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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이야기

고난을 헤치고 피어난 나주천 부용芙蓉

by 호호^.^아줌마 2009. 8. 6.

아침 출근길,

결국 나주천변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부용에 취해 발길을 멈췄다.

 

"무슨 꽃이 저렇듯 매력없이 크기만 할까?"

탐탁치 않게 여기며 지나치던 것이 며칠 됐다.

 

평소 수풀 사이에 빼꼼히 고개 내민 작은 꽃들에 관심이 많았던 나,

"날 봐라!" 하듯 네 활개를 활짝 펼치고 뽐내는 얼굴 큰 부용에 공연한 심통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한 달전 그 억수로 쏟아지던 폭우에 나주천이 온통 물에 잠겨 초토화되다시피 했던 그 곳,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렇듯 당당하게 꽃을 피워낸 꽃이 아닌가?

 

 

한달 전인 7월 7일 나주천의 모습이다.

성난 황톳물이 거침없이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에

키 큰 부들만이 겨우 고개를 내밀고 아우성이다.

 

이미 부용이며 다른 풀꽃들은

물에 잠겨 세상을 못 본지 며칠 째.

하지만 비가 그치고 물이 빠져

흙투성이가 된 채 모습을 드러낸 그들이

한달만에 이렇듯 꽃을 피워냈다.   

 

 

사실, 그동안 한번도 부용이라는 꽃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없다.

일단 어떤 꽃인지나 한번 들여다 보자.

 

부용[芙蓉, Hibiscus mutabilis]

모습이 무궁화와 비슷하며 관상용으로 흔히 심는다. 키는 1~3m이고, 가지에 별처럼 생긴 털이 있다. 잎은 단풍나무 잎처럼 5~7갈래로 갈라지면서 어긋난다. 꽃잎이 5장인 담홍색의 꽃이 8~10월에 잎겨드랑이에 1송이씩 달려 핀다.

 

열매는 구형의 삭과(蒴果)이고 씨에는 흰색 털이 있다. 중국 및 타이완이 원산지로, 조선 숙종 때 씌어진 〈산림경제 山林經濟〉에 중국에서 부르는 목부용(木芙蓉)이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한국에는 1,700년경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꽃의 색이 아침에는 흰색 또는 연분홍색으로, 점심 때는 진한 분홍색으로, 저녁에는 붉은 분홍색으로 바뀌었다가 시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꽃을 부용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연꽃은 수부용(水芙蓉), 부용은 목부용으로 구분하기도 한다.<다음 백과사전 申鉉哲 글>

 

 

부용을 바라보며 비련의 천재시인 허난설헌을 추억한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바다에 스며들고(碧海侵瑤海)

파란 난새,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芙蓉二七朶)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紅墮月霜寒)

                            <몽유광상산시(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다)>


“올해가 내 나이 스물 일곱이다.

마침 오늘 부용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으니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지었던 시들은 모두 불태워 없애도록 하라.”


그녀는 그 예언대로 그 날, 

초당에 가득한 책들 속에서 향불을 피우고 고요하게 죽었다고 한다.

많은 작품을 생전에 태워버렸으나, 세상을 떠난 후 동생 허균이 이전에 베껴 놓은 것과

기억에 남은 것을 모아 그녀의 시를 《난설헌집》로 펴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난설헌을 좀 더 추억해 보자.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오빠의 배려로 글을 배운 난설헌.

어른이 되었을 때 가난한 집 아씨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서 사회의 불공평을 비평하는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등 다양한 가치관을 표현,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역사학자 이덕일은 허난설헌의 시를 임금노동자는 그가 생산하는 소유물을 갖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비교할 정도로 허난설헌의 재능을 극찬한 바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죽었으며, 오빠 허봉이 정치적인 이유로 귀양 갔다가 유배가 풀린 뒤에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방랑하다 금강산 근방에서 죽고, 어머니가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객사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고, 죽기 얼마 전에는 뱃속의 아기까지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스물일곱의 짧은 생애를 예감한 한 떨기 부용꽃!


“내게는 세 가지 한이 있다.

첫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조선 땅에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다.”


남편과 시집 식구와 조선의 봉건적 사회로부터 소외된 채 시향에 취해 환상의 세계에서 떠돌던 난설헌!

그녀의 절절한 한이 부용꽃 향기에 실려 전해져 온다.

 

 
 

조선중기에 부용(芙蓉)이라는 호를 가진 승려가 있었다.

영관(1485;성종 16~1571;선조 4)이라는 승려다.

8세 때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면서 고기 다래끼를 맡겼더니, 산 것을 모두 물에 놓아주었다. 13세 때 몰래 집을 나와 혼자 덕이산(德異山)에 가서 고행하는 선사에게 의지하여 3년 동안 공부하다가 승려가 되었다.


17세 때 신총(信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위봉(威鳳)에게 선을 배웠다. 그후 구천동에 가서 혼자 집을 짓고 9년 동안 좌선에 열중했다. 1509년(중종 4) 용문산(龍門山)으로 들어가서 조우(祖愚)로부터 선을 배우고, 1514년에 청평산(淸平山)에서 학매(學梅)에게 현미한 뜻을 물었다.


1519년 금강산 세존암(世尊庵)에서 조운(祖雲)과 함께 2년을 지냈으나 결국 미숙함을 느껴 인연을 끊고, 미륵봉 내원암(內院庵)에서 9년 동안 묵언좌선했다.


지리산으로 지엄(智嚴)을 찾아가 20년 동안 가졌던 의심을 풀고, 3년 동안 모시다가 지엄이 죽자 스승을 대신해서 대중을 인도하여 영남과 호남의 대종사가 되었다. 그후 40년 동안 황룡산(黃龍山)·팔공산(八公山)·지리산 등지에 살다가 1571년(선조 4)에 입적했다.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
여덟살 어린 아이가 살아있는 물고기를 가엾이 여겨 물에 놓아주던 그 마음이
바로 부용의 넉넉한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부용이라는 이름의 기생도 있다.

평양기생 부용은 시화금서(詩畵琴書)에 능하고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절개가 곧았다. 한양 안국동의 김유성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뜻한 바 있어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평양에 이르러 부용의 명성을 듣고 시를 써서 전하자 부용은 그를 받아들여, 술상을 차려놓고 시를 주고받으며 밤이 깊도록 논다. 그날 밤 둘은 백년가약을 맺고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이룬다.

 

10여 일 뒤 유성이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부용은  "인간리별 만중에 리별이 더욱 셟다"로 시작되는 〈상사별곡〉을 지어 슬픔을 달랜다. 유성이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평소 부용에게 흑심을 품었던 최만흥이 유성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내나 호랑이가 나타나는 바람에 위기를 면한다.

 

 

 한편, 새로 평양감사로 부임한 이도중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었는데 최만흥이 부용을 추천하여 대동강 뱃놀이에 강제로 참석하게 한다. 부용은 반항하다가 강물에 몸을 던지는데 이날 어부가 고기를 낚다가 부용을 건져 목숨을 구한다.

유성은 부용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긴다.

 

이때 유성의 친구 이몽매가 평안도 어사가 되어 이도중을 처벌하고, 부용은 〈상사별곡〉을 유성에게 보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다. 그뒤 유성은 성천부사가 되어 부용과 함께 부임하고, 우승지가 되어 내직에 들자 이판서의 딸을 정실로 맞아 두 부인과 더불어 행복을 누렸다고 하는 줄거리이다.

 

양반의 자제와 기생이 사랑하여 어려움 끝에 혼인하는 내용이 춘향전과 비슷하나, 연시(戀詩)가 사건 진행에 중요한 구실을 하며, 악인이 복수로 등장하고, 악인이 남자 주인공에게도 해를 끼치며, 그리고 악인의 처벌을 친구가 대신하는 점이 다르다.

 

시로 유명한 성천의 기생 김부용당(金芙蓉堂)이 김이양(金履陽 : 1755~1845)의 첩이 되었던 일을 소설로 꾸민 것이라고도 한다.

 

 

"나도 좀 봐 주오!"

역시 폭우 속에 물에 잠겼다 살아나 꽃을 피운 민들레가 이제 홀씨가 되어 먼 여행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박경중 가옥 앞 남내교 옆에도 부용이 피었다.

저렇게 널짝만한 꽃이 "날 봐라!" 하고 피었는데 무심하게 지나가는 아저씨가 야속하기만한 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