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꼭 가보고픈 내고향 경현동 금성산의 다보사
다보사는 내가 나고 자란 나주시 경현동 뒷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사찰이다.
신작로 길로 걸어서 40여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를 통학하는 길에 가끔 검정색 짚차를 탄 주지스님이 차를 태워주던 기억이 아련하다.
평소에는 '중중 때까중....'이라며 스님을 놀려먹던(?) 녀석들도 그럴 때만큼은 대자대비 부처님의 은공에 고개를 숙였던...
그때는 다보사가 나주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저 평범한, 아담하고 조용한 사찰이다. 아니, 예전에 없던 건물들이 들어서 절 규모는 더 커졌지만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이 줄어들었달까?
사월 초파일 무렵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동네까지 북적이던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나주 시내와 그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금성산 깊은 곳에 자리한 탓에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금성산 산책로로 이어져 가끔 주변을 지나면서도 들러본 지가 꽤 됐다.
하지만 어릴적 눈이 많이 내린 날 아침 일찍,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그 가파른 길을 일부러 찾아가 걸었던 추억은 나만의 기억이기도 하다. 가끔 노루가 지나간 자국, 토끼의 방정맞은 걸음걸이, 때로는 정체불명의 큼직한 발자국까지...
금성산 남쪽자락에 위치한 다보사는 백양사(白羊寺)의 말사(末寺)에 속한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다보사의 창건과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시대인 661년(문무왕 1)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1184년(고려 명종 14)에 지눌이 중창을 한 이래 1594년(조선 선조 29)에 서산대사 휴정이 다시 중창하였으며 현재 보이는 사찰의 주요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일제 침략 때는 총독부의 대처승 제도 실시에 따른 박해를 피해 비구니 스님들이 은거ㆍ수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꽃살문, 영원히 지지 않을 꽃이다.
기와로 길을 낸 길을 따라 대웅전으로 향하다 두말 할 것 없이 꽃살문에 눈이 간다. 쌍여닫이 빗꽃살문에 정교하게 조각된 문살이 아름답다.
꽃살문이라는 시를 쓴 이정록 시인은 “내소사 꽃살문을 만난 지, 십 년이 되었다. 꽃살문의 꽃송이를 원고지의 붉은 문장에 옮기는 사이, 꽃잎 위에 나이테가 열 두 바퀴 더 돌았다. 서둘러 피우지 않았다”고 했다.
어디 서두르지 않은 것이 시인뿐이겠는가. 꽃살문을 하나하나 아로새긴 이의 정성이야 말로 서두름이 없었을 테다.
명부전, 칠성각 앞 화단에 노랗게 피었던 수선화 그 자리에 눈꽃이 하얗게 피었다.
경현동 초입에 있는 한수제.
원래는 저 저수지 한가운데로 길이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저수지를 만들고 오르쪽으로 신작로를 만들었다.
마을을 막 지나 월정산장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사로 이어지는 길에 이른다.
금성산 등산로와 생태물놀이장이 개장하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일부러 산사를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비포장 도로라 오르내리기가 꽤 고역이었던 길인데
콘크리트 신작로가 나면서 차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냥 걷는 즐거움, 아는 자만의 특권이리라.
올 겨울은 눈이 더디다.
아직 눈옷 입은 나무를 보지 못했다.
눈 오는 날 한번 꼭 걸어가 보고 싶어라.
겨울나무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다.
겨울나무
이원수 작사, 정세문 작곡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던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전남 나주시 경현동 629번지 금성산 남쪽 깊숙한 골짜기에 터를 닦은 다보사는 신라시대의 창건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금성산 산중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칠보로 장식된 큰 탑이 땅 속에서 솟아나오고 그 탑 속에서 다보여래가 출현하는 꿈을 꾼 뒤 절을 세웠고 절 이름도 꿈속의 다보여래에서 따 와 다보사로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 때에는 보조 지눌스님이 1184년에 중건하고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1568년에 중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말에는 다시 대웅전·명부전·영상전·칠성각 등이 중수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현재 다보사에 남아 있는 현판들과 유물들을 살펴보면 1878년에서 1881년 사이 3년 동안 새롭게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절에서도 대웅전 뜨락에 많이 보이던 파초는 이제는 거의 다 잘려지고 몇 군데 사찰에만 남아있는데 다보사에서는 잘 관리해 오고 있어 옛 절의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다.
대웅전이라고 쓴 한문 현판은 특이하게도 전서체로 쓰여 있다. 전통사찰에 이처럼 쓴 대웅전 현판은 이 다보사가 유일한 사찰이 아닌가 한다.
또 정면의 기둥과 기둥을 이어주는 창방, 곧 어간문(스님들만 드나들 수 있는 정면의 가운데 문) 양쪽의 문짝틀 위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한 굵은 목재에도 화려한 꽃문양을 조각하여 대웅전 외부를 장식하면서 정면 3칸의 창호 문살도 전부 정교한 꽃살문으로 조각하였다. 이는 부처님을 찬탄하며 꽃공양을 올리는 경배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지극한 신심의 표현이라 하겠다.
대웅전 바깥벽에는 7층으로 보이는 탑이 4점 구름 위에 그려져 있는데 탑 주위에는 천인들이 날아다니고 스님들이 탑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도 보인다. 이는 다보사 창건과 관계있는 그림으로 보여지는데 확실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안에는 옷자락을 양 어깨에 덮은 통견차림의 단정한 부처님 세분이 나란히 앉아있다. 가운데 앉으신 분이 석가모니불이고 양 옆이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다. 원래의 양식에서는 석가모니불과 문수·보현보살이 안치되어 있어야 하지만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다. 7년 동안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는 극락으로 가셔서 복된 삶을 사시라고 아미타불을 모시고 몸을 다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약사여래불을 같이 모셨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것이고…이런 연유로 임진왜란 이후에는 대웅전에 석가여래불을 주존불로 해서 아미타불·약사여래불을 같이 모시는 양식이 나타났고 또 이런 양식의 대웅전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삼존불을 삼세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약사여래불은 지난 세상의 부처님이고 석가모니불은 지금 이 세상의 부처님이며 아미타불은 죽은 뒤에 만날 수 있는 미래의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세상의 부처님 이 3가지 세상의 부처님을 압축해서 삼세불이라고 부른다.
대웅전 수미단은 상·중·하단을 갖춘 형식에 보단을 설치한 구조이다. 중대 가 이단으로 되어 있어 운흥사 수미단과 같다.
정면의 폭이 317cm이고 측면은 142cm이다. 상대까지의 높이는 89cm, 보단은 26cm로서 전체 높이는 115cm이다.
하대는 지대목이 없이 기다란 족대 3칸을 설치하였고 족대 사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높이가 22cm에 이르러 수미단을 듬직하게 받치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중대는 이단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쪽 하단은 5칸, 위쪽 상단은 6칸으로 나누었는데 칸 사이는 둥근 막대기형 동자목을 세웠다.
중대 하단은 모란 화병이다. 작은 화병에 꽂힌 모란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위와 양쪽으로 뻗어나가며 탐스런 모란꽃 세 송이를 활짝 피웠다. 아직 피지 못한 모란 꽃송이 여섯 개는 청판 내에 구석구석 배치되어 빈 공간이 별로 없다.
하대 5칸의 기본적인 구도는 전부 같으나 꽃잎과 이파리의 색깔과 색감이 조금씩 달라서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얇은 나무판에 얕게 조각하고 빈 공간을 전부 따낸 투각기법을 써서 깊은 맛 보다는 가볍고 화려한 느낌을 많이 준다.
중대 상단은 매화꽃을 3칸, 연꽃을 3칸씩 장식하였다. 하과 마찬가지로 청판 내에 음각된 직사각형의 구획을 정하고 그 안에 꽃문양을 조각하면서 빈 공간을 투각으로 따내었다.
상단 왼쪽부터 첫째 칸에는 수미단에서 보기 드문 매화꽃을 조각하였는데 아래쪽에서 뻗어 올라온 매화가지 줄기 끝에 매화꽃이 겹쳐서 피었고 위쪽에는 피어나는 꽃송이 2개도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구도의 매화꽃은 셋째, 다섯째 칸에도 똑같이 나타나 도상화된 판박이의 느낌을 준다.
두 번째 칸에 나타난 연꽃도 마찬가지다. 아래쪽에서 올라온 연꽃줄기가 위쪽에서 탐스런 연꽃 세 송이를 피웠고 아래쪽에는 꽃봉오리 4개가 자리 잡았다. 연잎은 양쪽 끝에 활짝 핀 모습으로 비스듬히 서 있다. 이런 구도는 넷째, 여섯째 칸의 연꽃에도 똑같이 나타나 매화·연꽃이 번갈아 등장하도록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매화나 연꽃도 색깔이나 퇴색된 색감이 조금씩 달라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상대 위에 설치된 보단은 7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각 칸의 조각이 음각이나 양각을 한 것이 아니라 평면의 나무판을 꽃문양을 따라 투각하고 꽃과 줄기를 선으로 긋고 색칠하여 크게 눈여겨 볼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양식도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므로 기억해 둘 만 하다.
현재 다보사가 소유한 문화재 중에는 보물 제1343호로 지정된 괘불이 있다. 본래는 같은 금성산 내 보흥사에서 조성된 괘불인데 영조 21년(1745년)에 바로 운흥사 출신의 의겸스님이 9명의 스님들과 함께 그린 것이다. 곧 운흥사 소장 괘불들이 1730년에 그려진 것이므로 그로부터 15년 뒤에 의겸스님은 이곳에서 다시 괘불을 그려내었던 것이다.
괘불의 크기는 길이 1150cm, 폭이 754cm로서 운흥사괘불과 같이 대형불화에 속한다. 또한 다보사 경내에는 이 괘불을 걸만한 장소나 괘불대 등이 남아있지 않아 다른 사찰에서 옮겨온 것이 확실하다.
가운데에 서 계신 본존불은 석가모니불로 머리 뒤에 키처럼 생긴 광배가 있으며 몸의 색깔은 흰색이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세 가지 특징은 의겸스님의 불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존불 양쪽에 그려진 보살은 문수·보현보살로 화려한 보배로 장식된 관을 썼고 머리 뒤로는 둥근 광배가 그려졌다. 영조·정조시대의 문화부흥기에 나타난 불화들은 그 기법이 섬세하고 화려하며 진한 녹색을 바탕으로 하는 특징이 잇는데 이 다보사 불화도 광배·빈 공간·옷의 선·연꽃줄기 등이 모두 같은 녹색이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문수·보현보살의 머리 광배 뒤쪽으로는 관세음보살·아미타불·다보여래불·대세지보살이 두 분씩 나뉘어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다보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고종 21년(1884년)에 중수된 건물로 원래는 나주시 문평면의 신로사에 있었던 것이다. 신로사가 폐사되면서 옮겨온 건물이며 안에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아담한 건물로 중앙계단 양쪽으로는 파초 2그루가 운치 있게 자라고 있다. 조선시대의 그림이나 시에 자주 등장했던 파초는 그만큼 많이 기르던 화초이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식물이 되었다.
다보사 대웅전은 삼세불의공덕을 찬탄하며 꽃공양을 올리는 신도들의 신심을 조각으로 나타낸 건물이다. 정면 문짝의 꽃살문과 창방의 모란꽃 조각, 수미단의 모란·연꽃·매화꽃은 이런 마음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런 꽃들이 도안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다보사 수미단의 특징이며 특히 조선시대 선비들의 상징이었던 매화가 등장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는 곧고 바르게 살라는 정신의 가치를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병에 꽂힌 모란꽃 가지에서 꽃을 피운 것도 기발한 발상이며 매화가지나 연꽃줄기가 아래에서 올라와 꽃이 핀 스타일을 반복 구상한 것도 다보사 수미단의 특징이다.
<자료 : 한국불교 목공예의 정수 수미단 http://sumidan.culturecontent.com/temple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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