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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여행기

선비 배출의 산실 나주향교의 가을

by 호호^.^아줌마 2009. 11. 16.

 

 선비 배출의 산실 나주향교(鄕校)

 

  

 

나주시 교동32-3번지에 소재한 선비다운 선비들을 배출했던 조선시대 유교교육의 산실.

 

지금은 국도13호선이 허리를 끊고 지나가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금성산 장원봉 끝자락에는 향교만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서, 조선시대 읍성 서문을 드나들던 백성들은 성문보다 먼저 만나게 되는 향교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외삼문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이곳은 공자님의 위폐가 모셔진 곳이기 때문에 모두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고 정숙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나주향교는 옛날 나주읍성 4대 성문 중 서쪽 성문 그러니까 서성문밖에서 20m 정도 거리에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서무, 동•서재, 사마재, 충효관, 그리고 나주향교와 관련된 여러 비(碑) 등을 볼 수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 사학인 서원과 달리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국립교육기관. 지금의 지방에 위치한 국공립중등학교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신록지리지에는 전국에 329개의 향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 남한에 231개소가 남아있고, 광주 전남에는 29개소가  남아 있다.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향교도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서무와 동재(東齋)·서재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類)를 두었다.

 

 

 

또 하나 전하는 바로는 대성전 창건 당시 목수는 모두 중국에서 왔다하며, 앙토와 벽토에 쓰인 흙은 공자의 고향이었던 산동성 곡부에서 들여왔다한다. 그 때 발랐던 흙이 고스란히 남아있을지는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기에 단정지을 수는 없다.


나주향교는 석전대제를 행할 수 있는 월대가 설치되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양식이 함께 있는 건물로 대성전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은 가까운 사찰인 창건당시 내부에 계성사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고, 이로 인해 향교의 배치방법이 다른 향교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배움의 공간을 앞에 두고, 뒤에 제사공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계성사가 있기 때문에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가 바뀐 전묘후학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호남지방의 향교 중 계성사가 있던 다른 향교는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으로 알려져 있다.  

 

 

 

동무 건물 옆에 우뚝 솟아있는 향교의 교목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이나 되어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은행나무 아래에서 가르쳤다 하여 행단이라 한다. 

 

대성전 처마

 

 

대성전의 건축양식이 조선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주향교 대성전은 건물크기나 모양이 대성전 중 으뜸으로 치며 유교건축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향교는 대성전과 좌우 동무와 서무에 모신 성현들의 위패 수에 따라 대설위, 중설위, 소설위로 나뉜다. 이것은 향교의 규모와 관련이 있다.

 

나주향교는 원래는 대성전 중앙에 공자, 좌우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5성(聖)의 위패를 봉안하고 그 아래로 공자의 제자인 10철(哲)을 모셨으며, 송조 6현(賢)과 동무와 서무에 우리나라 18현(賢) 등 39위(位)를 봉안하였으나, 1910년 이후, 10철과 송6현 중 소옹과 장재를 제외하고 27 위(位)를 대성전에 봉안하고 매년 2월과 8월에 석전대제를 행하고 있다. 그만큼 다른 향교에 비해서 규모나 위상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부(府) ·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나주향교는 창건연대나 창건이후의 자세한 사정을 알려줄 만한 자료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려 성종 6년(987)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설치되어 조선 태조 7년 (1398) 문묘와 학교를 크게 짓고 교수가 배치되어 학생 90인을 관비로 숙식시키며 나라의 인재를 가르쳤을 것으로 짐작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나주목(羅州牧)은 전주부(全州府)에 이은 호남의 두 번째 순위(順位)의 고을이었으므로 향교의 규모도 컸다. 그래서 강릉, 장수, 영천향교 등과 함께 조선시대 중등교육을 관장하던 향교 건축을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인데, 나주향교가 다른 향교와 다른 점은 건물의 배치방법(配置方法)이 서울의 문묘(文廟)와 같은 형식인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문묘인 대성전이 강당인 명륜당의 앞에 있는 형태라는 점이다.

 

아울러 다른 향교의 경우 대성전의 규모가 보통 맞배지붕에 정면 3칸인데 반해, 나주향교는 정면 5칸에 측면4칸의 건평87평 단층 팔작지붕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지방의 많은 향교들이 취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와 다른 배치형태로 나주향교가 태학인 성균관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성균관  대성전을 다시 지으면서 나주향교 대성전을 보고 지었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된다.

 

그리고 보통은 외삼문-대성전-내삼문-명륜당 아니면 외삼문-명륜당-내삼문-대성전의 형태인데 나주향교는 외삼문과 내삼문이  중첩되어 있고, 보시는 것처럼 외삼문-대성전-협문-명륜당이 배치되어 있 는 형태를 취하고 있음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명륜당 후원

 

명륜당은 지금으로 말하면 학생들이 수학하던 교실과 같은 곳.

현재 동익랑과 서익랑이 완전하게 보전된 삼헌(三軒)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나주의 객사건물이었던 금성관의 동•서익헌과 달리 익사의 높낮이를 맞춰 하나의 건축물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뒤에 유생들의 장원을 기원하는 나주의 진산 금성산의 장원봉 산자락아래 자리한 명륜당은 풍수상 유생들이 강한 기를 받도록 배치돼 있다.

 

 

 

동재와 서재. 동재(東齋)는 상급생 또는 양반자제 숙소로써 학동의 수가 많지 않을 경우에는 훈장을 비롯한 스승이 기거하는 곳이며, 서재(西齋) 는 하급생이나 평민자제 들의 숙소 즉,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곳이다.

 

동•서재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동재•서재 모두 11칸 건물로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부와 목에 설치된 향교는 유생들을 90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주는 전라남도의 목이었으므로, 천년 목사고을의 향교답게 유생의 수와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으며, 나아가 나주향교가 명실공이 선비다운 선비들을 배출해 내었던 산실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서재 후원 

 

금성별곡(錦城別曲):성종11년(1480년) 박성건이 지은 전6장의 경기체가로 나주의 경관 및 관련 유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제1장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海之東 湖之南 羅州大牧   해지동 호지남 나주대목

錦城山 錦城浦 桓古流峙   금성산 금성포 환고류치

爲 鍾秀人才 景幾何如     위 종수인재 경기하여

千年勝地 民安物阜(再唱)   천년승지 민안물부(재창)

爲 佳氣憁籠 景幾何如     위 가기총롱 경기하여


바다의 동쪽인 해동·湖의 남쪽인 호남의, 나주는 큰목사가 다스리는 고을로,

錦城山이 우뚝 솟고·錦城浦로 흘러가는 물과 함께 영원히 변함없는 산천이로다.

아! 빼어난 재주있고 놀라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아득한 옛날부터 경치좋고 이름난 곳,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은 물산이 풍성함이니,

아! 아름다운 서기가 푸르고도 성한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향교 안에 이런 아담한 연못이 있는 것도 나주향교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연못은 아마도 열심히 공부했던 유생들이 이 연못에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더욱 마음을 다잡아 선비로서의 인격과 학문수양에 정진하게 하는 역할을 했지 않았을까 싶다. 또 하나는 향교에 불이 났을 때 비상용 방화수로 쓰려고 연못을 만들어 놓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나주향교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일이 두 가지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박성건의 ‘금성별곡시비’. 이 비(碑)는 조선 성종11년(1480년) 나주향교의 교수였던 박성건이 금성교수로 있을 때에 그의 생도 10명이 한꺼번에 생원과 진사과에 급제하는 경사를 맞아 이를 축하하며, 전6장으로 된 ‘금성별곡’이라는 경기체가를 남겼는데, 이를 기념해 세운 비(碑)가 바로 ‘금성별곡시비’.

 

또 하나 눈에 띄는 비석은 ‘충복사유허비(忠僕祠有墟碑)’.

이 비(碑)는 나주향교의 노비 우두머리였던 김애남이 정유재란 때 대성전에 모셔진 위패를 모시고 금성산으로 피신, 목숨을 걸고 지켰다하여 나라에서 그 정신을 기리는 충복사라는 사우를 세웠는데, 지금은 훼철되고 유허비만 남아 있다.

 


당시에는 소과시험이었던 생원과와 진사과를 이곳 나주향교에서 치렀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진과에 합격하게 되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계속 정진하였으며, 그렇지 못한 경우는 사마재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현재 나주향교에서는 전교를

중심으로 충효관에서 성년예식

즉, 관례와 계례를 행하고 있고,

방학 때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문강좌와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