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가을, 첫 여행지는 전주가 됐다.
딸들과 지난 12일 전주를 찾았다.
일 때문에 몇번 다녀오기는 했지만 시가지를 둘러보기는 처음이다.
전주는 나주와 함께 전라도의 근원이 된 고장이다.
하지만 행정의 중심지가 전주와 광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전주, 무안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행정적인 의미의 도청 소재지는 의미가 없어졌다.
다만, 그런 역사와 문화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을 뿐...
딸들아, 전주 가자!
장성 지나는 길에...
우리 엄니 마을계에서 장성댐 구경간다고 꽃단장 하고 나서던 기억이 새롭다.
장성터널 들어가기 직전 소나무 가로수가 정겹다.
정읍 지날 무렵 아이들이 "궁전이다!"
소리쳐 바라 본 숲속의 궁전.
누가 사는 곳일까?
"애들은 못 가는 곳이다"
애들 아빠의 말에 그럼 누가 간다는 것인지...
교회다!
교회 맞지?
전주시내를 한 바뀌 돌다 우연히 눈에 띄어 찾아간 곳이 바로 전주 한옥마을이다.
토요일 오후,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누리예술단이란다.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북쟁이(?)의 소리가 구성지다. 거의 진도 본토 수준이다.
전라도 소리에 남도와 북도의 경계가 있었던가?
다만 계파(유파)의 소리에 약간의 차이날 뿐이라고 나름 정리해본다.
검술녀의 공연에 일순 긴장감이 감돈다.
주말 오후 한옥마을 공연장을 찾아 여유와 풍류를 즐기는 전주인들의 모습이 남도와 다르지 않다.
전주 한옥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심 속에 잘 보존된 약 700여채의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을사조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란다.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반발한 전주민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서양풍의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전주한옥마을, 이제 국제 슬로시티로
전주한옥마을이 한국 전통문화의 수도를 자임하며 슬로시티 가입을 선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아시아 최초로 지난 2007년 12월 신안 증도와 완도 청산도, 담양 창평 삼지천 마을, 장흥 장평.유치가 슬로시티로 지정됐고, 지난 2월 경남 하동 악양면이 가입돼 모두 5개 지역이 슬로시티로 지정돼 있다.
전주시는 한(韓)스타일 콘텐츠 등 가장 한국적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을 국제적 관광명소로 브랜드화 하기 위해 슬로시티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한옥마을 입구 경기전에 세워져있는 하마비.
전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614년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써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져 있다.
특히 경기전 하마비는 비의 내용뿐만 아니라 받침돌이 특이함 판석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형태로, 서울 종묘 등 다른 하마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상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이야기 따라 전주 한옥마을 한바퀴 돌아보자!
전동성당이다.
전주 한옥마을 맞은편에 세워진 전동성당은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호남 전체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다.
영화 ‘약속’에서 전도연과 박신양이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 곳.
원래 전동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풍남문의 밖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고산 윤선도 6대손)을 비롯하여 그의 외종형 권상연과 유항검 등 호남 지역의 많은 천주교 신자가 참수당한 순교한 자리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면서 개항지가 아니었던 전주시에도 선교사가 들어왔으며, 1891년에는 전주성당 (현재의 전동성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가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다.
전동성당은 호남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며,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당 내부의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성당을 착공한 1908년에는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일본제국의 통감부가 전주읍성을 헐었기 때문에, 성당의 주춧돌은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돌을 이용하였다.
또한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 또한 전주읍성의 성벽에서 나온 흙을 이용하여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직접 구워 사용하였다.
나머지 석재와 목재들은 각각 익산시 황등면의 채석장과 승암산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1908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1년에 최종 완공되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성지순례객으로부터 전동성당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에 전주읍성 주변에 신자는 거의 없었고, 주로 산골인 대성리 등에 신자가 밀집해 있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신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한다.
따라서 기존의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1908년 명동성당의 내부를 건축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됐다. 성당은 1914년에 비로소 외관 공사가 끝났으며, 이후로도 계속 공사가 진행돼 1931년에 완공돼 그 해 6월 18일 축성식을 가졌다. 1981년 9월 25일에 사적 제 288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지난 5월, 대한민국의 일부 기독교 교회가 사회봉사보다는 외연적 성장에 치중하는 것에 분노한 20대 청년 2명이 건물 정문에 반 기독교적 낙서를 했다가 붙잡혔다는 안타까운 얘기도...
전동성당 뜰에 핀 꽃. 다알리아도, 메리골드도 아닌 백일홍입니다.(풀무치님 감사 ^.~)
꽃길을 따라 거리를 걷는데
자연석으로 된 도로가 여유를 준다.
전봇대와 전선이
모두 지중화된 덕분인지 거리가 깔끔하다.
자연이든, 문명이든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거미줄 같은 전깃줄에
자유로운 공간이 드문데
하늘을 가리는 전봇줄 없는 풍경이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가을볕이 제법 따가운 오후,
아이를 무등 태워 거리를 활보하는 부녀(父女)를 보라.
도심 한 가운데에서 누릴 수 있는 고도(古都)의 한적함에서
전통과 문명이 공존하는 전주의 가치를 새삼 느낀다.
추억의 뽑기게임에 거금 3천원을 날린 딸들.
한번에 천원 걸고 뽑기를 하는데
피래미 수준의 붕어엿 한 개를 얻었다.
전주 비빔밥 유감
전주 하면 비빔밥이다. 나주하면 곰탕이듯...
피자를 먹자는 아이들을 반 협박으로 구슬려 전동성당 앞에 있는 비빔밥집을 갔다.
바로 옆에서 공연이 한창이고, 서둘러 밥을 먹고 주변을 둘러볼 요량으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은 결과다.
그런데 건물 겉모양과는 달리 식당풍경이 전혀 전주스럽지가 않다. 그냥 시골 자장면집 수준이다.
바깥전망이라도 보자 하는 마음에 2층으로 자리를 잡으려고 했더니 거긴 단체손님만 받는단다.
계단 오르내리기 귀찮다는 표정이다.
전주비빔밥, 비빔밥은 늘상 즐겨먹는 메뉴지만 전주에서는 처음이다.
8천원, 나주 보다는 2천원이나 비싸지만 그래도 본토의 맛을 즐겨보자.
하지만 꿈을 곧바로 깨졌다.
다 식어버린 시래기 된장국, 그 것도 그릇의 바닥만 겨우 채운 정도...
반찬, 배추김치 대여섯 가닥, 멸치와 가지나물, 또 다른 반찬 두세 자밤,
명색이 비빔밥인데 참기름, 고추장도 없이 멀건 밥을 내놓는다.
참으로 거시기 하더라는...
점심과 저녁의 중간 시간이라 손님이 뜸했지만 그래도 전주에 왔으니 비빔밥이나 먹자 하는 손님이 두 셋 더 왔다.
그런데 손님을 받아놓고 무슨 잡담들을 그렇게 하는지,
나오면서 언짢은 마음에 일부러 잘 먹었다는 인사를 안 하고 나오는데 ‘잘 가라’는 인사도 안 한다.
뒤통수가 싸~한 느낌 ㅜ.ㅜ;;
그렇게 좋은 목에서 식당을 운영하려면 종업원이나 주인장이
좀 더 전주사람다운 면모를 갖췄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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