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1월의 나라사랑 인물
<애국선열>
나주 출신 의병장 조정인 선생(1872. ~ 1909. 1. 18)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한양, 조삼원(趙三元)의 장남으로 1872년 나주군 서부면 명당거리(현 나주시 산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 일찍이 장수감으로 지목되었으며 장성하여서는 넉넉한 가세에다가 미곡상을 경영하여 재력이 있었다.
1907년 정미7조약에 이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더 이상 일제의 만행과 내정간섭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호남창의대장 기삼연(奇參衍)을 비롯해서 특히 나주 출신인 김태원(金泰元)과 뜻을 같이하여 1907년 12월 6일부터 의병 수백 명을 총기 4백여 정으로 무장시켜 나주·함평·장성 등지에서 일본군 및 경찰을 상대로 많은 전투를 치뤄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 호남창의소의 활동이 약화되고 동년 4월 김태원 의병장마저 송정리 부근 어등산에서 전사하자, 독자적으로 항일의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나주 가산(현 광산구 삼도면 대산)에 탄약제조소를 만들어 무기수급에 만전을 기하였다.
1908년 6월 새벽, 함평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후에 나주 가산(佳山)에서 탄약제조와 무기정비를 하고 있다가 부하 심수근(沈守根) 등과 함께 일본 헌병대에 체포당하였다.
그 후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내란죄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대구복심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으며, 다시 대심원(大審院)에 상고하였으나 역시 기각되었다.
결국 체포된 지 6개월만인 1908년 12월 15일 대심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고 이듬해 1909년 1월 18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37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금년도 서거 104주기를 맞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6년 6월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나주시 남산공원에 ‘의병장 단암 조정인순절비<위 사진>’가 건립되었다.
<호국영웅>
“목표점 표지판 메고 적진지로”
…여방오 육군 일등중사(1928.2.13.~1953.6.9)
1928년 2월 13일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태어난 여방오 육군 일등중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인제군 서화 북방854고지 전투 등에 참가해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1953년 6월 12사단 52연대 3대대 9중대 3소대 2분대장으로 강원도 인제군 서화 북방 812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812고지는 북한군에게 빼앗길 경우 서화에서 인제지역에 이르는 아군의 주보급로를 잃게 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812고지의 이러한 중요성을 간파한 북한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6월 8일 파상공격을 감행, 52연대의 방어 진지선을 돌파하고 812고지 동쪽능선인 쌍용고지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위기에 처한 아군은 이 쌍용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여방오 중사가 소속된 9중대를 투입했지만 아군이 내려다보이는 유리한 지형에서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 아래 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해오는 북한군에 의해 많은 사상자만 낸 채 번번이 공격이 좌절되었다.
이때 9중대 3소대 2분대장이었던 여방오 중사는 이 상태로는 승산이 없으니 자신이 적진으로 가겠다며 자진해서 나섰다.
아군 공군기의 지상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공군이 공격 목표 지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목표지를 알리는 표지판을 메고 고지를 향해 접근하여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고, 우리 공군에게 공격 목표지를 알림으로써 쌍용고지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폭탄세례 속에 임무를 완수한 여방오 중사는 적의 기관총진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당시 나이 25세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55년 3월 1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붙임 : 1월 나라사랑인물(호국영웅) 여방오 중사 사진
우리고장 출신 2월의 나라사랑 인물
장성 출신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대장 기삼연 선생
광주지방보훈청(청장 안중현)은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와 함께 우리고장 출신 2월의 나라사랑 인물로 전남 장성 출신『호남창의회맹소 의병대장 기삼연 선생』을 선정하였다.
1851년 전남 장성 황룡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6년 2월 토적복수를 내걸고 장성에서 봉기했다.
1907년 음력 9월 호남지역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연합 의병 지휘부인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항일호남의병의 선봉장으로써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5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장성군 장성읍 장성공원 내에는 ‘호남창의영수 기삼연 선생 순국비’가 건립되어 있다.
우리 고장 3월의 나라사랑 인물
해남 출신 천도교계 3․1운동 민족대표 양한묵 선생
광주지방보훈청(청장 안중현)은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와 함께 우리고장 출신 3월의 나라사랑 인물로 전남 해남 출신『천도교계 3․1운동 민족대표 양한묵 선생』을 선정하였다.
1862년 전남 해남군 옥천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5년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친일세력에 대항하였고 1909년 천도교총부 법도사, 1911년 직무도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셨다. 당시 나이 58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해남군 옥천면에는 ‘지강 양한묵선생 순국비’가 화순군 화순읍 남산공원 내에는 ‘삼일민족대표 양한묵선생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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