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임 칼럼… 우리말의 즐거움
김현임
어머니는 자랑스럽게 추억하셨다. 당신의 가슴에 묻은 맏아들과의 마지막이 된 날 아침, 밤새 앓던 네 살바기 아이가 방문을 열고 나와 ‘어머이 날이 참 싸락하네’ 하더라고. 우리 형제 넷을 합쳐도 그 하나만 못할 만큼 영특했다는, 본 적 없는 피붙이의 열꽃 피어 들뜬 얼굴에 닿은 ‘싸락하다’는 차가운 아침 기운의 표현이 절로 떠오르는 요즘이다.
며칠 전부터 지인의 배려로 날마다 우리말 편지 메일을 받게 되었다. 사장될 위기에 처한 아름다운 우리말을 새로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그동안 나도 모르게 틀린 어휘들은 얼마나 많았는지 새삼 뒷덜미가 붉어진다.
맨 먼저 등장한 ‘새치름하다’는 ‘조금 쌀쌀맞게 시치미 떼는 태도가 있는 것’이니 어찌 그리 딱 맞는가. 아닌 게 아니라 참으로 새치름하기 짝이 없는 봄의 처사다. 속으론 안 그러면서 짐짓 냉정한 척하는 처녀처럼 아침저녁 꽃시샘 추위로 여전히 봄은 제 따뜻한 성품을 시침 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처음 만난 ‘날떠퀴’란 말도 재미있다. 그날그날의 운수를 이르는 말이니 부디 부디 모두의 날떠퀴가 좋기를 기도하는 마음 속 축원에 슬쩍 끼워 써 본다.
며칠 전 신문에 소개된 돔배기 소재의 맛깔스런 글을 읽었다. 돔배기는 토막 내서 염장한 상어 고기로 전라도 잔칫날의 홍어처럼 경상도의 제사 차림엔 빠져서는 안 되는 제수감이란다.
윗대 한 분이 생전에 돔배기 없이는 수저를 들지 않았기에 대를 이어 상에 올리게 됐다는 까무룩 잊었던 집안 제수에 얽힌 고린 사연을 풀어놓는 글이다.
그 속에 등장하는 뱀뱀이, 씀씀이, 아랫대 같은 토속어들이 너무도 잘 어우러져 먹어보지 못한 유백색 향긋한 돔뱅이의 감칠맛을 더했던가. 읽어가는 내내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이렇듯 편지의 가장 큰 효과는 무심히 넘기던 우리말들이 내 눈에, 내 귀에 반갑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받은 ‘결곡지다’와 ‘드레지다’는 어디에 활용해 보나 두리번댄다. 얼굴 생김새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여무져서 빈틈이 없다는 결곡지다, 사람의 됨됨이가 가볍지 않고 점잖아서 무게가 있다가 드레지다다.
누가 말했던가. 사랑은 너무도 비합리적인 것이어서 수학의 복잡한 수식이나 물리학의 정교한 공식으로도 사랑의 문제를 풀어낼 수 없다고. 지나친 자식사랑도 내 집안 내림이려니 멀리 있어 매양 안타까운 딸에게 어미의 정 듬뿍 담은 덕담으로 결곡지다, 드레지다를 선물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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