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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사람들

금남 최부 탐방<4>해촌서원(해남군 해남읍 해리2길 50)

by 호호^.^아줌마 2018. 8. 2.

2018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최부 선생, 우리 함께 가요 그길!"

탐방<4>해촌서원(해남군 해남읍 해리2길 50)


해촌서원은 금남 최(부)선생, 귤정 윤(구)선생, 석천 임(억령)선생, 미암 유(희춘)선생, 취죽헌 박(백응)선생, 그리고 고산 윤(선도)선생을 모신 서원이다.(*음 8월 5일 향사)


해촌서원 변천사

석천사→삼현사→오충사→해촌사→해촌서원


(*석천 임억령 선생을 모신 석천사에서 시작하여 금남 최부 선생을 필두로 6현을 모신 해촌서원으로 변천사를 거쳤는데 주객이 전도되지 않았는가 했더니 나중에 해남 정씨 계보를 보고 이해되었음)


이곳에 2011년 3월 해남향교(전교 이창민)와 후학 선비문화 해촌학연구원(원장 민부삼)이 금남 최부 선생의 사적비가 세워졌다.


금남 선생은 15세기 인문 불모의 해남땅에 관서재를 세우고 사림 학통을 강학함으로써 해남유학의 사종이 되었으며 해남이 문향, 학 향으로 발전하는 초석을 놓았다.


비명은 민부삼 해촌학연구원장이 정리한 사료를 바탕으로 이성우 씨가 근찬했고 금남 후손 국경씨가 근서 했으며 수비 조경 예산은 후손 관수 씨가 지원했다.


이날 참석한 이창민 해남향교 전교와 김정진 삼호학당, 박철환 해남군수, 곽종월 해남교육장 등은 축사를 통해 호남 유학의 종조로서 금남 선생의 강학정신을 기리고 선생의 정신을 받들어 우리 해남의 학문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우자 기원했다.


금남 최부와 석천 임억령, 고산 윤선도로 이어지는 해남은 올곧은 정신이 살아있고 남도문화 예술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철저한 조명과 연구만이 해남의 정신을 되살려 해남이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비록 잡초가 무성했지만, 이 곳에서 금남 선생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뜨거워지는 전율이 느껴졌다.














해촌서원은 금남 최(부)선생, 귤정 윤(구)선생, 석천 임(억령)선생, 미암 유(희춘)선생, 취죽헌 박(백응)선생, 그리고 고산 윤(선도)선생을 모신 서원이다.(*음 8월 5일 향사)


해촌서원 변천사

석천사→삼현사→오충사→해촌사→해촌서원









민부삼 선생에 따르면, 금남 선생은 17세에 처가인 해남으로 내려와 관서제를 열어 백성들에게 학문을 깨우치게 하고 풍속을 바로 잡아 해남이 책과 현인이 많은 문헌지방이 되었다는 공적을 두고 있다.


해남 학문의 시대를 연 금남 최부가 살았던 금강아파트 뒤쪽 부춘동과 그의 사위인 유계린이 살았고 미암 유희춘이 태어났으며 석천임억령이 태어난 미암아파트 인근, 귤정 윤구가 자리를 잡은 해남읍내를 설명해 주었다. 

 

정언홍 언식 형제는 늦게 1567년 등과해 석천에게 기쁨을 줬다. 언식은 석천이 별세하자 석천선생시집을 목각으로 간행했는데 현재 호남 최고의 문집으로 여겨지며 고려대에 소장돼 있다. 

 

미암바위에서 내려와 체육공원에서 등대원쪽으로 길을 잡아 등대원 후문으로 나서면 지금은 흔적도 없는 당시 곡구당을 그려볼 뿐이다. 

 

곡구당에서 다시 등대원으로 올라 정문으로 나서면 미암아파트 일대가 미암 유희춘과 석천 임억령이 태어난 곳이다. 미암바위에서 호를 따온 미암 유희춘은 불타버린 선조실록을 다시 쓰는데 큰 역할을 한 미암일기로 유명한 문장가였다.

그의 아버지 유계린은 금남 최부의 사위이자 문도였으며 최부의 학풍은 미암에게로 이어져 하서 김인후와 함께 호남지방의 학풍으로 조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인근에서 태어난 석천 임억령은 최부에게 수학한 숙부 임우리에게 학문을 배워 중종 11년에 출사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고 해남으로 내려와 문학과 후학양성에 몰두 했다.


그리고 마산면 장촌리 아침재 인근에 마포별업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이곳에는 제봉 고경명이 15세부터 출입했고, 선조 14년 동안 제상을 지낸 박순과 그의 종형 박민중, 향시·중시에 장원한 송천 양응정과 그의 문하인 정철, 백광훈, 최경창, 박광전, 최경회 등이 이곳을 출입했다.


또한 기대승, 고경명, 이후백, 취죽헌 박백응 중응형제, 임발영, 정언홍 언식형제, 귤정 윤구의 아들 윤홍중, 의중 형제, 여흥민씨 민구, 정운 등등 지방의 명문자제들은 대부분 마포별업을 출입하며 임억령에게 배웠다.  

아침재의 전설은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곳을 넘나들던 이때부터 연유된 것이 아닐까.

임억령은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서산대사 휴정 등과 교류 했다. 1553년 석천은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퇴계를 만나는데 퇴계는 유학에 심취해 영남의 도학을 이뤘고 석천은 문학에 심취해 호남에 문학을 이뤄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석천은 한시뿐만 아니라 국문시가에서 쌍벽을 이룬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에게 영향을 줬지만 해남에서는 그의 문학적인 자취를 발굴하고 기리는 작업이 더뎌 아쉬움을 주고 있다. 

 

귤정 윤구는 금남 최부에게서 배운 아버지 윤효정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석천과는 일 년 차이로 태어났다. 윤구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지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석천과 윤구는 서로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석천집서를 쓴 윤행의 손자 귤옥 윤광계는 600여수의 시를 지어 전하고 있는데 귤옥이란 호를 쓴 것으로 보아 해리에서 난 것을 추정된다.  


어초은 윤효정과 귤정 윤구가 벼슬을 마다하고 후학 양성에 기울인 공이 국문시조의 대가 윤선도와 윤두서에 이르러 꽃을 피운 것이다. 

 

해남천을 따라 해남읍교회 옆 수성노인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노인당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관서재라 표기돼 있다.


관서재는 해남 학문의 시대를 연 금남 최부가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곳에서 해남의 학문이 싹이 텄는데 어초은 윤효정과 임우리, 유계린 등이 수학한 곳이다. 

 

귤정 윤구와 고산윤선도, 석천 임억령, 미암 유희춘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해남인을 중심으로 호남의 한 학맥을 형성하는데 기여해 실제로 해남의 학문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문서상이나 구전으로는 이곳이 관서재여서 고증을 통해 복원,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문학의 대가인 고산이 화려하게 조명을 받는 것에 비춰보면 그에 버금가는 석천 임억령은 해남에서 조명되거나 발굴 작업이 안돼 아쉬움을 주고 있다.  


해남읍 곳곳에 남아 있는 이들의 자취를 복원하고 안내판이라도 세워 해남 후손들과 이곳을 찾는 문인들에게 이정표로 삼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