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학교이야기

나주중학교 學校史2...나주민립중~나주중 교사시절 장지량 회고담

by 호호^.^아줌마 2021. 8. 8.

빨간 마후라’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의 나주민립중학교 교사시절 회고록

 

194511월 말의 일이다. 미군정이 들어서고 서울은 혼란상이 가중돼 무법천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경성대(서울대) 진학을 꿈꾸고 일봉암에서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육사 1년 선배인 홍승화가 갑자기 찾아왔다.

 

나주민립중학교 선생님들이 공석이래. 고향 후진들을 지도하러 나가자.”

 

해방 되자마자 인민공화국이 공포됐으나 미군정이 들어서고, 그래서 인민공화국은 불법화됐다. 이로 인해 좌익계 교사들이 모두 사퇴하면서 학교는 공백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학교의 딱한 사정을 들은 나는 고향의 중학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과 후배들이 더 이상 향학의 꿈을 저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가보니 교사는 나와 홍승화를 포함해 단 세 명뿐이었다. 나는 수학과 물리를 담당하고 학급 담임도 맡았다. 나의 담당 학급 중에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똑똑한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매일 새 교재 작성은 물론 번역 등사까지 맡았으며 내가 맡은 수학과 물리는 일본 육사의 교재를 그대로 가져와 가르쳤다. 이러니 실력이 대학생 이상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신생 조국의 학생들인지라 그들도 향학열이 높았다.

 

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의 와중에서도 고향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는 컸다.

나주민립중학교(나주중 전신)가 특수한 여건에 있었기 때문에 머리 좋은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적 좌익 성향으로 무장돼 있었다. 이는 설립자 최일숙의 영향이 컸다.

 

나는 사상적으로 무색무취했지만 그들에 대한 연민과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자중자애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담당이 물리·수학이라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해 다행이기도 했다. 열강만이 고향 후진을 위하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명감은 대단했다.

 

그러나 내 인생이 바뀐 계기가 왔다. 471월 서울대(경성대학이 서울대로 개칭됐음) 이승기 박사 주최의 물리·화학 중등 교사 연수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년 반 만에 가 본 서울은 정말 가관이었다. 좌우 대결의 혼란은 극에 달해 있었고, 나는 이런 이전투구 현장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는 데 안도했다.

 

이승기 박사의 물리 강의는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학문의 길이 이처럼 오묘하고 깊은 것인가 해서 저절로 경탄이 나왔다. 특히 이승기 박사는 일본 교토(京都)대학 출신으로 최초로 나일론을 발명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였다(하지만 그는 48년 월북, 김일성의 지원으로 북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했다).

 

나는 젊은 아내를 집에 맡겨 두고 나주 시내의 큰형님(나주 세무서 직원) 집으로 나와 학교에 다녔다.

그해 4월 나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으로 광주 4연대장을 맡고 있는 정일권 대령을 찾아갔다.

 

왜 나를 찾았나?”

 

, 시골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 가서 채병덕 1연대장님을 만나 뵈었더니 빨리 국방경비대에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워낙 정국이 혼미상태라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뭘 꾸물거려. 벌써 1~2기 선배들은 중위·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데. 시골 중학교 교사를 해 봐야 장차 산골 학교 교장하는 것이 전부 아닌가. 몇 달 후면 장교가 되는데 빨리 들어와.”

 

나는 마침내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6월 학교에 사표를 내고 전북 이리교육대에 응시 원서를 냈다.

 

1연대(태릉) 교육대에 입교한 것은 1947년 폭염이 쏟아지는 7월 초였다.

 

 

참고자료 :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달고(장지량 구술, 이계홍 정리, 2006.6.15., 이미지북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