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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부사 허목 |
글쓴이 : 김문식 날짜 : 2009-04-30 10:14 조회 : 31 |
허목(1595~1682)이 삼척부사로 근무한 때는 1660년(현종 1) 10월부터 2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는 56세에 정릉참봉이라는 말직으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63세에는 산림(山林) 출신으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모친인 자의대부의 복상 기간을 두고 예송이 있었는데, 허목은 일년복을 주장하는 송시열에 맞서 삼년복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으로 부임할 때 허목은 나이는 66세,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66세에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어 갔지만
삼척은 백두대간이 동해와 맞닿은 곳에 위치한 동쪽 끝의 고을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실직국이 있었는데 파사왕 때 신라에 투항했고, 지증왕 때 이사부가 이곳 군주로 있다가 아슬라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을 평정했다. 조선시대에 삼척은 왕실의 주목을 받았는데,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외가이자 목조가 거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부사로 부임한 허목은 매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삼척 사람들은 검소하고 질박하지만 비(非)유교식 제사인 음사(淫祀)를 좋아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 허목은 유교식 예제를 보급하는 일에 진력했는데, 각 고을에 향약을 보급하고, 이사(里社)를 설치하여 풍년을 비는 제례를 올렸으며, 제례를 마치면 고을의 연장자들이 모여 향음주례를 거행하게 했다.
허목은 삼척의 명승지를 돌아보고 중요한 건물을 증축했다. 그는 대표적 명승지인 죽서루에 올라가 멋진 경치를 감상하고 현판 글씨를 남겼다. 죽서루 옆에는 서별당이란 관아 건물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퇴락해 있었다. 허목은 이 건물을 중수하고 기문(記文)을 지었다. 허목은 두타산을 유람한 「두타산기」를 남겼는데, 삼화사, 호암, 반학대, 중대사, 학소대, 석봉을 거치는 경로였다. 삼척부 읍치에는 광해군 때 삼척부사로 왔던 김효경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는데, 역시 퇴락해 있었다. 허목은 이 건물을 옮겨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이를 기록한 기문을 지었다.
동해에는 바람이 많고 파도가 심했는데, 특히 장마철이 되면 강 하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허목은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해 바닷가에 우임금의 전서체로 쓴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이다. 이 비석은 허목의 글씨가 일품인 데다 도가와 주술적인 비유들이 들어있어 매우 특이하면서도 기괴하다. 척주동해비의 탁본은 물과 불이 침범하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부적처럼 사용되었는데, 이 비의 탁본은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삼척 미로리에는 예전부터 목조 부모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목조 부친의 묘소는 읍치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노동에, 모친의 묘소는 30리 떨어진 동산에 있다고 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선대의 묘소를 찾아 수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선조 때까지 묘소의 위치를 확정하지 못했다. 1662년에 허목은 이를 고증하는 「노동이묘기(蘆東二墓記)」를 작성했는데, 목조가 살았던 옛 집터와 텃밭이 발견되었으므로 그 인근에 있는 두 묘소가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이었다. 허목의 기록은 1899년에 고종 황제가 삼척에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조성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여러 유의미한 성과를
허목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척 지역의 지리지인 『척주지(陟州誌)』 2권을 편찬한 것이다. 허목은 관아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고을의 노인들을 찾아서 예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었고, 관아의 서리들이 보관하던 고문서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대조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정리했다. 허목은 자신이 현지에서 활동한 사항도 상세히 기록했는데,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행적은 모두 이에 근거한 것이다.
허목이 삼척으로 간 것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척으로 좌천될 당시 그는 66세의 노인이었으므로, 실망과 한숨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목이 삼척에서 이룩한 업적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의미가 있었다. 필자는 갖은 악조건에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끝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들이는 허목의 행적에서 ‘실학자’로서의 풍모를 발견하게 된다.
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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