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민들의 오랜 숙원 중학교를 설립하다
(1945. 10. 30 나주민립중학교 설립)
나주에는 1906년 설립된 사립영흥학교(현재 남평초등학교), 1907년 설립된 공립나주보통학교(현재의 나주초등학교) 등 24개의 보통학교가 각 면에 설립되었다.
이 학교들이 일제히 세워진 것도 아니고 1910년 2개교, 1928년 15개교, 1945년 24개교로 늘어났다. 이와 함께 실업교육을 위해 1926년 10월에 나주공립농업보습학교가 설립되었고, 1939년에는 금천면에 면업전수학교(해방 직후 호남원예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나주에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단계의 인문계 교육을 받기 위한 중학교가 한 곳도 없었다. 보통학교 졸업생 중 비교적 부유한 층은 광주나 서울, 목포, 심지어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졸업생은 진학할 학교가 없어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였다.
광주보다 많은 인구의 나주에 고등교육기관이 없는 것에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나주에는 꽤 많았다. 이러한 나주의 사정에 나주지역 인사들은 ‘교육협회’를 조직하여 학교설립을 추진하였다.
교육협회의 주요인사들은 위원장에 김창용, 상무 최남구, 위원은 김창호, 김형호, 박준삼, 양장주, 이창수, 최일숙 등이다. 이들은 나주 지역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나주의 숙원사업이던 중학교 설립을 위해 모였다. 이들이 했던 활동 중 중요한 것은 설립 발기인회 조직과 학교부지 및 시설물 확보와 교사와 학생을 확보하고 학교운영에 대비하는 일 등이었다.
해방된 지 두 달 반만에 학교를 개교하였다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다. 이렇듯 짧은 기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민립중학교가 개교한 것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박경중(박준삼의 손자)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창수, 박준삼은 일제강점기부터 중학교 설립을 위해 준비를 하였다는 것이다. 박준삼은 중앙학교를 다녀서 김성수, 송진우와 알고 있는 사이였고, 일제강점기 한국인으로는 가장 정보가 빨랐기에 박준삼과 이창수는 서울에 가서 이들을 만나 조선총독부에 중학교 설립을 위해 손을 써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서울에 가서 이들을 만날 정도였다면 나주에서 중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를 어느 정도 마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비록 전시체제에서 학교설립은 이룰 수 없었지만,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해방 직후 학교를 개교할 수 있었다.
나주민립중학교 설립자는 광주에서 벽돌공장을 운영하는 최일숙이었다.
최일숙은 고향의 후진을 기르기 위해 등록금을 거의 받지 않고 학교를 운영해 인근은 물론 광주의 수재들까지 몰려드는 명문학교였다.
나주 민립중학교(나주중 전신)가 특수한 여건에 있었기 때문에 머리 좋은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적 좌익 성향으로 무장돼 있었다. 이는 설립자 최일숙의 영향이 컸다.
최일숙은 오늘의 시각으로는 좌익계 인사였지만 당시로는 항일투쟁가요 민족운동가였다. 엄혹한 일제 때 박헌영 등을 자신의 벽돌공장에 벽돌공으로 은신시키고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백두산 등지에서 무장 투쟁을 벌이는 항일 투사들에게 군자금을 보내 준 인물이었다. 그래서 명망이 높았다.
학생은 300명이었으며 교사진은 20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교사 대부분이 물러났으니 학교는 휴교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신생 조국의 샛별처럼 이들은 밤에 잠을 잘 때도 뇌리에 떠오르는 아이들이었다. 이중 정진기·한갑수·기웅섭 학생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했으며 정진기 학생은 후일 매일경제를 창설했고, 한갑수 학생은 국회의원·농림부장관을 지냈고 기웅섭 군은 기업인이 됐다.
전북의 전주와 전남의 나주를 일컬어 전라도라는 이름에서 보듯 일찍이 나주는 목사(牧使)가 있던 곳이다.
다만 조선조 말 단발령이 내려질 때 나주에서 극심한 저항운동이 벌어졌는데, 이에 정부가 도청 소재지를 광주로 옮겨 버렸고, 그로 인해 개화의 신식 학교가 광주에만 들어선 반면 나주에는 중학교 하나가 서지 못한 것이다.
이에 최일숙은 사재를 털어 중학교를 설립하고, 그것도 사립이 아닌 전국 최초의 민립중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의 이념상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나주 사람이 세웠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민립중학교로 명칭한 것이다. 이런 설립 이념을 가졌으니 학풍은 민족주의적 좌익 성향이었으며 수재들이 근동에서 모여들어 학교의 위상은 드높았다.
그러나 미 군정이 좌익을 불법화하면서 학교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최일숙도 행방을 감췄다.
1946년 2월,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이승만이 뒤늦게 귀국해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다 나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이승만의 노선에 반발한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때 경찰은 이 박사를 옹위하는 쪽으로 방침이 세워져 학생들의 반대 시위를 거칠게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나주 벌판으로 도망가다 이 중 두 명이 영산강에 빠져 죽었다. 광주학생운동의 발상지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던 나주가 발칵 뒤집힌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청년 학생들이 죽은 학생 시체를 널빤지에 올려 메고 나주 중심가를 돌며 시위를 벌이자 시가지는 완전 무법천지가 돼 버렸다.
<이후 연혁>
1946. 9. 15 나주공립실수학교를 나주중학교로 개편
1959. 11. 2 나주역전 교사를 나주시 교동으로 이축
1961. 3. 11 나주여자중학교 분리
1961. 5. 23 나주중·나주고등학교 병합
1980. 3. 1 나주중·나주고등학교 분리
1998. 3. 1 나주중과 나주여중 나주중학교로 재통합
2019. 2. 14 제72회 졸업생 159명(졸업생 총 25,490명)
2021. 1. 12. 제74회 124명 졸업(총25,759명)
※참고자료 : 나주군지(1980, 나주군 발행), 나주중학교 총동문회 회지, 나주중학교 동문 구술과 앨범, 인터넷 여기저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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