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의 들꽃에세이<78>…원추리(萱草根)
울적한 가슴이 훤해지는 풀꽃…원추리(萱草根)
학명: Hemerocallis fulva L.
외떡잎식물강 백합목 백합과의 다년초
‘원추리’의 속명 헤메로칼리스(Hemerocallis)는 하루(hemera)와 아름답다(kallos)의 합성어로 ‘하룻날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이름이다. 영명 데이릴리(daylily)도 ‘하루’를 제시하고 있지만 실은 피고지기를 거듭하여 무릇 여름 한 달을 이어가는 긴 개화기간을 자랑하는 식물이다.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流岩 홍만선(洪萬選,1643-1715)은 농서인 《산림경제》‘양화(養花)’ 편에서 훤초를 원츄리 또는 업나물로 표현했다. 어떤 이는 훤초의 ‘ㅎ’이 탈락하여 원초 또는 지금의 원추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원추리는 뿌리에서 꽃송이까지 우리 삶 가까이에 깃든 친근한 식물이다. 이른 봄 연두빛 새싹을 나물로 무치면 싱그러운 향이 여간 슴슴하고 고소하지 않다. 꽃도 쌈, 생즙, 화전, 겉절이, 샐러드로 이용하며 꽃이 크고 예뻐서 뜰 한 구석이나 외딴 담장 가를 화사하게 꾸며준다.
원추리는 애기원추리거나 왕원추리 할 것 없이 모두 여자나 어미에 연결 되는 이야기가 많다. 자식을 기르는 어미처럼 지난 가을에 마른 잎몸이 그대로 남았다가 새순이 돋을 무렵 몸소 웃거름이 되어주는 것을 보고 ‘모애초(母愛草)’라 하였으며, 수태한 부인이 몸에 지니면 ‘마땅히 아들을 낳는다’하여 ‘의남초(宜男草)’라 불렀다.
노랑은 오방에서 중앙을 의미하듯 집안에서도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내당의 뜰에 즐겨 심었으며, 남의 어머니(자당)를 높여 훤당이라 하는 것도 원추리 훤(萱)자를 쓴다. 여자만 아는 월경불순, 대하증, 태동불안, 유선염 등에는 훤초근(萱草根,생약명)을 약재로 썼다하니!
“원추리의 어린 싹을 나물로 먹으면 홀연히 술에 취한 것 같이 마음이 황홀하게 된다.”고 하였다. 역시 원추리는 ‘시름을 잊게 하는 풀’ ‘망우초(忘憂草)’나 잊을 훤(諠)자에서 온 ‘훤초(萱草)’의 이미지다.
또 ‘넘나물’이라고도 하였는데 넓은 나물을 뜻하는 한자 '광채(廣菜)'에서 온 것이고, 또 사슴이 즐겨 먹는 검 같은 풀(鹿劒,녹검), 사슴이 먹는 파 같은 풀(鹿葱,녹총)이라고도 하였다.
꽃이 시들면 여섯 장의 낱 잎들이 한 데 얼싸안고 비비 꼬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모양을 부부의 금슬로 바라보아 합환화(合歡花)라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
갈빛으로 시든 모양이 어찌 여느 꽃들과 다를 바 있겠는가. 부질없고 짠하고 섭섭할지언정 행복해보이지는 않은데 아들 욕심이 얼마나 간절하였으면 시든 꽃에서까지 금슬을 보려고 갸웃거렸을까 싶다.
덜 핀 꽃을 어린애 ‘고추’로 바라본 눈이나 시든 꽃대를 냉큼 금슬로 바꾸고 싶었을 심사나 옛 시절이 차마 가엾다.
전국 산지와 초원에서 자라는 「애기원추리」는 「노랑원추리」와 비슷하게 꽃빛이 연노랑을 띠며 잎에 깊은 골이 없고 꽃의 수가 적은 데 비해 「골잎원추리」는 잎에 깊은 골이 진 것이 특징이며 꽃빛은 「각시원추리」와 유사한 등황색이다.
붉은 빛이 많은 홑왕원추리 또는 왕원추리는 최근(2007년 3월 31일) 국가표준식물목록에 『원추리』로 정명을 바꾸었으머 겹왕원추리였던 것은 겹을 빼고 그냥 「왕원추리」로 명명하였다.
제주도와 중부 이남의 왕원추리는 주로 관상용으로 재배하는데 방추형의 덩이뿌리가 있는 중국 원산이다. 동아시아의 온대지역에 10종, 한국에는 약 7종이 분포한다.
원추리의 새싹을 데쳐서 입에 넣으면 뽀득거리는 식감이 조금 어색하다. 일부러 많이 먹었다 싶어도 ‘술에 취한 듯 황홀’했던 기억은 없다.
그러나 독특한 나물 모양에 ‘망우초의 기분’을 더하면 봄날의 보리밭처럼 가슴이 풋풋하고 어릴 적 추억도 간절해진다.
마음 울적한 날이 있다 살다보면. 이유를 모른 채 우울해질 때도 있다. 사람인지라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꽃을 사거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과거에는 원추리나물도 ‘기분전환’의 한 소재였을 것이다.
필자는 세상사 퍽 즐겁지도 썩 울적하지도 않은 중간지대 어디쯤에서 피는 꽃이 원추리라 믿고 싶다. 눈물을 찍든 탄성을 지르든 아무쪼록 내일 일을 다 잊은 꿈길 같은 어디에서 훤하게 피어나는 꽃, 크게 빼어나지도 그렇다고 많이 모자라지도 않은 어느 무심한 산모롱이에서 한가로이 사라지는 꽃, 지극히 소박하면서 얼마든지 눈부신, 그 어디 어디의 노란 중앙을 원추리에게서 배우고 싶다.
◇ 뿌리에서 꽃송이까지 우리 삶 가까이에 깃든 친근한 식물 원추리.
잎에 깊은 골이 진 것이 특징인 골잎원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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