하여 협의한 결과, 대부분은 기소유예 처분으로 10일 오후에 석방케 될 모양인바, 이등검사가 교장에게 암시한 바에 의하면 기소유예로 석방될 학생은
▲ 이화여고보 : 최현수(崔賢守) (외 명단 생략) 등으로 관측된다더라.
? 고(故) 권덕규 선생
■ 인적사항
유공자명 | 생년월일 | 본 적 | 훈 격 |
사망년월일 | 주 소 | ||
권 덕 규 (權悳奎) | 1885년 | 경기 김포 | 건국훈장 애국장 |
미 상 | 서 울 |
■ 공적개요
- 1921년부터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글 연구서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국사연구서 ?조선유기(朝鮮留記)? 등을 저술하고 1927년 한글사를 설립함
- 1931년 조선어학회 순회강연 강사, 1934년 진단학회 찬조회원, 1935년 조선어사전편찬회 편찬 전임위원 등으로 활동
- 1920년부터 1946년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한글보급 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한글의 수호와 보급에 앞장
■ 활동의 의의
-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 등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고 한글 및 국사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민족문화 수호의 지킴이로서 ‘문화 독립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김
■ 참고사항
-「동아일보」,「매일신보」,「중외일보」 등 여러 일간지와 「삼천리」등에서 공적 내용이 확인됨
※ 홍보자료
- 권덕규 선생 사진, ?조선어문경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 ?동아일보?(1922. 4. 1)
<원문 옮김>
ㅇ 조선어 연구의 필요 - 권덕규(權悳奎)
(상략) 위선(爲先) 어학은 무슨 필요로 연구하는가? 이에 대하여는 일반의 어학을 연구하는 자가 대개 세 가지 목적으로써 그 연구의 태도를 삼나니, 언어를 연구하는 목적은 사상을 교환하는 실용적 방면도 있고, 언어를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방면도 있으며, 또한 이로써 고대 인문의 발달을 설명하는 응용적 방면 곧 문헌적 연구도 있느니라. (중략)
대저 조선어는 어떠한 사람이 사용하는 것인고? 이는 자세히 말할 것 없이 조선사람이 쓰는 말이로다. 그러함에 서슴지 아니하고 조선사람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노라. 이 말은 우리 민족이 공유한 것이라. 이로써 우리 의사를 전달하며 이로써 과거를 기록하고 이로써 미래를 설명할지니, 조선말은 곧 조선민족의 神經系라 할지로다. (중략) 조선어는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라 도리어 그 중대함을 모르도다. (중략) 최후로 말할 것은 조선어를 조선어뿐으로 연구하지 못한다는 말이니, 곧 조선어 하나를 연구하려 하여도 조선어에 관계있는 동양 제국(諸國)의 말이며 다른 외국어의 힘을 길러야 한다 함이라. 조선어가 어찌 가갸거겨 하며 너니 내니 하는 단순한 물건으로 조직된 것뿐이리요. 말이란 본디 가깝게 자신으로부터 멀리는 우주 만반을 관련하여 된 것이라. 그러함에 조선어를 연구하는 데에 자매어로부터 다른 외국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함이며, 이뿐 아니라 또한 제반 과학과의 관계가 깊은 것임에 그들 과학에 소홀치 못할 것이니 이 자기로부터 우주를 아는 학문이라. 어찌 말하면 어학 하나가 우리 인류의 자랑 가운데의 가장 된 것이라 할지로다. 어학의 필요가 이러한지라. 더욱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가어(自家語)에리오.
? 고(故) 홍재하 선생
■ 인적사항
유공자명 | 생년월일 | 본 적 | 훈 격 |
사망년월일 | 주 소 | ||
홍 재 하 (洪在厦) | 1892. 1. 18. | 경기 양주 | 건국훈장 애족장 |
(1960. 2. 10.) | 프랑스 쉬프, 파리 |
■ 공적개요
- 1920년 1월 경 프랑스에서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조직에 참여
- 1920년 7월부터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제2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
■ 활동의 의의
- 프랑스 최초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 제2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자금을 지원하고 선전․외교활동도 지원
- 선생의 활동은 한국민이 거주하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든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
■ 참고사항
- 2018년 언론의 조명 이후 2019년 3월 프랑스 거주 후손의 서훈신청
- 후손의 제출한 서신 등 자료와 발굴 자료를 보완해 포상
※ 홍보자료
- 홍재하 선생 사진(1943년)
- 한국군 장교(혹은 사관생도)와 홍재하 선생(1950년대 중후반 추정)
- 황기환이 홍재하에게 보낸 편지(1920.9.2.)
홍재하 선생(1943년)
한국군 장교(혹은 사관생도)와 홍재하 선생(1950년대 중후반 추정)
황기환 선생이 홍재하 선생에게 보낸 편지」(1920. 9. 2.)
※ 편지 내용
일전 주신 惠□와 金 220佛을 접수하였소이다. 徐海昌군은 미주로 갔소이다. 무사 下陸하기바라오. 자세한 소식은 李兄 水南에게 得聞하시옵시오.
(추신) 尹先生의 万佛을 전하였소다.
? 고(故) 염준모 선생
■ 인적사항
유공자명 | 생년월일 | 본 적 | 훈 격 |
사망년월일 | 주 소 | ||
염 준 모 (廉準模) | 1917. 5. 23. | 서 울 | 건국훈장 애족장 |
미 상 | 상 동 |
■ 공적개요
-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서울 조선방송협회 기술부 근무 중 단파수신기를 만들어 중국 중경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을 청취
- 비밀리에 방송으로 수신한 미군의 승전과 일본군의 패전 소식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2월을 받음
■ 활동의 의의
- 선생이 포함된 1942년 말~1943년 초의 ‘단파방송 사건’으로 150명이 넘은 인사들이 검거됨
-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군의 패전과 한국 독립운동세력의 투쟁 상황을 전파함으로서 암흑기에 조국광복의 희망을 갖게 해줌
■ 참고사항
-「신문조서」,「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일제의 각종 정보보고 등에서 공적이 확인되어 포상
- 동일 활동으로 성기석 선생이 1990년 애족장, 박용신 선생이 2005년 건국포장, 송진근 선생이 2018년 애족장에 서훈됨
※ 홍보자료
- 「의견서」(경기도 경찰부, 1943.6.14)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원문 번역>
ㅇ 의견서(경기도경찰부 : 1943. 6. 14)
(상략) 제1. 피의자 상원민영(上原敏永, 염준모)은 1937년 3월 하순경 조선방송협회 기술부 검정실에서 근무 중, 동 과원(課員) 산본공(山本功)으로부터 단파수신기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흥미를 가져, 동인(同人)에게 의뢰하여 콘도르 4구(球) 수신기를 개조하여 19미터파 정도 내지 28미터파 정도의 전파장을 청취할 수 있는 단파수신기를 제작하여 이를 허가받지 않고 조선방송협회 내에 설치하여 약 10일간 사용 후, 1937년 4월 중순경 이를 허가받지 않고 경성부 가회정(嘉會町) 1번지 110호의 주소에 설치하고, 1941년 6월까지의 사이에 중경(重慶), 동경(東京), 만주국(滿洲國) 등지로부터 단파방송을 밀청한 자이다. (중략)
제2. 피의자 상원민영(上原敏永)은 1941년 6월경부터 1943년 2월 사건 검거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조선방송협회 기술부 기술과 시험계실에서 동과(同課)의 외국제 전파수신기를 허가받지 않고 여러 차례 동소(同所)에 설치하여 이를 사용하여 샌프란시스코로부터의 (중략) 모략방송을 전후 7회에 걸쳐 청취하였다. (하략)
붙임 3 |
| 광복절 중앙기념식 친수 포상자 명단 |
서훈자 | 훈 격 | 주 요 공 적 | 수상자 |
운동계열 | |||
고(故) 김한정 (남) | 건국훈장 애국장 | ‣1925년부터 제주청년연합회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1931년 6월 비밀결사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는 등 독립에 기여함 | 증손 김현탁(남, 42세) |
국내항일 | |||
고(故) 홍재하 (남) | 건국훈장 애족장 | ‣1920년 7월 프랑스에서 재법한국민회 제2대 회장으로 활동하고 같은 해 9월 황기환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는 등 독립에 기여함 | 자 장자크(남, 78세) |
구주방면 | |||
고(故) 제갈관오 (남) | 건국포장 | ‣191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사무국 사리원 지국장으로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7개월을 받는 등 독립에 기여함 | 손 제갈호(남, 66세) |
중국방면 | |||
백운호 (남) | 대통령표창 | ‣항일비밀결사에 참여하고, 1942년 3월 사회 질서 및 안전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 등 독립에 기여함 | 본인 (남, 89세) |
국내항일 | |||
고(故) 박기옥 (여) | 대통령표창 | ‣1929년 10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당해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백지동맹에 참여하는 등 독립에 기여함 | 자 서정이(여, 77세) |
학생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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