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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여행기

나주시 노안면 금안동 한글마을이야기

by 호호^.^아줌마 2014. 9. 24.

호남3대명촌 금안동 한글마을이야기

 

 

금안도령·금옥낭자

신숙주 할아버지 따라 금안한글마을 탐험 고고씽!

 

금안도령 금옥낭자 금안한글마을 나들이

  

 

금안도령·금옥낭자 : 안녕하세요?

저희는 나주시 노안면 금안한글마을 알리미 금안도령, 금옥낭자입니다. 저희 금안한글마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희 금안한글마을은 조선초기 문신으로 한글창제의 주역이었던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선생의 생가를 중심으로 조성이 됐습니다.

 

1897년에 편찬된 금성읍지의 <명기>항목에 따르면 “금안동은 고려시대에 정가신이 한림학사로서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직위가 재상에 이르러 금안수곡으로 고국에 돌아와 동네를 출입함으로 마을이름을 금안동이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숲이 우거져 새들의 낙원’이라는 뜻으로 마을이름을 ‘금안동(禽安洞)’이라 불리었고, 고려말에는 음을 그대로 두고 뜻만 ‘금으로 만든 말안장을 가져온 동네’라는 뜻으로 ‘금안동(金鞍洞)’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안동을 ‘호남 3대 명촌’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러한 전통과 역사를 살려 다시 새롭게 태어난 금안한글마을, 바로 신숙주 할아버지가 태어나서 자랐던 마을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희는 신숙주 할아버지를 만나 마을탐험을 할 건데요, 지금부터 저희랑 함께 탐험을 떠나 볼까요?

 

“신숙주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호남3대 명촌 금안동

 

  금안도령 : 안녕하세요? 여기는 나주시 노안면 금안한글마을입니다.

왜 한글마을이냐고요? 세계적으로 빛나는 한글을 창제하신 분이 누구죠? 맞아요. 조선의 4번째 임금 세종대왕이시죠. 그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를 도우신 분이 신숙주(申叔舟, 1417~1475) 할아버지인데, 그 분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 바로 우리 금안동입니다.

 

금옥낭자 : 그래서 저희가 신숙주 할아버지를 직접 만나 금안한글마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신숙주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신숙주 : 오, 그래. 금안도령, 금옥낭자, 반갑구나. 뭐가 궁금한고?

 

금옥낭자 : 금안한글마을의 원래이름이 금안동이잖아요? 왜 금안동이라 부르게 됐는지 궁금해요.

 

신숙주 : 금안동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지.

금안동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동네이름도 ‘숲이 우거져 새들의 낙원’이라는 뜻으로 ‘禽安洞(금안동)’이라 불렸단다. 그러다 고려말 충렬왕 때 원나라 사신으로 파견돼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설재 정가신 선생이 ‘금으로 만든 말안장을 가져온 동네’라는 내력을 담아서 金鞍洞(금안동)으로 뜻만 바뀐 것이지. 설재 선생은 원나라 황제로부터 금안장, 백마, 옥대를 하사받아 귀국을 했다는 구나.

 

금안도령 : 지금은 나주시 노안면이라고 부르잖아요? 시대마다 마을이름이 바뀌는 건가요?

 

신숙주 : 조선후기까지 금안동은 나주군 금안면에 속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금안면은 이로면, 복룡면과 함께 이로의 老(노)자와 금안의 安(안)자를 따서 노안(老安)면이 되었단다.

 

이때 반송·원당·수각·어장·광곡·송대·인천리는 금안리에 속하고, 영안촌은 영평리, 구축은 구정리, 월송·송정·금곡은 용산리에 각각 속했지. 지금은 금안리 1구(광곡·송대·수각), 금안리 2구(반송·원당), 금안리3 구(인천·천변), 영평리 2구(영안), 구정리 2구(구축), 용산리3구(월송·송정), 용산리 4구(금곡)로 행정구역이 나뉘었단다.

 

금옥낭자 : 그런데 금안동을 왜 호남3대 명촌이라 부르는 거죠?

 

신숙주 : 금안동은 경치가 아름답고 사람들이 부지런해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시와 문장을 짓고 글을 읽으며 부지런하여 인심이 후했다고 한단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호남지방의 3대 명촌으로 나주 금안동, 영암 구림마을, 정읍 태인을 손꼽았지.

 

금안도령 : 금안한글마을에는 보물이 많다고 들었어요. 어떤 보물이 있어요?

 

신숙주 : 그럼 우리 같이 금안한글마을 보물을 찾아볼까?

 

금안도령·금옥낭자 : 네, 좋아요. 금안마을 보물을 찾아서 출발!!!

 

 

금안한글마을 보물탐사 시작~

 

 

경렬사(전라남도기념물 제196호)

 

 

신숙주 : 경렬사는 고려말에 일본 도적떼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경열공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이란다. 원래 광주 동명동에 있던 것을 조선 고종임금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모두 부숴 없앴다가 1914년도에 현재의 금안리에 다시 세웠지. 현판은 고종시대의 서예가인 김규진이 썼다는 구나.

 

금옥낭자 : 와~, 그럼 정지 장군도 이순신 장군처럼 왜적들을 물리친 거예요?

 

신숙주 : 정지 장군은 처음 이름이 정준제(鄭准提)였는데, 풍모가 장대했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온후했다는 구나. 어려서부터 큰 뜻을 가져 독서를 즐겼는데 책에 나오는 대의에 통달해 남들이 그 설명을 들으면 모든 의문이 시원히 풀렸다고 그래. 또 어디를 다닐 때 항상 책을 지니고 다녔다더라.

정지는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렸단다.

 

“내륙에 사는 백성은 배를 부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니 왜구를 막기 어렵습니다. 바닷섬에서 나고 자랐거나 해전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만 등록시켜 저희들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게 하면 5년 내에 바닷길을 깨끗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순문사(都巡問使) 같은 관직은 군량을 허비하고 민생을 소란하게 할 뿐이니 바라옵건대 그것을 없애소서.”

 

그러다 우왕 3년(1377) 여름, 왜구가 순천·낙안 등지를 침략하자 정지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적을 격파해 열여덟 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단다. 그러자 우왕이 기뻐하며 정지에게 말과 비단을 선물로 하사하셨다는 구나.

 

정지 장군은 전라도 지방과 전국에 출몰하는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병사들이 죽으면 육지로 나가 장사를 지내주니 군사들이 다들 감격해 울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지.

 

한번은 왜적이 큰 배 120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침략해 오니 바닷가의 고을들이 크게 동요하였다는구나. 그러자 목포에 있던 정지는 밤낮으로 진군을 독려하면서 어떤 때는 스스로 노를 젓기까지 하니 노 젓는 군사가 더욱 힘을 다하였지.

 

적의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칼과 창이 온 바다에 번쩍이는 가운데 적은 사방으로 에워싸고 전진해왔지만, 정지가 머리를 조아리고 하늘에 절을 하자 얼마 뒤에 바람이 아군에 유리하게 바뀌었단다.

왜적은 큰 배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강한 군사 140명씩을 태우고 있었는데, 정지가 진공해 먼저 그들을 쳐부수자 떠있는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하더라. 또 남은 적을 활로 쏘니 쏘는 족족 거꾸러져 마침내 크게 적을 격파했으며 화포를 쏘아 적선 17척을 불태웠단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노고를 치하했단다. 그렇게 왜적에게는 존재요, 백성들에게는 한 없이 고마운 장군이었던 정지 장군이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게 됐지.

 

그때 정지 장군은 말했단다.

“사람이 나서 한 번은 죽는 법이니 목숨이 무어 그리 아깝겠느냐? 다만 왕 씨가 다시 왕위에 올랐는데도 억울하게 죽는 것이 비통할 따름이다.”고.

이후 정지 장군은 광주에서 살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때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다는구나.

 

금옥낭자 : 그렇게 큰 공을 세웠던 정지 장군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생하시다 겨우 마흔 다섯 살에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너무 아파요.

 

금안동자 : 저도요.

 

신숙주 : 그래도 후손들이 장군의 공을 알아주니 저승에서나마 기뻐하실 거야. 자, 또 떠나보자.

 

 

척서정(滌暑亭)

 

신숙주 : 여긴 척서정이라는 곳이다. 1915년도에 경남 하동사람 척서 정해일이 세웠지. 경열사가 금안동에 복원될 때 함께 세워는데 단층의 팔각지붕 평기와 건물로 정면4칸, 측면2칸의 재실형 건물이란다.

 

신숙주 생가

 

금안동자 : 와~ 여기는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집이군요. 원래 외갓집이었다죠?

 

신숙주 : 그렇지. 내가 태어날 때 ‘다섯 형제의 탯자리’라는 뜻인 오룡동(五龍洞)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최전(崔典)선생의 제자 9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했다 하여 ‘구룡동(九龍洞)’이라 불렀다는 구나. 지금도 영안마을 양지뜸 윗골에는 ‘구룡동골’이라는 땅이름이 남아있지.

 

금옥낭자 : 한옥집들도 정말 멋지고, 흙돌담길이 정말 멋져요.

 

금안동자 : 그러니까 호남 3대 명촌이라 하지.

마을 곳곳에 오래된 나무들이 많아서 정말 좋아요.

 

신숙주 : 그렇지. 이 곳 나무들은 수령이 약 400~700년 된 노거수들로, 마을의 역사와 함께 마을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단다. 이 중에 몇몇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돼 관리를 하고 있고 말야.

 

신숙주

 

금안도령 : 아 참, 할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소개는 제가 할께요. 제가 조사를 해왔거든요.

 

신숙주 : 오호~ 그래? 나에 대해서 뭘 조사했는지 한번 들어볼까?

 

금안도령 : 신숙주 그는 누구인가?

 

이름 : 신숙주

 

생년월일 : 1417년 8월 2일(음력 6월 20일)

 

태어난 곳: 조선 전라도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

 

학력 :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동시합격,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 급제,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

 

직업 : 문신, 언어학자, 사상가, 외교관, 군인, 시인, 정치인

 

종교 : 유교(성리학)

 

배우자 : 무송군부인 무송 윤씨, 배씨

 

자녀 : 아들 신주, 신면, 신찬, 신정, 신준, 신부, 신형, 신필, 딸 신씨(신명수의 처), 서자 신결, 서녀 숙원 신씨

 

부모 : 아버지 신장, 어머니 나주 정씨

 

친척 : 윤회(처조부), 폐비 윤씨(외당조카딸), 연산군(외외종손), 신용개(손자), 정유(외조부), 한명회(사돈), 신용개(손자), 한확(사돈)

특기 :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

보한재 영정(保閒齋 影幀, 보물 제613호)

 

지은 책 :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 편저

 

이상 끝!

 

금옥낭자 : 와~ 금안동자, 대단한데요? 저도 조사 해 온 게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신숙주 : 하하하... 어디서 나의 신상을 그리 속속들이 알아냈을꼬? 그럼 금옥낭자가 조사한 것도 한번 들어보자꾸나.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금옥낭자 : 신숙주는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의 셋째 아들로 그가 태어난 금안동은 어머니의 고향, 바로 외갓집이었죠. 어머니 나주 정씨가 지성주군사(知成州郡事)를 지낸 정유(鄭有)의 딸이었거든요.

신숙주는 위로 형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가 태어났죠.

 

아버지 신장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온화한 성품의 문인이었으나 술을 좋아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의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신숙주의 아버지는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주’자를 붙였는데, 그래서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맹주·중주·숙주·송주·말주 였다니 믿거나, 말거나...

 

아버지가 관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고향 나주를 떠나서 본가인 한성부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요. 아버지 신장은 글씨를 잘 써서 서울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가 그의 글씨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금안동자 : 그리고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그 놈 참 크게 될 놈일세!”라면서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상을 했다는 군요.

신숙주는 성격이 침착해서 깊이 생각하고 난 다음에 말을 하였고,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뒤에 윤회와 정인지의 제자가 되어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금옥낭자 : 할아버지의 스승님들은 어떤 분들이셨어요?

 

신숙주 : 내 첫 번째 스승은 아버지 신장이었고, 두 번째 스승인 윤회는 하륜과 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과 백이정, 안향의 학통을 사사했지.

그 뒤에 윤회 스승님의 손녀와 결혼해서 손녀사위가 되었고, 뒤이어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단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아무나 공부를 할 수 없었던 때라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단다.

어느 날 우연히 탐진강과 영산강의 강물이 황해로 흐르는 것을 보면서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곳’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단다.

 

금안동자 : 할아버지, 정말 세종대왕님과 같이 한글을 만드셨어요?

 

신숙주 : 그럼~ 사실 임금님과 나의 만남은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됐단다.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3등으로 급제하고 전농시직장이라는 벼슬을 하게 됐는데, 이조(吏曹)에서 나를 성균관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제집사(祭執事)로 특별히 임명하였단다. 그런데 이조의 어느 늙은 서리(胥吏)가 잊어버리고 첩지(牒紙)를 전달하지 않아서 일을 빠뜨리게 되자 사헌부에서 나에게 벌을 내리라고 탄핵을 했지. 이때 나는 무척 억울했지만 그 서리에게 딸린 자식들이 많다는 사정을 알고 내 잘못이라고 거짓으로 고하고 대신 징계를 받았단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종임금께서 나를 특별히 용서해 주셨고, 동료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됐지.

 

금옥낭자 : 할아버지는 독서를 아주 좋아하셨다면서요?

 

신숙주 : 그랬지. 1441년에 다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讚)이 되었는데,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하였단다. 숙직이 없더라도 장서각에 있으면서 밤새도록 독서를 하였고, 윤회, 정인지 스승님의 훈도 외에도 다양한 독서 덕택에 경사와 고전에 두루 능통하였고 역사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게 되었단다..

그때 나는 집현전에 있으면서 장서각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열심히 읽고 동료를 대신해 숙직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공부하기가 일쑤였단다.

숙직이 아닌 때에도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느라 밤을 새기도 했던 거야.

어느날 세종임금님께서 밤 늦은 시각 장서각에 들리셨는데, 그 날도 내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든 것을 보시고 임금님이 직접 자신의 옷과 포의, 이불을 내렸던 거야. 새벽에 깨어나 내 몸에 용포가 덮어진 것을 보고 어찌나 감동을 했던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했지.

 

금옥낭자 : 우와~~~ 저도 감동했어요. 세종대왕님 정말 인자하신 임금이셨군요.

 

신숙주 : 1442년(세종 24)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가 되었단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내가 뽑혔단다. 집현전 학사로서 언어에 능해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한 몽골어, 여진어, 유구어(琉球語) 등 동아시아 8개 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지.

그 무렵 나는 과로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병이 나아 일어난 직후였단다. 그래서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약한 몸으로 어찌 먼 곳을 가겠느냐며 말렸지.

 

그래도 “신하된 사람에게는 평탄하거나 험한 것이 한 가지이다. 어찌 제 몸이 편안할 것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가기를 고집했고, 세종임금님도 “병이 들었다 하는데 어찌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며 염려를 해주셨단다.

나는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단다. 일본을 여행할 때 나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하였지.

그 때 9개월 동안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見聞錄)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라는 책이 완성되었단다.

 

금안동자 : 한글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어요?

 

신숙주 : 일본에서 돌아온 뒤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임금님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단다.

당시 죄를 짓고 만주의 요동에 귀양을 와 있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론과 인간의 발음, 언어에 대한 주요한 지식을 얻었고, 이후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면서 음운과 어휘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단다.

또한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도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하면서 토론을 하고,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를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분석해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냈지.

그렇게 해서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을 편찬하게 되었단다.

 

금옥낭자 : 아무튼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아름답고 편한 한글을 사용하게 돼 기뻐요.

 

신숙주 : 그래.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우리 한글, 많이 많이 사랑하거라.

 

금안동자·금옥낭자 : 네~~ 

 

서륜당(敍倫堂)

 

신숙주 : 여기는 서윤당이라고 하는 곳이란다. 1921년 풍산 홍씨 문중에서 지은 제각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 팔작지붕 구조로 이뤄졌지. 오늘날까지 홍씨 문중모임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으며, 음력 정월초 이튿날은 어른들을 모시고 공동세배를 드리기도 한다는 구나. 한때 도래지라는 미국인이 마을조사를 위해 묵었던 곳이기도 하고 말야.

 

쌍계정(雙溪亭,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금안도령 : 와~~ 할아버지, 여긴 또 어디예요? 기와지붕이 정말 멋져요.

 

금옥낭자 : 우와~ 저 나무 좀 봐요. 엄청 오래 살았나 봐요.

신숙주 : 하하하...

여긴 쌍계정이란다. 저 앞으로 금안천이 흐르고, 뒤에는 수각 쪽에서 흐르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기 때문에 ‘두 개의 시냇물이 흐른다’ 해서 쌍계정이라 이름을 지은 거란다.

 

금안도령 : 쌍계정은 누가 지었어요?

 

신숙주 : 쌍계정은 고려 충열왕(忠烈王) 때인 1280년도에 나주 정씨의 선조인 정가신 선생이 지었단다.

주로 조선시대 대학자인 신숙주 선생과 신말주, 죽오당 기건, 반환 홍천경 등이 모여 국내 현사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던 조선시대의 대표 정자였지. 현판 글씨는 한석봉 선생이 쓴 것으로 전하고 있고, 현재 나주 정씨, 하동 정씨, 풍산 홍씨, 서흥 김씨가 공동관리 하고 있단다.

 

금옥낭자 : 그럼 쌍계정에서는 무엇을 했나요? 할아버지들 낮잠 주무시는 곳인가요?

 

신숙주 : 이 곳에서는 선비들이 시를 지어 읊으면서 놀기도 하고, 마을 일을 노기도 며 풍류를 던 곳이었단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해마다 좋은날에 계회(契會)나 동상연(東床宴)을 행하면서 시회(詩會)를 갖고 있단다. 쌍계정의 시회는 나주지방의 대표적인 시단(詩壇)이었고, 우리나라 누전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곳이기도 해.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마을마다 마을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동계(洞契)나 촌계(村契)가 있었는데 금안동 대동계는 그것과는 다르게 향약적 의미를 띠고 있었단다.

향약이 뭐냐면, 마을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화민성속, 化民成俗)을 목적으로, 서로 좋은 일을 권하고(덕업상권, 德業相勸), 예의를 지키며(예속상교, 禮俗相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서로 돕는 것(환난상휼, 患難相恤), 나쁜 일은 서로 타일러 고치자(과실상규, 過失相規))는 약속이란다.

 

금안동자 : 향약의 뜻이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정말 좋은 뜻이 담겨있네요.

 

신숙주 : 그렇지. 금안동 대동계의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나주인 정상(1533-1609)이 쓴 금안동좌목중수서(金安洞座目重修序)와 동중구좌목(洞中舊座目)이라는 기록이란다.

 

금안동좌목중수서에서 정상은 마을형성의 유래를 선조 설제 정가신으로부터라고 적고, 경관의 아름다움과 조선 개국 이래 굴하는 선비와 벼슬이 아니하고 여러 씨족 집단이 결사(結社)하여 오랜 전통(古禮)을 이어 받고, 경조사(慶弔事)에 축하와 조의를 표하고, 서로 돕고 협력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인심이 후한 동네라 칭송받았다고 전하고 있단다.

 

금안 3대서원(월정서원·설재서원·경현서원)

 

■ 월정서원

신숙주 : 금안동에는 아주 유명한 서원 세 곳이 있는데, 여기는 월정서원이란다. 1664년 창건돼 박순, 김계휘, 심의겸, 정철의 위패를 모셨지.

그러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 복원이 된 모습이란다. 사당과 강당,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구성돼 있고, 경내에는 월정서원유허비, 월정서원묘정비가 있단다.

 

■ 설재서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신숙주 : 설재서원은 문정공 설재 정가신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서 숙종 14년 금안동에 최초로 창건하였단다. 이 곳 역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 영모재를 복원해 제향하던 중 1953년 서원을 다시 짓게 된 거란다.

 

■ 경현서원

신숙주 : 경현서원은 1583년 창건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같은 선조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 됐다가 1977년 전남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었단다. 현재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 사당과 정면4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 강당, 각 정면3칸·측면 1칸의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금안동자 : 서원에서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석류문(錫類門), 제가 및 회각, 비석

 

금안동자 : 그런데 마을 곳곳에 집과 정자 말고 비석과 문들이 많이 보이네요? 어떤 곳이죠?

 

신숙주 : 마을별로 각 성씨들의 제가 및 회각 등이 모두 6개소가 있는데, 저 석류문(錫類門)의 석류는 선(善)을 내려준다는 의미로, ‘시경’에 ‘효자가 끊이지 않으니 길이 너희에게 선을 내려 주리로다’라느 뜻을 갖고 있단다.

그리고 이들 비석에는 김씨 열녀비, 홍씨 효자비 등 여러 비석들이 위치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이 마을에서는 충효예를 중시하며 살았다는 것을 일 수 있단다.

 

 

생태체험관(배뱅이골)

 

신숙주 : 여기는 배뱅이골이라 하는 곳으로 생테체험을 하는 곳이란다.

예전에 ‘배뱅이굿’을 하는 무당과 관계된 땅이름과 뱃길에서 비롯한 지명의 두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골짜기 물이 몹시 차 여름피서에 좋은 곳이라고 하는구나.

이 배뱅이골을 쭈욱 타고 올라가면 나주 대호리로 가는 길이 있는데, 남쪽으로 올라 높이 225m 정도 되는 곳에 이르면 서쪽너머로 문평면 신광리 보광골이 보인단다. 보광골로 가는 길로 내려서 조금 가면 경현동 오두재 저수지로 넘어가는 갈림길이 나오지.

또 배뱅이골에서 서쪽으로 갈라진 골짜기로 가면 우름재와 동막굴 고개로 가는 길이 나온단다.

 

금옥낭자 : 금안한글마을이 나주 여러 곳이 다 연결이 되는 군요. 예전에 사람들이 이 골짜기길로 많이 왕래를 했을 것 같아요.

 

신숙주 : 그래. 지금은 다들 큰 도로로 차를 타고 다니지만, 예전에는 이 길들이 사람들이 왕래하던 중요한 길목이었지. 지금은 생태체험을 하는 길이기도 하단다.

 

금안동자 : 이 곳 생태체험관에서는 어떤 체험을 하나요?

 

신숙주 : 여러 가지 체험을 하지. 농사짓기, 전통음식 만들기, 꽃물 들이기, 전통놀이 등등. 자세한 내용은 표를 살펴보거라. 

 

전통문화센터

 

금옥낭자 : 짜잔~ 금안한글마을 전통문화센터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기는 제가 안내를 할께요. 이 곳에서는 마을주민들과 외지에서 온 체험객들을 위해서 다양한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인데요, 계절에 따라 골라서 참여할 수 있어요.

 

 

 

 

1탐방로

①문화재 및 옛길탐방 (경열사, 척서정, 신숙주생가) 쌍계정(다양한 민속문화 및 놀이체험)금안2제(수변공간), 월정서원(서당체험)...1시간 30분

 

2탐방로

①대나무숲길,신숙주생가, 마을안길탐방, 쌍계정(다양한 민속문화 및 놀이체험), 금안2제(수변공간), 월정서원(서당체험)...2시간

여름

1탐방로

①문화재 및 선비길탐방(경열사,척서정,신숙주생가) 쌍계정(다양한 민속문화 및 놀이체험) 미꾸라지 잡기체험, 금안2제(수변공간), 월정서원(서당체험), 금안1제 계곡체험, 생태공원걷기...2시간 30분

 

2탐방로

①주차장하차, 대나무숲길, 신숙주생가, 선비길탐방 및 마을안길탐방, 쌍계정(다양한민속문화 및

놀이체럼), 미꾸라지잡기체험, 금안2제(수변공간), 월정서원, 금안1제 계곡체험, 생태공원걷기...2시간 30분

 

가을

1탐방로

①문화재 및 선비길탐방(경열사, 척서정, 신숙주생가) 쌍계정, 농촌생활체험(고구마수확,옥수수

수확), 금안2제(수변공원), 월정서원(서당체험)...1시간 30분

 

2탐방로

①주차장하차, 대나무숲길, 신숙주생가, 선비길탐방, 쌍계정(다양한 민속문화 및 놀이체험), 농촌생활체험(고구마수확, 옥수수수확 등), 금안2제(수변공간), 월정서원, 생태공원 걷기...1시간 30분

 

대나무길 걷기

하늘높이 함께 있는 푸른 대나무 숲을 거닐며 햇살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산책

 

산림욕

산림욕에 의한 스트래스를 해소하고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며 지친 심신의 활력을 갖게 함

 

배꽃 즐기기

배꽃축제와 함께 다양한 문화행사, 민속문화 등 다채로운 행사

 

선비길 걷기

쌍계정, 신숙주생가, 경렬사, 설재서원, 경현서원등 마을길 고살길을 거닐며 옛선비의 정서와 고향의 정서를 만끽

 

금안동 서당체험

여름방학을 통한 3박4일의 교육일정을 통한 예절, 인성, 한문, 한글체험, 전통교육을 실시 각종 제사 체험 관혼상제의 이해를 통한 전통 문화체험 예절 교육 체험 개인/가정/사회 공공예절등 여러 예절법에 대해 학습

 

문화재 및 옛 선비길 탐방 옛것을 보존하고 선조들의 지혜에 대해 학습하고 체험 

 

 

금안동의 8경(金鞍八景)

 

금안동자 : 금안한글마을에는 여덟 개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던데 어떤 곳인가요?

 

신숙주 : 금안8경이라고 하는 곳인데, 전숙 시인의 시를 한 번 들어볼까?

 

 

금안동 팔경

 

                            시인 전숙(노안금안보건진료소장)

 

고려 명신 정가신 명문장에 반한

원 세조 쿠빌라이 특별하사품

옥대에 금金 안장 두른 백마 타고

설제雪齋 금의환향하니

고향동네는 금안동金鞍洞이라 불리더라

정가신 신숙주 홍천경 문인재사 이어나는

명현들의 고향 금안동 팔경에 취해보리

 

제 일경은 오리임정五里林亭이라

오리나 뻗어있던 느티나무 숲길

지나가던 원님도 말에서 내려

숲쟁이라 이름 짓고

그윽한 나무 향에 쉬어가더라

 

제 이경은 천년석주千年石柱라

천년동안 매화꽃잎 날리며

하늘 바라듯 꼿꼿이 서서

금안동 지켜온 수문장이여

 

제 삼경은 산점행인山店行人이라

천년을 배향해온 설제서원

비자나무 옷깃을 여미는데

영안 마을 청산골 돌아 떠나는 나그네

청산유수 화폭 속에 한 점 그림이어라

 

제 사경은 보사귀승寶寺歸僧이라

광곡 웃뜸에 옛날옛적 배를 매두었다는

배뱅이 골짜기 넘어 바라에 세속 접은 스님

휘뚝휘뚝 천년고찰 다보사로 돌아가네

 

제 오경은 반월현암半月懸岩이라

무제봉 아래턱 큰 바위에 비스듬 걸린 반달

죽마고우 샛별 반가워

창공에 솟구치려다 까무룩 조는구나

 

제 육경은 쌍계명뢰雙溪鳴瀨라

누마루에 금안동 향약 알뜰히 품은 쌍계정

한국 팔대 명산 금성산 정기들

아흔 아홉 골 치마폭 타고 흘러오더니

삼현당 두 줄기로 돌아나오며

여울 우는 소리 사무치네

 

제 칠경은 금성홍습錦城紅濕이라

금성산 서쪽 자락에 펼쳐진 저녁노을

민초들 타는 목마름에 붉은 감로주

서방정토에 넘쳐흐르듯 일렁이는가

 

제 팔경은 서석청람瑞石淸嵐이라

금안동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득한 서석 무등골엔

무릉도원 신선이 노니는 듯

아지랑이 남실남실 피어오르네

 

신숙주 : 자, 이렇게 금안동 사람들이 대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 여덟가지를 금안8경이라고 한단다.

 

 

 

<나주 노안 금안동8경>

 

제1경 오리임정(五里林亭)

오리길에 심어진 팽나무와 그 사이에 있는 누각과 정자의 모습

 

제2경 천년석주(千年石柱)

수백년 동안 마을어귀를 지켜 온 이정표(금안3구)

제3경 산점행인(山岾行人)

청산을 돌아 떠나는 나그네의 모습

 

제4경 보사귀승(寶寺歸僧)

배뱅이골을 지나 다보사로 가는 승려의 모습

 

제5경 반월현암(半月懸岩)

무제봉 아래턱에 걸친 반달 모양의 바위(금안1구) 또 다른 고문헌에는 오암목적, 거북바위 목동이 피리 부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제6경 쌍계정(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고려 충렬왕 때 한림학자인 설재 정가신 선생이 지었으며, 조선시대 대학자인 보한재 신숙주 선생과 말주, 죽오당 기건 반환 홍천경 등이 모여 국내 현사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던 조선시대의 대표적 정자

 

제7경 금성홍습(錦城紅濕)

금성산 자락의 저녁노을 모습

 

제8경 서석청람(瑞石淸嵐)

금안동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모습

 

 

 

 

금안동자·금옥낭자 : 신숙주 할아버지 덕분에 저희가 금안한글마을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신숙주 : 그래. 나도 너희들과 함께 마을탐험을 하게 돼서 기뻤단다.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마을을 후손들이 더 잘 가꾸고 보존해야 되겠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 찾아와서 유익한 경험들을 함께 했으면 좋겠구나.너희들이 금안한글마을 홍보대사니까 잘 알려서 할 수 있겠지?

 

금안동자·금옥낭자 : 네, 할아버지.

 

 

 

“여러분, 금안한글마을로 놀러오세요!”

 

“신숙주 할아버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