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최부 선생, 우리 함께 가요 그길!"
탐방<2>금남 최부 묘소(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산125)
금남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도로공사가 한창이라 더디기는 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늘어지마을에 도착하니 바로 도로 옆 진사 임택 묘소 아래 아들 금남 선생의 묘소가 배산임수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무안군에서 이렇게 근사한 묘소를 꾸며놓을 생각을 했을 지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참수를 당한 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처가동네 사람들에 의해 해남에 묻혔다가 443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그 것도 본향으로 못 들어오고, 탯자리가 건너다 보이는 영산강 건너 이 산자락에 뉘었을까 생각하니 설움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종친회에서는 이달말쯤 벌초를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만, 한여름 장마를 지나면서 묘지에 잡초가 무성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늘상 있는 일이겠지요.
그나마 묘지 입구에 키작은 엉겅퀴 한 그루가 쌩긋 웃는 얼굴로 탐방객을 맞아주어서 반가웠습니다.
풀독이 오를 수 있으니 긴바지 입은 분만 올라오시라 하였으나 한 분도 빠짐없이 선생의 묫자리를 둘러보았습니다.
마음으로 느껴지는 회한이 선생이나 탐방객들이나 이심전심이었을 것 같습니다.
무안군 몽탄면 늘어지마을.
몽탄면에는 대치리-한재, 명산리-밝은뫼, 내리-안골, 사천리-모래내, 다산리-차뫼, 이산리-배뫼처럼 리명(里名)을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곳이 많다.
배뫼에는 늘어지, 뒤구지라는 토속적인 마을명이 지금도 널리 불려지고 있다. 최부 선생의 묘소가 있는 늘어지마을은 행정구역명으로는 몽탄면 이산2리 어오지마을이다.
어오지(於吾地)를 우리말로 옮기면 늘어지가 되는데 오히려 어오지라는 말보다 늘어지라는 이름이 더 정겹게 다가온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확하지가 않다. 배뫼에서 살던 나주 임씨들이 농지를 찾아 이곳에 하나 둘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요롭고 여유가 넘쳐 보이는 이 마을도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무안에서 가장 늦게 모내기를 마칠 정도로 하늘만 바라보는 농사를 지었다.
즉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군내에선 제일 빈촌에 속했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고 농지가 늘어나고 지하수가 개발되면서 주민들의 살림이 펴지고 현재는 생활보호대상자가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생활의 여유를 갖고 살고 있다.
임금이 최부의 공을 높이 사 최부에게 소원을 물으니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임종도 치르지 못한 저의 선친을 편하게 모시는 것입니다”하자 임금은 곧 國地官을 보내 전국의 좋은 터를 알아보게 했다.
국지관이 남도의 여러 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왔는데 마침 명당으로 보이는 지점이 있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때는 동지섣달인데도 칡꽃[葛花]이 피어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이른바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葛花浮水의 형국이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묘가 마을 뒷산인 철마봉의 기슭에 있는 이곳이다.
최부 아버지의 묘를 이곳에 옮겨 쓸 때는 나주, 함평, 무안의 세 고을에서 선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묘의 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묘를 보면 지금도 봉분이 큰데 주민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지금보다 배가 더 컸다고 한다. 또한 앞에 있는 문인석의 석상은 주변에선 보기 어려운 크기와 모습을 하고 있어 관심이 간다. 아래에는 단기 4282년에 해남에서 옮겨온 최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 길 건너에는 ‘표해록’을 지었던 금남 최부 父子의 묘와 사당이 있다.
최부(1454 - 1504)는 의 명을 받고 제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을 거쳐 6개월 만에 돌아온 사람이다.
돌아와서 왕의 명으로 표류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엮어서 내놓으니 그것이 유명한 중국 견문록인 ‘표해록(漂海錄)’이다. 표해록에는 중국 연안의 해로, 기후, 산천, 도로, 관부, 풍속, 민요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특히 수차(水車-踏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 후일 충청도 지방의 가뭄 때 이를 사용해 해갈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한다.
최부 아버지의 묘를 이곳에 옮겨 쓸 때는 나주, 함평, 무안의 세 고을에서 선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묘의 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묘를 보면 지금도 봉분이 큰데 주민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지금보다 배가 더 컸다고 한다. 또한 앞에 있는 문인석의 석상은 주변에선 보기 어려운 크기와 모습을 하고 있어 관심이 간다. 아래에는 단기 4282년에 해남에서 옮겨온 최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철마봉의 또 다른 줄기인 조리봉엔 漁翁垂釣(노인이 물가에 앉아 낚시로 고기를 낚아 들이는 형국)의 명당이 있는데 나주 임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엔 아름다운 풍속이 있다. 마을에서 상(喪)을 만나면 객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전부 휴가나 틈을 내어 내려와 상여를 매고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물론 초상도 장례식장이 아닌 마을에서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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