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시, 역사인물 선양사업 잠깨야
며칠 전 낯선 보도자료가 메일로 들어왔다. 나주시 홍보팀이 정재상이라는 사람에게 받은 메일을 그대로 전달한 자료였다.
“경남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 정재상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각 언론사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주십시오.”
첨부된 파일을 열어 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구한말 이후 국내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벌이다 순국한 나주 출신 전례중 의병장 등 28명이 경남 하동 출신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순국 106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전례중(全禮中), 태어난 연도는 알 수 없이 나주 월명동 출신이라 했다. 월명동이 어딜까? 자료를 찾아봐도 알 수 없고, 나주의 지명과 역사, 문화를 알 만한 몇몇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었다. 다만 다시면 월태리에 월명마을이 있으니 혹 그 마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얼추 짐작해 볼 뿐이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 된 뒤 1907년부터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 70여명을 지휘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이듬해 4월 7일 나주 서방 약 20리 월명동(月明洞)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총살됐다.
그런데 어쩌다 나주는 그의 존재조차도 몰랐던 것일까. 얼마나 많은 전례중 같은 위인들이 역사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일까.
궁금함 속에 그들을 찾아낸 하동인 정재상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놀랍게도 채 쉰 살도 되지 않은 젊은 향토사학자였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정착하면서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게 된 그는 광복절을 맞아 지역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체포돼 총살당한 박매지(박인환) 의병장의 기록을 보게 됐다.
하지만 그의 파란만장 했을 무용담은 하동군사(史)에 ‘일본군에 체포돼 귀순의 권유에 불복하다 총살됐다’는 단 한 줄이 고작이었다. 그 내용만으로는 기사를 쓸 수 없어 기록물을 찾아 나섰던 것이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서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부끄러웠다. 비슷한 시기에 지역신문 기자로 사회에 뛰어들었지만 그가 일궈놓은 금자탑은 지역신문 기자의 본분을 뛰어 넘어 대한민국의 큰 업적이 되고도 남는다.
비슷한 일에 뛰어 들었다 그만 둔 일이 있다. 몇 년 전 나주 남평 출신이고 ‘엄마야 누나야’, ‘부용산’을 작곡한 월북작곡가 안성현(1920. 7. 13~2006. 4. 25)선생의 기념사업이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나주시가 사업을 맡긴 단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역사인물 선양사업에 대한 나주시의 의지 자체가 박약했던 때문이다.
그때 당시 그 문제를 집요하게 파 헤쳤더라도 안성현 선생이 지금까지 역사 속에 잠들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1856~1919)선생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또 한명의 가야금 명인 안기옥(1894~1974)선생. 나주에서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그의 연보와 계보를 작년에 개관한 영암의 가야금박물관에서 발견했다. 그는 바로 안성현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안기옥·안성현 부자는 해방 후 월북해 북한민족음악 정립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나주에서는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남평 주민들을 추진돼오던 안성현기념사업도 나주시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긴 뒤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나주의 역사인물을 찾아내 이름을 널리 알리고 지역의 자랑으로 삼아야 할 나주시가 아직도 푯대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사상검증에 빠진 것은 아닐까?
지난 22일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나주문화예술회관에서 선보인 관현악 ‘아리랑환상곡’은 북한 출신 작곡가 최성환의 작품이었고, 25현가야금협주곡 ‘초소의 봄’을 작곡한 공영송 역시 북한 작곡가다.
머지않은 훗날 남북관계가 호전되고, 중국과의 문호가 더 활짝 열렸을 때 이들 남과 북을 오가며 거대한 족적을 남긴 나주의 인물들은 한반도 통일시대와 동아시아 교류의 가교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가까운 예로 광주에서는 올해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 정율성 선생(1914~1976) 탄생 100주년을 맞아 광주시와 중국 정부기관 등이 공동으로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 때는 정율성이 6·25 당시 중공군이 목청 높여 부르며 쳐들어왔던 ‘팔로군행진곡’의 작곡가라는 사실에 움찔 했지만 지금은 중국과의 문호를 넓히는 마중물로 삼고 있다.
정율성의 예술성을 확산시키고 한국을 대표할 성악인을 뽑기 위해 오는 30일 열리는 ‘광주성악콩쿠르’는 1등 상금이 1천500만원에 이르며, 10월 24일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오! 광주-정율성축제’ 개막공연은 이미 국내는 물론 중국 관광객들의 예약이 쇄도해 매진사례를 빚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일까. 나주도 잠자는 역사인물들을 깨워 당장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광주에 정율성, 영암에 김창조-김죽파(난초)-양승희로 이어지는 가야금 계보가 있다면, 나주에는 안기옥·안성현 부자와 서편제의 비조(鼻祖) 박유전 선생으로부터 직접 소리를 전수받은 정창업-김창환- 정광수로 이어지는 걸출한 소리꾼들이 있다.
그런데도 그 명성을 이어가기는커녕 이제 그에 대한 기억과 자료를 간직하던 사람들마저 유명을 달리하고 있으니, 나주는 언제까지 걸출한 역사인물들을 역사에 묻어두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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