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烈女), 면류관 보다는 도움을 주라
열녀(烈女), 조선시대에 절개가 곧은 여자를 이르던 말이다.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서 한 남자만을 섬기는 절개를 꼽았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편이 죽은 후 오랜 세월 고난과 싸우며 정절을 지키거나 죽음을 무릅쓰고 정조를 지켰다.
열녀 중에 도미(都彌)의 아내가 있다. 도미의 아내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왕이 도미를 불러 “너의 아내가 아무리 정절이 강하여도 어두운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묻자 도미는 “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확언했다.
이에 왕은 도미를 잡아놓고, 그의 집에 가서 도미의 아내에게 자신과 도미가 내기장기를 두어 도미가 져서 여인을 자신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속이고 난행하려 했는데 도미의 아내가 몰래 비자로 하여금 수청들게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나중에 왕이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의 두 눈을 빼고 작은 배에 실려 보내고 그 아내를 궁으로 끌고 와 겁탈하려 하자 도미의 아내는 몸이 더럽다는 핑계로 잠시 빠져나와 달아났다.
그 아내가 강어귀에 이르렀을 때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홀연히 한 척의 배가 나타났다. 그 배를 타고 작은 섬에 이르러 남편과 상봉하고 풀뿌리를 캐어먹으며 연명하면서 객지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자기 살을 베어 남편을 살리고 남편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혼례 전일지라도 혼인약속을 굳게 지킨다. 소박을 당하고도 남편만을 생각하며 정절을 지키다가 죽어 원귀가 되기까지 한다. 그러한 미덕에 하늘의 도움이 없을 리 없으므로 개가하지 않고 늙은 시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는 청상과부를 호랑이가 도와주고, 익사한 남편을 따라 물에 뛰어든 과부를 수신(水神)이 도와서 남편의 시신을 안고 떠오르게 한다.
이런 이야기까지는 그래도 미담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식을 죽여서 남편을 살리고, 남편 죽인 원수의 아내가 되었다가 복수하고, 남편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허락하는 처절한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정절이 아름답고 귀한 덕목인 만큼 지켜지기 어려운 세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제39회 어버이날을 맞아 국민포장을 수상한 봉황면의 홍춘자(44)씨. 교통사고로 전신불수(뇌병변1급)가 된 남편을 14년 동안 수발하며 홀시어머니 봉양과 집안 살림 벼농사, 배농사를 지으며, 오갈 곳 없는 조카까지 입양해 4남매를 키워낸 열녀다.
하지만 정부포장까지 받은 그녀에게 돌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시어머니 앞으로 번듯한 집 한 채가 있다 해서 기초생활수급자 지정도 안 되고, 자녀들 학비지원 혜택도 없다. 이미 통나무처럼 굳어버린 남편이 휠체어라고 탈 수 있도록 재활치료를 받고 싶지만 그것도 마땅치 않다.
고3, 중3, 초등학교 5학년인 자녀들이 학원을 다니고 싶다 해도 엄두도 못 내고 인터넷이 고장 나 성화를 부리는데도 손쓸 방도가 없다. 무엇 보다 치아가 안 좋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먹는 것조차 맛을 모르고 먹는 상태인데도 올 가을 농사나 끝나야 치료를 할 수 있겠다며 애써 웃음을 짓는다.
연암 박지원은 만년에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에서 여성에게 강요된 ‘열녀’라는 윤리의 부당성을 제시하며 서민들까지 순사(殉死)하는 당시의 풍속을 통렬하게 꼬집었다.
열녀라는 면류관을 씌워 주느니 차라리 그들의 양 어깨에 지워진 생계유지와 부모공양과 자녀양육이라는 등짐을 덜어주는 것이 진정한 이 시대의 포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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