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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시인

나는 항상 옳은가?

by 호호^.^아줌마 2009. 5. 11.

나는 항상 옳은가?

 

                                                                   미수 허목의 새겨들을 한말씀

누구나 다,
‘나는 옳은 일을 능히 하고 그른 일은 하고자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의 행동을 꼼꼼히 살펴보면, 옳은 것은 적고 그른 것은 많다.

人之言莫不曰, 吾能於是而不願於非。
인지언막불왈, 오능어시이불원어비。

然考之行事, 則於是者寡, 於非者蓋衆也。
연고지행사, 즉어시자과, 어비자개중야。

임유후(任裕後)라는 사람이 작은 집을 짓고 ‘어시재(於是齋)’라는 이름을 붙인 뒤, 허목(許穆, 1595∼1682)에게 기문을 부탁하였습니다. 허목은 그 글을 통해 우리에게 ‘옳고 그름’에 대한 착각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하는 행동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조차도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또 남의 잘못은 대부분 잘 찾아내고 지적합니다. 눈에 잘 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남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버럭 화부터 내고 자기가 틀렸다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듭니다.

이는 세상과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락산에서 도봉산을 바라보면 도봉산이 낮아 보이고 도봉산에서 수락산을 바라보면 수락산이 낮아 보인다고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보니까 상대가 낮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니,

남이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 버럭 화부터 내지 말고, “혹시 나에게 정말 잘못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나의 어떤 모습이 잘못된 것으로 비쳤을까?” 이런 생각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반대로 남의 잘못이 보이거든 그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혹시 나에게는 저런 모습이 없을까?”, “남에게 비친 내 모습도 혹시 저렇지 않을까?” 이렇게 늘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허목은 누구인가? 

 

1595(선조 28)~1682(숙종 8).

나주가 낳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나주 영산포 안창동에 사액서원 미천서원이 있으며, 미수기언 목판이 보물이다. 

 

남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아버지는 현감 교(喬)이며,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글을 배우고,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0년(현종 1)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朞年服:만 1년상)에 반대하고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했다.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그도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서인의 주장에 따라 정해진 대공복(大功服:만 9개월)의 모순이 지적되어 앞서 그의 설이 옳았다고 인정됨에 따라 대공복은 기년복으로 고쳐졌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675년(숙종 1)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온건론을 편 탁남(濁南)과 대립,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했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듬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삼척부사 허목
  글쓴이 : 김문식     날짜 : 2009-04-30 10:14     조회 : 31    

허목(1595~1682)이 삼척부사로 근무한 때는 1660년(현종 1) 10월부터 2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는 56세에 정릉참봉이라는 말직으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63세에는 산림(山林) 출신으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모친인 자의대부의 복상 기간을 두고 예송이 있었는데, 허목은 일년복을 주장하는 송시열에 맞서 삼년복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으로 부임할 때 허목은 나이는 66세,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66세에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어 갔지만


삼척은 백두대간이 동해와 맞닿은 곳에 위치한 동쪽 끝의 고을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실직국이 있었는데 파사왕 때 신라에 투항했고, 지증왕 때 이사부가 이곳 군주로 있다가 아슬라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을 평정했다. 조선시대에 삼척은 왕실의 주목을 받았는데,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외가이자 목조가 거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부사로 부임한 허목은 매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삼척 사람들은 검소하고 질박하지만 비(非)유교식 제사인 음사(淫祀)를 좋아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 허목은 유교식 예제를 보급하는 일에 진력했는데, 각 고을에 향약을 보급하고, 이사(里社)를 설치하여 풍년을 비는 제례를 올렸으며, 제례를 마치면 고을의 연장자들이 모여 향음주례를 거행하게 했다.


허목은 삼척의 명승지를 돌아보고 중요한 건물을 증축했다. 그는 대표적 명승지인 죽서루에 올라가 멋진 경치를 감상하고 현판 글씨를 남겼다. 죽서루 옆에는 서별당이란 관아 건물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퇴락해 있었다. 허목은 이 건물을 중수하고 기문(記文)을 지었다. 허목은 두타산을 유람한 「두타산기」를 남겼는데, 삼화사, 호암, 반학대, 중대사, 학소대, 석봉을 거치는 경로였다. 삼척부 읍치에는 광해군 때 삼척부사로 왔던 김효경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는데, 역시 퇴락해 있었다. 허목은 이 건물을 옮겨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이를 기록한 기문을 지었다.


동해에는 바람이 많고 파도가 심했는데, 특히 장마철이 되면 강 하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허목은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해 바닷가에 우임금의 전서체로 쓴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이다. 이 비석은 허목의 글씨가 일품인 데다 도가와 주술적인 비유들이 들어있어 매우 특이하면서도 기괴하다. 척주동해비의 탁본은 물과 불이 침범하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부적처럼 사용되었는데, 이 비의 탁본은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삼척 미로리에는 예전부터 목조 부모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목조 부친의 묘소는 읍치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노동에, 모친의 묘소는 30리 떨어진 동산에 있다고 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선대의 묘소를 찾아 수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선조 때까지 묘소의 위치를 확정하지 못했다. 1662년에 허목은 이를 고증하는 「노동이묘기(蘆東二墓記)」를 작성했는데, 목조가 살았던 옛 집터와 텃밭이 발견되었으므로 그 인근에 있는 두 묘소가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이었다. 허목의 기록은 1899년에 고종 황제가 삼척에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조성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여러 유의미한 성과를


허목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척 지역의 지리지인 『척주지(陟州誌)』 2권을 편찬한 것이다. 허목은 관아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고을의 노인들을 찾아서 예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었고, 관아의 서리들이 보관하던 고문서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대조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정리했다. 허목은 자신이 현지에서 활동한 사항도 상세히 기록했는데,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행적은 모두 이에 근거한 것이다.


허목이 삼척으로 간 것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척으로 좌천될 당시 그는 66세의 노인이었으므로, 실망과 한숨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목이 삼척에서 이룩한 업적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의미가 있었다. 필자는 갖은 악조건에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끝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들이는 허목의 행적에서 ‘실학자’로서의 풍모를 발견하게 된다.

 


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