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香) 깊은 심향사(尋香寺)...은은가피(加被)
연 나흘째 계속되는 겨울비가 봄을 재촉한다.
무지크바움 조기홍 대표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천년고찰 심향사(尋香寺) 경내에 낙숫물이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작은 물방울 하나에서 시작된 동그라미가 또 하나의 동그라미를 그려내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공그라미가 그려진다. 그러면서 처음 동그라미는 사라지고 또 다른 물방울에 의해 그려지는 동심원들...
간혹 생겨난 물거품은 커다란 타원을 그리며 생성됐다가 이내 터지고 그 남은 자리에 다시 동심원이 그려진다.
지난해 여름 이 절을 방문했을때 한번 먹어본 적이 있는 그 사찰음식으로 점심을 대접받고 당연한듯 차 한 잔을 기대하고 있는데 조기홍 대표가 난데없이 커피를 찾는다.
웃었다.
절에서 커피를 찾다니...
예전에 백련차를 마시면서 "이 거이 뭔 맛이오?" 하던 그가 아닌가?
절밥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안 어울린다는 생각,
절이니까 차를 마신다 하는 것 역시 틀에 박힌 생각의 한 조각일 뿐이다.
우물에서도 숭늉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원광스님이 여지없이 보여주셨다.
바리스타 원광스님
손수 커피 분쇄기에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대구에 있는 커피명가에서 직접 볶아 보내준
동티모르産 커피라 한다.
향이 은은한 게 창문 창호지 너머에서 들리는 빗소리, 빗내음과
참 잘 어울리는 香이다.
함께 한 이들은
저 안쪽에 무지크바움 조기홍 대표
왼쪽에 사진작가 박하선 씨와 김미현 씨 부부
오른쪽 원광스님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나.
다들 자신의 신분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놓고 사는 것 같다.
누가 누구라 알려주지 않아도 '딱' 보면 알 것 같지 않은가.
커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은 커피 본연의 맛.
커피를 많이 마시는 딸을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천 번의 키스보다 멋지고 마스카트의 술보다 달콤하다. 혼례식은 못 올릴망정, 바깥출입은 못할망정, 커피만은 끊을 수 없다"고 했던 바흐의 '커피칸타타' 주인공이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애호가로 알려진 고종황제.
1895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처음 커피를 마시게 된 뒤로 커피에 심취하게 됐다는데, 한 나라 국왕의 권위가 외세에 의해 짓밟히고 나라의 안위가 송두리째 위협당하는 현실 속에서 커피야말로 현실을 대신해 주는 씁쓸한 맛이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얘기 끝에 사향고양이 커피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자 스님은
집무실 뒷방으로 들어가 한참이나 부스럭부스럭 하시더니바로 사향고양기커피(☞☞)를 내오신다.
사향고양이가 커피열매를 먹고 채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배설한 커피라 한다. 희귀한 만큼 무척이나 비싸다는데 그 맛이 별다르겠는가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꼭 한 잔 마셔볼 궁리가 시작됐다.
처음 만난 박하선 씨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분명 어디선가 봤다고 생각했는데 얘기를 들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의 사진전을 몇 번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아마도 광주 금남로1가 옛 전남도청 앞에 있던 남도예술회관이었던 것 같다. 중국 유목민들과 티벳 오지마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와글와글 들려오는 듯하다.
광주 출신의 박하선(56)씨는 9년여의 항해사 생활을 바탕으로 1980년 '대양'展을 시작으로 '실크로드'(1990), '티벳'(1991) 등 십여 차례의 개인전과 수 차례의 그룹전을 가진 바 있다.
지금은 프리랜스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그의 작품은 다큐멘터리 전문잡지를 비롯, 여러 간행물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1999년 첫 작품집 '삶의 중간보고서'(커뮤니케이션즈 와우 刊)를 간행한 바 있다.
특히 그의 작품집 '천장(天葬)'은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사진 컨테스트 2001 World Press Photo의 Daily Life Stories 부문에서 한국 최초로 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World Press Photo는 매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사진 컨테스트로, 사건 현장, 스포츠, 인물, 과학 등 전 분야에 걸쳐 2,000여 명의 사진기자, 프리랜스 사진가 등이 경합을 벌이는 최고 권위의 컨테스트이다. 각 부문별 World Press Photo 수상작들은 세계 40여 개국에서 순회전시 된다.
실제 박하선 씨의 얘기를 통해서 느낀 바는 그렇다.
지구촌 어느 한 켠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낮춰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남루하지만 어디에서건 미소를 잃지 않는다는 것. 문명보다 자연에 더 가까운 오지 아이들의 미소가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원초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얘기다.
커피와 차와 오지마을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던 중에
종교와 정치얘기,
업보에 대한 얘기,
향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박하선 작가가 이란을 여행한 사진집을 내려고 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그 쪽을 여행하려는 사람들이 적어
선뜻 책을 내자고 제안해오는 출판사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티벳이나 이란, 이라크쪽 여행객들이 제법 많아
이런 책들이 길라잡이 역할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녹록치 않다는 것.
그러면서 지금 정부가 기독교정부가 되다보니
사업 지원을 받는 게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인 나,
아무말 않고 듣고만 앉아있다.
변명할 구실이 있어야 말이지...
이야기 끝에 원광스님이 '은은가피'란 얘기를 한다.
가피라...
오래전에 읽은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벌교 땅에 그나마 뿌리내리고 살게 된 것도 모두 선암사 부처님의 가피 덕이라는 것을 하대치에게 일깨웠다.' 하는 대목을 보고 가피가 뭘까 해서 찾아봤던 적이 있다.
가피(加被)... 불교에서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주는 것을 그리 말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커피향이 혀끝에서 사라질 즈음, 스님은 차를 우려내신다.
커피맛에 이어지는 차맛, 전혀 거리낌이 없다. 아니, 오히려 묘한 어울림이다.
오늘 박하선 선생의 발걸음은 심향사의 사계를 사진으로 엮어보는 계획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 했다.
그러면서 다음달에는 이 곳에서 봄을 맞이하는 음악회를 열 계획이란다.
"불교가 대중들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니 좋습니다" 했더니
"원래 부처는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답하시는 원광스님.
'수행은 실제 경험하지 않고는 맛볼 수 없는 경지'라는 스님의 말에서 종교의 궁극적인 본질은 닮은꼴임을 공감한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던 대화는
끊임없이 울어대는 전화기 때문에 끝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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