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 / 전순영
영글대로 영글어 약이 한참 오른
누런 밤송이가
알밤은 어데다가 쏘옥 빼버린
껍데기 밤송이가
입을 쫘악 벌린 악어같이 내게로 온다
눈이 찡그려지고 가슴이 조여들고
맥박이 쿵쿵 소리질렀다
식도 속으로 기어들어 온 밤송이를 삼키려니
쓰디쓴 피가 목구멍 속으로 뚝뚝 떨어진다
타악 뱉아내어 本家로 돌려보낼까 하다가
눈을 따악 감고 꿀꺽 삼켰더니
글쎄 바리데기 효자 한다고 고놈이
포옥 삭아서 국물은 한사발 약주로 떠내고
찌꺼기는 오장육부에 두둑이 묻히는
귀를 세우고 / 전순영
토끼처럼 귀를 세우고
대문에도 마당에도 전화기에도 나는 걸려 있다
대낮에 어둠 속을 헤엄치고 있다
미끄러지고 있다
전화기가 입을 열 때마다 뛰어가 보면
지나가는 바람일 뿐
긴 꼬리 끌고 넘어가던 해가
뒷걸음질치다 벼랑으로 떨어졌다
마음이 또각 부러졌다
절뚝이며 기어오르는 언덕에서
내가 나에게 길을 묻는다
눈을 감고
저 하늘 호수에다 이 달궈진 가슴 꺼내 던지니
피시식 번져오는 수증기
목이 마르다
한 겹 녹은 벗겨지고
어디선가 마른 목소리
잿빛 꿩 한 마리가 겨울을 쪼고 있다
겨울은 꼼짝도 않는데
그 작은 부리로 언 가슴을 쪼고 있다
자꾸자꾸 쪼고 있다
그 소리소리 밀물로 차올라 이제 나는
섬이 되는가
사진 <최민식>사진작가
전화 / 전순영
시계 바늘이 V자를 긋고 있었다
마른 잎 부서지는 거리에서 나는
동전으로 두레박질을 하고 있다
이 길고 질긴 끈을 우물 속으로 천천히 풀어 넣으면
동전은 그냥 우루루 뛰어나오고 나오고, 다시 넣으면
빨갛게 불이 달아
터널 속에서
어디가 출구인지 의자인지 알 수 없는
안개 자욱한 강이 흐르고
물감처럼 뿌리고 가버린 날들의 이야기가
타인의 주머니 속 지폐인양 더욱 허기져 갔다
창밖에는 땅거미 내리고
늑골 사이엔 노란 등이 가물거리고
흙도 나무도 어둠속에 묻혀버린 지금
빈집 쓸고가는 바람 소리
깨져버린 시간 부스러기 틈새로 여직 걸려있는
마른 두레박
시계바늘이 V자를 긋고 있었다
말에 베다 / 전순영
그의 첫마디가 앞뒤로 날을 세우고 귓전에 와 닿자 섬뜩하더니 핏줄을 타고 몸속으로 퍼진다 한마디 한마디 쏟아놓은 말은 달군 총알처럼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 막으려고 입을 열었더니 되레 입을 막아버리는 총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속에 와 박힌 말들 날을 세우고 마구 뛰어다닌다 오장육부가 피를 흘린다 약이 없다 병원을 찾아 몇 만리를 헤맸을까
곳간 / 전순영
내 가슴속에는
타다가 만 노래가 있네
잠겨 있네
녹이 슬어 있고 겹쳐져 있네
천년을 갇혀 뼈만 남은
잿빛 그늘
빗장 열릴 그날을 바라보며
등나무 덩굴처럼 허공을 감고 돌아
휘어진 목으로 뒤켠에 서있는
전순영 시인 (全順永)
전남 나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등단
시집 <누가 이 바람을 막을 수 있을까>
<목이 마른 나의 샘물에게> 2001년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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