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주의시인

2009 나주문학 집중의 해 특별기고- 나주 근 ․ 현대문학에 오기까지

by 호호^.^아줌마 2009. 4. 20.

2009 나주문학 집중의 해 특별기고


영산강 물면위에 문학의 뗏목을 타고

- 나주 근 ․ 현대문학에 오기까지 -

                                   

 

 

환경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문학을 만든다.

그만큼 인간의 생존은 그 생존을 에워싼 환경과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생존 문제를 담아내는 문학 또한 인간이 어떻게 환경과 생존을 조화시켜 가느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환경은 때로 인간에게 우호적일 때도 있지만 역경의 가시밭길 위에 몰아세우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여 환경위에 오른 인간은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 김 종 / 시인 ․ 나주문학집중의해조직위원장



나주의 기질과 정신을 녹여내는 문학


여러 해전 어느 개그맨이 인간에게‘지구를 떠나거라’며 웃긴 일이 있었다. 인간이 지구를 떠나가면 어디로 갈 것인가. 닐 암스트롱이나 이소연처럼 로켓을 타고 달나라나 우리 지구와 환경이 비슷하다는 화성 같은 천체로 옮겨가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 되기에는 아직 인간의 과학적 능력은 많이 못 미쳐 보인다. 물론 코미디 속에 담긴 진의는 보기 싫은 자들이여 빨리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라는 얘기일 터이다.

문학은 인간이 만든다. 문학은 인간을 떠나서는 창작될 수도 읽힐 수도 없다. 환경에 기대고 살아가는 인간은 살아가면서 겪는 환경과의 문제를 여하히 조정해 가느냐의 과정을 문학의 내용으로 담아낸다.

나주 문학을 생각하면서 역사에 대한 문제를 떠올렸다. W.딜타이는 “우리들은 역사의 관찰자이기 전에, 역사적 존재”라고 했다. 노발리스 또한 “어떠한 역사도 세계사여야 하고 소재의 한 토막을 역사적으로 다루는 것도 다만 역사 전체에 관련시킬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의 말이 별난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어느 누구도 역사에 대해서는 3자적인 입장이 아니라 즉자적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다루는 한 지역 문학의 세월도 세계사적 구도위에 다루어져야 하며 역사와 관련할 때만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확실히 역사를 쓰는 사람에게 사람 자체가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을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자신이 위치 매김에 들어설 때는 주변인이 아닌 중심인으로 바뀌고 그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역사기술의 전체성 또한 그렇다. 늘상 역사기술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목은 자신이 기술해야 하며 일단 자신과 관련지을 땐 자신의 역사적 능동성을 최대화시키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한 갈래인 문학사도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서 주체자의 능동성으로 기술되는 것이다.

나주에서 길러진 시인 작가들도 나주의 환경과 역사를 노래 부르고 문자화시켜 왔다. 태어난 곳이 나주였을 뿐 어려서부터 외방으로 나가 작품을 창작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일생을 나주의 하늘을 지키며 나주의 기질과 정신을 용광로에 쇳물처럼 녹여내면서 문학창작에 생애를 바쳐온 작가도 있다.

나주에서 태어났거나 나주를 체험한 시인, 작가들은 나름의 하늘과 산천이 자신의 흉중에 우주적 의미로 자리 잡았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시인, 작가에게 ‘나주’는 움직일 수 없는 천석고황의 땅일 터이다. 현재적인 시간에 나주에 기반을 둔 시인, 작가들의 기질과 표정을 기록으로 재는 일은 그래서 ‘나주’라는 생존적 당위성을 위해서도 의미있는 일이다

나주는 예로부터 풍요로운 고을이다. 단군 이래 농경문화를 이루었고 지석묘나 여타 출토품을 통해 선사시대부터 고을 형태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삼한 때는 이미 부족국가로서 틀을 갖추었고 마한에 속한 54개의 나라 중 하나인 불미국(不弥國)이 바로 나주였었다.

일본측 기록에도 반남(潘南)에 반고국(半古國)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나주에 지방 행정 단위의 발라군(發羅郡)이 개설된 것은 백제가 마한을 병합한 서기 8년의 일이었고 이어 통의군(通儀郡)으로 바뀌고 반고국은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이 되면서 이들 지명은 백제군의 군사기지가 되어 많은 이야기를 전하게 만든다.

통일 신라 이후 통의군은 금산군(錦山郡), 금성군(錦城郡)으로 고쳐 불렀다. 이후 반나부리현은 반남군이 되었으나 이들 모두가 무진주에 소속된 고을이었다. 남평은 미동부리현으로 불렸고 미동부리 정(停)이라는 이름의 군사기지가 되기도 했다.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군웅들이 나주를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견훤 이후 왕건의 등장이 나주의 역사적 의미를 드높이게 된다.


풍년이 들어찬 들녘엔 풍년문학이


고려 성종 2년(983)에 지방관제가 정비되면서 나주는 전국 12목 중 하나가 되고 목사(牧使)가 파견된다. 조선조까지 이같은 기능은 이어져 독립된 행정구역인 남평까지 나주에 편입되었다. 그 후 접어든 1927년에는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바뀌었고 1931년에는 나주면이 나주읍으로 승격되면서 나주는 2읍 16면의 크나큰 고을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7월 1일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로 발족한지 5년 반만인 1986년 1월 1일을 기해 나주시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나주는 비옥한 평야지대의 농산물만큼 시인, 작가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물론 시인, 작가의 숫자를 고을 면적에 비례하여 산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주라는 고을의 문화적 조건에 비추어 숫자도 적고 걸출한 작품을 창작한 문인도 생각처럼 많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말은 필자 자신이 태를 묻고 성장했으며 이제는 지워버릴 수도 없는 숙명의 땅에 대한 정직한 생각이다.

들녘의 생산력은 그에 맞는 기후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정영감과 여의주〉를 비롯한 여러 민간설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둘째 비(妃)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와 관련된 <흥룡동전설(興龍洞傳說)>, 영산포의 지명과 관련을 갖는 〈가마태마을 전설〉, 조선조말 세도가였던 김좌근(金左根)의 애첩 나합(羅閤)의 출생과 성장기의 일화가 깃든 〈나합샘 전설〉 등은 나주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나주 목사 〈박상 이야기〉나 의병장 〈김천일 이야기〉등도 이 지역민들의 기질과 정신을 보여주는 의미 깊은 설화들이다.

시정신을 이루는 민요는 곡창지대였던 탓에 대부분 시나위조와 결합된 남도특유의 들노래가 많다. 〈모찌기 노래〉, 〈모심기 노래〉, 〈논매기노래〉, 〈장원질 노래〉 등등은 들녘 사람들의 생활정신이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노래들이다. ‘모찐다’는 말은 모판의 ‘모’를 논에 심을 수 있도록 포기를 갈라낸다는 뜻이며 모심기와 김매기를 거쳐 〈장원질 노래〉에 이르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흥과 멋은 풍년을 향한 염원이 되어 하늘에 닿아 있다.

 

 

애롱대롱 지화자 좋네

풍년새 운다 풍년새 울어

새해년도가 풍년이로구나

노적봉을 짊어나 지고

이리 저리 길 비켜라

소를 타고서 말도나 타고

요보소 대문을 열소

수만석을 걷어 들이고

우리 마당에 놓아나 보세

 

 

풍년을 구가하면서 어깨춤을 췄던 나주 사람들. 풍년으로 들어찬 들녘을 보며 ‘노적봉 짊어나 지고 이리저리 길 비켜라’하며 당당히 운율을 다듬던 이 지역 사람들의 노래 정신은 확실히 문학은 환경의 산물이며 인간과 문학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한다. 어느 시대인들 등 다습고 배부른 세월만큼 화려한 때가 있었으랴.

가도가도 남도땅 황톳길 삼백리는 배고픈 팍팍한 길이었다. 산봉우리마다 숨어서 이산저산 흔들며 울어대던 뻐꾸기 소리는 생각할수록 배고픔만 키웠다. 나물죽이 아니면 오뉴월의 길고 긴 하루해를 넘기기가 어려워‘보릿고개(麥嶺)’라는 어휘 속에 그 지워버릴 수 없는 애환을 담아두었다. 그 같았을 때 〈장원질 노래〉같은 풍년가가 온 고을 들녘에 가득했다면 얼마나 화락한 광경이었을까.



윗자리에서 표해록의 작자 최부가 검색되고


지형으로 보아 노령산맥의 서북쪽에 480m의 높이로 서서 주위 사방에 크고 작은 산봉을 거느리고 있는 금성산(錦城山)은 장형(長兄)격의 요충지이다.

동북쪽에 무등산(無等山) 남쪽에 월출산(月出山)과 겨루고 있지만 이들 산과는 또 다른 형국의 개성으로 솟아 있다. 북동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지석강(砥石江)과 만나면서 영산강이 되고 나주평야의 넓은 몸채를 적시고 있다. 영산강의 하류 쪽에는 강폭이 좁은 관계로 상습적으로 수해를 입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 하천에 조수(潮水)가 밀려들면 이 물을 이용하여 갖가지 물산이 이동하였고 오색천을 달고 풍어의 기쁨을 휘날렸던 ‘황시리 배’의 출현은 이 지역 나주의 멋과 낭만의 풍속도였다.

나주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연대 추정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로 거슬러 간다. 그러나 문학 쪽에서의 기록은 조선조 전기까지 내려와야 한다. 아무래도 이 시기는 한시나 한문학, 가사, 시조 등이 형식적 성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표해록(漂海錄)>의 작자 최부(崔傅, 1454~1504)가 가장 윗자리에서 검색되지만 55세 때인 성종 3년(1472) 병과에 급제하여 금성교수(金城敎授),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장수현감(長水縣監) 등을 지낸 사람으로 그가 금성교수로 일하던 성종 11년(1480)에 경기체가 형식의 <금성별곡(錦城別曲)>을 지었다.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 <함양박씨세보(咸陽朴氏世譜)>에 이 작품이 실렸는데 총 6장으로 자신이 가르친 제자 10인이 소과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었는데 그 감격을 담아낸 것이다.

제1장에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나주고을은 많은 인재가 배출되는 곳임을 자랑하였고 제2장에서는 이 고장 유생들이 향교를 중심으로 일으킨 면학의 기품을 찬양하였다. 제3장에서는 당시 나주목사 김춘경(金春卿)과 통판 오한(吳漢)의 선정을 칭송하였고 제4장에서는 작자 박성건의 가르침이 제자들의 교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을 자랑하였다. 제5장에서는 유생 10인의 급제자 중 나주의 벌족인 나주 나씨 일문에서 6인이나 급제한 영광을, 제6장에서는 영광된 축하연에서 가무와 음주로 흥겹게 어울리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 유생들을 칭찬하였다. 전체적으로 지역 사대부들의 자긍심을 읽을 수 있고 찬양과 감격을 담아낸 경기체가의 전통적 성격을 잘 음미할 수 있다.

형식은 정격보다는 변격의 모습을 취했고 후손들의 소작인 <금강별곡(金剛別曲)>,<낭호신사(郎湖新詞)>,<만고가(万古歌)> 등에 영향을 주었다.

오겸(吳謙, 1496-1582)의 <국제선생유집(菊齋先生遺集)>, 백인걸(白仁傑,1497-1579)의 <휴암선생실기(休庵先生實記)>, 나세찬(羅世纘 1498-1551)의 <송재선생문집(宋齋先生文集)>, 임형수(林亨秀, 1514-1547)의 <금호유고(錦湖遺稿)>, 박순(朴淳 1523-1589)의 <사암집(思庵集)>, 임진(林晉, 1526-1587)의 시조 1수, 정개청(鄭介淸, 1529-1589)의 <우득록(愚得錄)>, 김천일(金天鎰 1537-1593)의 <건재선생전집(健齋先生全集)>, 이발(李潑, 1544-1591)의 <칠서강의(七書講義)> 등이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라는 산봉우리를 얻기까지의 성과들이다.


박순의 표현을 ‘저절로 청초하다’한 허균


이들 중 나세찬은 조선조 중 ․ 명종대 인물로 벼슬이 예문관검열, 봉교(奉敎) 등에 올랐으나 당시의 권신인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았고 고성으로 유배되었다. 이 유배지에서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는 국문 가사(歌詞)를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임형수는 제주목사까지 지냈으며 선정을 편 인물로 백성들 사이에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명종 2년 (1547)에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사사되었는데 그때 나이 34세였다. 문무겸전의 호남자였던 그는 변론에 능하였고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의 문집 〈금호유고〉에 실려있는 〈눈속에 석문고개를 지나며〉라는 작품은 그의 나라 사랑하는 우국충정이 읽힌다.



봄산을 비웃듯 밤사이 눈이 내려

낮에도 하천 바닥은 원근을 모르겠구나

수심에 젖은 병든 나그네 한기가 뼈에 스며

어인 일로 고갯마루엔 구름이 머무는가


밤사이 봄산을 비웃듯 내리는 눈은 예사롭지 않는 상황을 암시한다. 그나마 낮에도 하천바닥의 원근을 볼 수 없다 했으니 요즘 말로 안개정국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뼈에 스민 추위를 당한 병든 나그네는 시인 자신일 듯하며 산마루에 머무는 구름은 임금의 지혜를 흐리는 간신 무리일 것이다.

박순은 젊어서 서경덕(徐敬德)을 사사했으며 31세(명종 8년)의 나이로 문과정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대제학,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박순은 64세에 벼슬을 물리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문집 〈사암집〉에는 452제에 607수의 한시가 실렸으나 이중 384수가 칠언절구이다.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박순의 칠언절구를 가리켜‘마땅히 천지와 더불어 함께 하리니 끝내 꾀하여도 미칠 수 없다’고 평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선가에서 취해 자다 얼결에 깨어보니/흰구름 덮힌 골에 달이 지는 때라/긴 수풀 밖 훌쩍 홀로 나서니/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듣누나.”이 시에서 우리는 박순이 지닌 도가적 자연 정신을 선비세계의 달관으로 음미하게 된다. 허균(許筠)은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박순이 세상을 비웃고 탄식한 표현까지를‘저절로 청초하다’하였고 그를 아예‘박숙조(朴宿鳥)라 명명하여 문장과 시를 마음껏 칭찬했다.

임진은 임제의 부친으로 명종 원년(1546)에 무과에 급제하여 제주목사 병마절도사 등을 지낸 무인이다.


활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분성변에 통통(筒筒)베고 누웠으니

보완다 보왜라 소리에 잠 못 들어 하노라.


무인다운 기개가 넘치는 작품이다. 당쟁과 사화로 얼룩진 당시의 시대상을 통매하듯 꾸짖은 그의 기개와 정신이 아들 임제에게 이어진다.

임제의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 풍강(楓江), 소치(嘯痴), 벽산(碧山) 등이며 나주가 본관이다.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부친 밑에서 자랐고 스승이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뜻을 둔 과거에 번번이 실패하자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한 현실세계에서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던 22세 때의 겨울, 호서(湖西)에서 서울로 가던 길에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져 사제의 연을 맺었다.

그로부터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며 28세부터 이듬해까지 생원, 진사, 알성시 등에 연이어 급제한 뒤 흥양현감, 서 ․ 북도 병마사, 예조정랑, 홍문관지제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상대를 헐뜯고 편당을 지어 공명 앞에서 바둥거리는 속물들의 몰골에 환멸을 느껴 그가 거친 관직들은 그의 생애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린 그는 글은 취하되 사람사귀기를 꺼렸다.


호협한 성격과 공명을 초월한 일세의 문장가 임백호


서도병마사로 제수되어 임지로 향하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읊은 시조는 유명하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풍류남아로 기생의 무덤 앞에서 시조를 읊고 제사를 지냈다하여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쟁과 모함만이 횡행하던 시대에 사대부의 처지로 기생의 무덤 앞에서 추모의 정을 바친 그는 자신의 일이 과대하게 부풀려져도 항의 한마디 하지 않았다.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도 자못 멋스럽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없이 길을 나니

산에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잘까 하노라


‘한우’‘맞았으니’‘얼어잘까’등의 표현이 모두 중의법으로 이루어졌다. 함경도를 유람하던 중 사랑할만한 여인을 만난 사내장부가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자겠다(어우러져 자겠다)는 표현을 한우에게 전하자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스승 성운이 세상을 떠나자 지기(知己)를 멀리하고 방황하다 고향인 구진포(九津浦) 회진에서 39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임종시에 자식들이 울자 “주위 사방의 오랑캐들도 제 임금은 황제라 칭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중국을 주인으로 모시는구나. 이런 나라에서 내가 살고 죽은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울지들 말아라.”라고 당부한 <물곡사(勿哭辭)>는 임제의 기질과 정신을 유감없이 담고 있다.


당시의 성정에 비추어 사대부라면 으레 친자연한 안빈낙도의 귀거래사나 사미인곡류의 군은가(君恩歌)에서 자유롭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만은 여기에서 멀찍이 벗어나 호협한 성격과 공명을 초월한 기개로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면서 술과 여인과 친구를 가까이 하는 일이 많았다.


이외에도 신흠과 이항복이 서문을 쓴 〈임백호집〉 4권과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元生夢遊錄(원생몽유록)>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다. 시나 문장에 호방, 쾌활한 명문장가였던 그는 봉건적 권위에는 반항적이었으나 주정적이며 드물게 낭만성을 보인 리얼리스트였다.

임제라는 봉우리를 넘어서면 김우윤(金友尹 1550-1597)의 <용만유고(龍灣遺稿)>, 나덕명(羅德明, 15511-1610)의 <소포유고(嘯浦遺稿)>, 홍천경(洪千璟, 1553-1624)의 반환집(盤桓集), 최찬(崔纘, 1554-1624)의 <고송최공유고(孤松崔公遺稿)>, 최희량(崔希亮, 1560-1651)의 <일옹유고(逸翁 遺稿)>, 진경문(陳景文, 1561-1642)의 염호집(炎湖集),임회(林檜, 1562-1624)의 <관해유고(觀海遺稿)>, 나위소(羅緯素, 1582-1666)의 <송암유고(松岩遺稿)>, 침굉(枕肱, 1616-1684)의 <귀산곡(歸山曲)> 등 3편의 가사작품, 김려(金礪, 1681~?)의 <서원연고(瑞原聯稿)>, 나경환(羅景煥, 1830-1906)의 <성암가장(性菴家藏)>, 정석진(鄭錫珍, 1851-1896)의 <난파유고(蘭波遺稿)>, 羅允煦(나윤후,1853-1913)의 <금파집(錦波集)> 등이 근대 이전까지의 한시, 한문학, 가사, 시조 작품을 남긴 나주문학의 별자리들이었다.


나주, 내밀하면서도 속도감있는 문학의 강물이

나위소는 윤선도(尹善道)와 교분이 두터웠고 42세(인조 1년, 1623)에 문과에 급제하여 71세때 경주목사를 그만 두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다. 벼슬을 물린 후에는 고향의 수운정 승경을 즐기며 물외한정(物外閑情)을 벗삼았다. 그가 남긴 <강호구가(江湖九歌)>는 고향땅 수운정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나씨가승(羅氏家乘)>에 수록되어 전한다.


달밝고 바람자니 물결이 비단인가

단정(短艇)을 비겨놓고  오락가락하는 흥을

백구야 하 즐겨 말거라 세상 알까 하노라


식록(食祿)을 그친 후로 어조(漁釣)를 생애하니

헴없는 아이들은 괴롭다 하건마는

두어라  강호한적(江湖閑適)이 이내 분인가 하노라


선비사회 강호시가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낸 작품이다. 자연 가운데 처하여 느낀 흥취를 한세월(閒歲月)의 정서로 노래한 이 작품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동일선상에 놓인다 하겠다.

침굉은 드물게 활동한 승려 작가로 광해 8년(1616)에 태어나 13세대 장흥천관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서산대사의 수제자였던 소요당대사(消遙堂大師)를 스승으로 하여 선승의 길을 걸었던 그는 속가의 족장인 윤선도에게 자연스레 시가 문학에 눈떴을 법하며 〈귀산곡〉, 〈태평곡〉, 〈청학동가〉등 3편의 가사작품을 남겠다.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스스로 나아갈 바의 진로를 노래한 〈귀산곡〉은 인간세상의 부귀공명을 떠나 자연 가운데서 청빈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태평곡〉은 그의 작품 중 가장 긴 것이며 사이비가 판치는 승려세계의 무분별한 생활상을 질타하고 있다.


어와 저것들이 무슨 복덕 심엇관대

고봉대혜(高峰大惠) 후에 나서 말세면(末世眠)을 멀었는가

고봉대혜 계신다면 머리 깨서 개 주리라.


산중 선승답지 않는 과격한 표현이 읽힌다. 그러나 불교계의 타락상을 꾸짖은 작품이 승려의 운율감각으로 노래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김려는 향리에서 생활한 평범한 선비였다. 작품은 <용산가(龍山歌)>, <귀거래사(歸去來辭)>, <지지가(知止歌)> 등 3수가 〈서원유고〉라는 문집에 실려있다.


용산이 높고높고 백운이 깊고깊다

줄 없는 거문고를 뉘 알아 들을 소냐

두어라 낙화만전계(落花滿前溪)하니 세상 알까 하노라


‘용산’과 ‘백운’이 선경처럼 아름답고 낙화가 가득 떠가는 계곡이니 영낙없는 무릉도원이다.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는 시인은 혹여 뉘알고 찾아올까봐 ‘줄 없는 거문고’를 켜고 있는 것이다. 선비의 안빈낙도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 작품이다.

문학사를 포함하여 우리네 정신사적 흐름은 고대, 중세, 근세와 근 ․ 현대를 거치는 길목을 단절의 강물이 흘렀던 것처럼 인식해 왔다. 그러나 한시나 가사, 시조 등 시가 문학을 포괄하고 한문학까지를 아우르는 흐름이 단절된 일없이 내밀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역사의 강물을 흘려보냈다. 그런 터에 1894년 갑오경장의 의미를 신문물 유입의 중심에 세워 두곤하였으나 우리가 소루하게라도 살펴온 근대 이전의 문학사적 성과는 근대와 현대를 함께 묶는 우리들 시대의 또 다른 추진 에너지로써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1. 백호 임제 물곡사비(勿哭辭碑)


2. 나주는 곡창지대였던 때문에 대부분 시나위조와 결합된 남도특유의 들노래가 많다.(사진은 동강봉추들노래 시연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