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만나기
김현임
양귀비꽃이 요염하게 벙그러진 뜨락에도 시큰둥 고개 돌리고, 하얀 강아지 다섯 마리 구물거리는, 예전 같으면 중뿔나게 드나들었을 하얀이의 산실(産室)도 겨우 체면치레 방문, 또오, 뭐가 있었나?
한동안 나를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행복감으로 빠져들게 하던 것들이....... 맞다. 예쁘다, 예쁘다 찬탄하며 가져 온 돌들도 방치에 둔 지 며칠 째다.
완벽함에 대한 파괴충동을 일러 ‘다비드증후군’이라 한다던가. 무엇이 부족하랴싶게 나름대로 그리 부족할 것 없는 삶이건만 도대체 신나는 게 없고, 고운 게 없고, 맘에 든 게 없으니 극심한 자폐증에 예의 다비드증후군이 겹친 듯한 요즘이다.
‘백리길이 끝나는 지점에서도 인생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가혹한 채찍을 든다’는 지금의 내 심사에 어울리는 이 문구는 어디서 따내 적었을까. 하늘이 나를 지으신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닫는 나이라는 지천명을 훌쩍 넘기고도 까불다 호되게 채찍 맞은 망아지 속내는 여전하다.
하긴 얼락녹을락하던 그동안의 삶에 어지간히 지친 것도 같다. 남을 형편에 따라 다잡고, 늦추고, 칭찬하고, 책망하며 가까이하다가 때론 멀리도 하며 놀리는 양을 뜻하는 얼락녹을락 아니던가. 본시는 얼음이 얼다가 녹았다가 하는 모양이나 얼 듯 말 듯한 모양을 본 떠 만든 말이라는데 정말이지 내 생을 잡고 누군가 얼락녹을락 조롱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간신히 버티다가도 문득 문득 탄식처럼 떠올려지는 우리말이다.
어쨌든 바로 그럴 때이다. 나는 서둘러 버스를 탄다. 지친 내 생의 활력 충전소인 서점을 향하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편안히, 또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인터넷 서점은 단호히 거부한다. 사실 책 사는 돈만큼은 아끼고 싶지 않다. 왜냐면 책이야말로 내게는 애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니 사랑은 결코 계산하지 않는 법, 손해보고도 외려 흐뭇해하는 기묘한 공식이 통하는 청정지역 아닌가. 단지 고르는 시간도 길고 기준 또한 꽤나 까다롭다.
나는 여왕처럼 도도하게 책 사이를 휘젓고 다닌다. 제발 나를 좀 택해주세요. 호소하는 그들의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하기가 힘들다. 호화장정에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숱한 유혹을 물리치고 선택한 두엇, 둘이라서, 셋이라서 그들이 티격 대던가. 서로 질투하지 않는 애인들을 가슴에 꼬옥 안고 돌아오는 길, 그들과 나눌 쏠쏠한 사랑의 기대, 앞으로 펼쳐질 연애의 재미는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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