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임 칼럼… 수탉
내 성격상 이 백 마리의 닭들에게 빠짐없이 이름을 붙여 줄 것이라는 게 조카의 말이었다. 닭들에게도 그립다는 말을 써도 될는지. 다소곳하고 암팡진 걸음걸이의 암탉들도 그렇지만 벼슬 당당한 수탉의 호기 찬 모습이 눈에 선하니 내 지나친 다정도 병이다.
어쨌든 일찍이 다산선생 양계의 비법을 글로 남기신 바 있고, 시인 김수영도 닭을 키워 문장으로 남긴 바 있으니 나 또한 서툰 솜씨로나마 닭에 대해 서술해 보려한다.
이 글은 웅계오덕문(雄鷄五德文), 이른바 수탉 예찬의 글이다. 다툼으로 떠들썩한 정치판, 흉흉한 경제, 이렇듯 주변 세상의 소음이 시끄러워서인가. 정연한 질서 속에 잘 다스려지는 닭장 속 평화로움에 우선 놀랐다.
문득 떠오른 게 저 묵은 역사 속 오기라는 사나이다. 노나라가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려할 때 그의 아내가 하필 적국인 제나라 출신이라는 점이 걸린다. 천재일우의 기회, 오기는 제 아내를 죽여 노나라에 자신의 충정을 보인다.
이렇듯 출세를 위하여 천정배필의 반려자조차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게 인간 사내들이었다. 복종할 수밖에 없이 만드는 비법, 적지 않은 숫자의 처첩들을 향한 수탉 나름의 고른 애정 분배는 내 어찌 짐작할까만 느긋 태연한 암탉들의 표정에서 유추할 따름이다.
솔선수범, 위험 앞에 제 몸피의 깃털을 있는 대로 세워 대드는 수탉의 위용에 어느 침입자 한 발 뒤로 물러서지 않으랴. 그 용감함이 수탉의 제 일 덕목이다. 그런가하면 아무리 채워도 하루 세 차례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의 허기에 시달리는 그 족속의 특성이었다.
맹목의 허기 앞에서 먼저 암탉들에게, 그 다음은 수하의 졸개들에게 기꺼이 양보했다. 모두의 식사가 끝나기 기다려 맨 나중 제 배를 채우는 그 엄청난 수탉의 자제력에 나는 존경을 보낸다.
또한 살쾡이나 쥐 같은 천적들이 침입 못할 좋은 처소임에도 변함없이 구습대로 첫 관문, 닭장 입구를 지키며 밤새 선잠을 잤다한들 새벽을 알리는 계명성(鷄鳴聲)을 거르던가. 수탉의 놀라운 성실성이다.
어느 덧 더위도 꺾인다. 하절기 양육자의 보신(補身)에 희생당해 닭의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목하 수면인심(獸面人心)이다. 비굴히 물통 뒤에 숨어 연명하는 한 마리 닭에게서 패배에 굴복하는 사나이의 심중을 읽는다.
현실직시, 맞다.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는 왜 그리 힘이 드는가. 한 때 잘 나가던 자신의 과거를 들먹거리는 사내의 얘기는 지루하다 못해 차라리 귀를 막고 거부하고 싶지 않던가. 가시투성이 섶나무 위에 기거하는 나날이건 끼니 삼아 자신의 쓸개를 맛보는 처참함에 빠졌건 사나이는 속마음 꿍꿍 감추어야 한다.
영원한 이인자, 마이너리거로서의 제 삶을 인정하는 저 비굴한 수탉에게서 내가 눈 떼지 못하는 이유다.
수탉이 신에게서 받은 제일 큰 축복은 외양이다. 신언서판이라지 않던가. 솔직히 잘 난 사내만큼 여심을 사로잡는 게 있으랴. 왕관처럼 위풍당당한 벼슬, 상대를 제압하는 부리부리한 눈, 날카롭고 검노란 부리, 쭉 뻗는 건각(健脚),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깃털은 수탉의 두둑한 배짱의 원천이다.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외모 가진 수탉은 자신만만 이웃집 원정에 나선다. 단 한 번 수탉의 추파에 이웃 암탉들이 줄레줄레 따라오는 어느 봄날의 풍경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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