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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사람들

마을순례①…샘이 깊은 마을 온수동 정상채 씨

by 호호^.^아줌마 2008. 9. 26.

마을순례①…샘이 깊은 마을 온수동 정상채 씨

미래산단 들어서면 사라질 마을 알리려‘동분서주’

“삶의 터전 내주고 어디로 가나” 아직도 막막하기만

마르지 않는 샘․보도연맹사건의 비운 남겨야할 텐데...


한창 토지보상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는 마을 나주시 동수동 온수골.

탯자리는 아니지만 죽어 뼈를 묻으리라 생각하면서 살아온 마을을 앞으로 들어서게 되는 나주미래산업단지(이하 미래산단)에 내주게 된 정상채(67)씨는 요즘들어 부쩍 마실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지역 안팎에서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찾아 탐방을 오는 손님들에게 길라잡이 역할을 하기 위함도 있지만 이제 내후년이면 사라지게 될 마을을 한번이라도 더 마음 속 깊숙이 넣어두고 싶은 심산에서다.

5천평 남짓한 배 과수원을 경작하며 35년째 살아온 집. 이곳에서 5남매 중 3남매를 낳아 길렀고, 이제는 다들 장성해 객지생활을 하고 있다.

영산포에서 왕곡․동강 방면으로 우회전을 해서 들어가다 보면 전라남도생물산업지원센터로 가는 길이 새로 뚫려 발길을 유혹하지만 그쪽은 길이 아니다. 23번 국도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가게 되면 농민주유소가 나오고 그 맞은편으로 비딱하게 서 있는 버스승강장과 마을이정표가 마중 나와 있다.

지금도 약수터로 소문을 듣고 물통을 실은 차들이 하루 30~40여대씩 드나들고 있다.

정상채 씨를 따라 마을순례에 나섰다.

강성록 씨의 밭인 이곳에는 백자가마터가 있었고, 저곳 김종수 씨 집이 물주집이었고, 여기 한흥석 집터에는 대장간이 있었고, 남쪽 인초염색공장이 있었던 곳이 기와골이었으며, 그 남쪽 경주이씨 묘가 있는 곳에 영암 방면으로 반남을 경유하여 영산강으로 통하는 나그네들의 쉼터가 있었다.

정 씨의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l

구달순이 살고 있는 서당골에는 학당이 있었고, 지금은 과수원으로 변한 마을 한 켠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보도연맹사건의 민간인 학살자들의 뼈아픈 기억이 남아있다고.

한 때는 100여 가구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던 마을은 이제 14세대 37명이 살고 있을 뿐인데 그것도 대부분 50대 이상 고령자들이라고 한다.

샘 근처에서는 나주시 총무국장을 지낸 김정기 씨가 살고 있다.

정 씨에게 바람이 있다면, 이런 마을의 모습과 추억을 먼 후세들에게도 남겼으면 하는 것이다. 당연히 마을 주민들에게 생명의 원천이 돼온 샘을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도 포함된다.

장흥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주민들을 위해 기념관을 만들어 주민들의 육성과 주요 사진들을 전시해놓은 것처럼 아마도 그런 작업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소망을 힘주어 강조하는 정상채 씨의 표정에서 고향은 단지 지도에서 사라질 뿐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된다는 어느 실향민의 고백이 귓가에서 울려퍼졌다.

디음은 정상채 씨의 장녀인 정영숙 시인의 추억이 담긴 시를 소개하면서 온수동 마을순례를 마친다. 김양순 기자


온수골

           시인 정영숙


나주시 온수골 140번지

초여름 비 여린 잎 간간히 적시던 날

소달구지 세간 위에

동생과 나란히 앉아 손 꼬옥 붙잡고

버섯 같은 초가집에 눈만 꺼먹이던 곳

병역 기피하신 아버지는 직장 잃으시고

어머니는 논 서마지기

밭 닷마지기 손톱이 닳도록

피땀 적신 곳

동생 얼굴에 버짐꽃 피면

아버지 근심 밭에 작약꽃 붉게 물들고

어머니는 천둥치는 두통에

모리 동여매신 흔적 박힌 곳

뒤돌아보면 고구마 넝쿨 같은 다섯 남매

녹두 씨알 같이 흩어져

아버지와 어머니 서리꽃 앉은자리

배꽃 하얗게 내리면

가끔씩 군내버스 타고 다녀오는

나주시 온수골 140번지


◇ 온수골 이정표(제목 옆에)  

 

 

◇ 마을 이곳저곳을 누비며 마을의 추억과 역사를 떠올리는 정상채 씨.

 

 

◇ 과거 극심한 한발에도 마을 주민들의 식수로 쓰고도 남아 농사를 지었다는 온수샘.

 

 

 

◇ 35년 동안 살면서 5남매를 키웠던 작지만 아늑한 집. 하지만 미래산단에 내주고 나면 어디로 가야할 지 아직도 막막하기만 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