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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

우리 시어머니 이금례 여사님

by 호호^.^아줌마 2010. 2. 16.

벌써 몇 해짼지 모릅니다. 설, 추석이 왜 꼭 주일(일요일)에 드는 것인지, 교회학교 교사일을 하고 있는 막내며느리는 올 설에도 서둘러 교회를 갑니다. 대부분 부모님과 함께 명절을 쇠러 떠나는 애들이 있지만 또 교회를 나오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보통의 시댁 어른들이라면 "뭔 놈의 교회를 명절때까지 간다냐? 너 없으면 교회 안 돌아 간다냐?" 이럴 만도 합니다만, 우리 시어머니 "너 오면 예배드릴테니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싸목싸목 댕겨온나." 그러십니다.

 

시댁이 아주 먼 곳이라면 어쩌다 빠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주에서 광주, 광주에서 나주,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으면서 담임하고 있는 반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아침에 서둘러 갔다가 다시 끝나면 부랴부랴 큰댁으로 돌아옵니다. 가족들과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예배를 먼저 드리고 교회를 다녀올 수도 있지만 대게 전날 늦게까지 얘기꽃을 피우거나 윷놀이를 해서 딴 돈으로 노래방을 가거나 하다 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혼한 첫해 추석에는 시어머니께서 손수 차례를 지냈습니다. 음식장만은 며느리들이 같이 거들지만, 이튿날 아침 일어나보면 어머니께서 이미 차례를 지내시고 상을 물린 뒤였습니다. 왜 그러실까? 궁금했습니다. 맏며느리, 작은며느리. 막내며느리 모두 교회 다니는데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부담스러울까봐 당신께서 새벽에 일어나 혼자 상을 차리셨다가 아침나절 가족들이 모일 때면 치우시고 그냥 평범하게 아침식사를 합니다. 제사때도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집 며느리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러지 않으셨다면서 동서들은 황송하게도 제게 그 공(功)을 돌립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제가 결혼하기 일년 전에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신 아버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언감생심, 전통 유교방식의 제사며 차례를 파격한다는 건 생각지 못할 일이었겠죠.

 

그런데 그 이듬해 설을 앞두고 시어머니께서 더 파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느그 아버지 살아계실때는 아버지식대로 했는디, 아버지 돌아가셨으니 큰아들이 이 집 가장 아니냐? 느그 부부가 교회를 다니고, 셋째, 넷째 며느리도 교회를 다니니까 이제부터는 느그식대로 해라. 이런 일로 서로 마음 불편할 것 없이 어떻게 하든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겄냐?"

 

하지만 막상 교회식대로 하려니 약간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어머니와 며느리들은 예외없이 음식을 준비합니다. 이제부터는 제사를 위한 상차림이 아니라, 가족들을 위한 상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상 차려놓고 예배드리면 안되냐? 혹시 뭣 모르고 조상님들 오셨다가 빈상인 것 보면 서운하지 않겄냐?"하시는 겁니다. 며느리들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고 그러자 합니다.

 

상을 차려놓고 예배를 드리고 함께 모여 식사를 합니다. 예배인도는 제가 합니다.

"자네가 교회에서 애들을 많이 가르쳐봤으니까 자네가 하소."하는 큰동서의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큰동서가 못해서 맡긴 건 아닙니다. 큰동서, 중등교사인데다 전국적으로 회원이 수백명 되는 기독교사단체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뒤 유산정리를 할 때 자식들은 "아버님은 돌아가셨어도 어머니가 어른이시니까 어머니께서 알아서 하도록 하자."하여 선산은 장남 몫으로, 아버님 퇴직금으로 마련한 아파트는 아직 자립기반이 약한 막둥이 몫으로, 셋째아들네는 집장만할 때 도움 주셨으니까 그것으로 대신하고, 2층주택이 남았는데 어머니 소유로 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미국 LA에서 사업을 하시는 둘째아들네 집에 다녀오시더니 "나 혼자 그 큰집에 사는 것도 불편하고 세를 내놓아도 수리해주랴, 집세 문제로 서로 얼굴 붉히랴... 귀찮고 하니 팔아서 미국에 보내주면 어쩌겠냐?" 했는데 셋째아들과 막둥이아들은 흔쾌히 "어머니 하시고 싶은대로 하시라."고 했으나 금융기관에서 일하시는 큰아들은 "지금 부동산 시세도 좋지 않고, 원달러 환율이 떨어져서 돈을 보내도 미국에서는 별가치가 없어지니까 더 놔두었다 파시는 게 낫다."며 완곡한 반대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번 마음 먹으신 것을 돌리는 게 아쉬우셨던 어머니는 큰아들에게만 알리지 않은 채 기어코 집을 팔아 미국 작은아들네로 보냈고, 그로부터 몇 달뒤 큰집으로 3백만원에 가까운 양도소득세 고지서가 날아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때서야 큰아들 내외는 가족들이 자신들에게만 알리지 않고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속이고-  집을 팔았다는 사실을 아시고 어머니께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셨던 모양입니다. 그 일로 어머니가 병이 나자 큰아들 내외는 한달음에 달려와 어머니께 백배사죄하며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마음을 푸셨습니다.

 

그 즈음에 국내에서 손꼽히는 한 재벌가에서는 재산분배 문제로 며느리와 시아버지, 또 시동생들이 싸우고, 소송하고, 시끌벅적한 모습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릴 때였습니다.

 

그 시어머니가 올해는 힘이 없으십니다. 큰아들이 지난 연말로 정년퇴직을 하신데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 큰손녀는 아직 취업이 안된 상태고, 둘째아들네 외동아들이 대학입시에서 떨어져 재수를 한다는 것 때문에 노심초사하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큰집 둘째조카가 한국외국어대 경영학부에 입학해  경영학도 출신인 아버지의 뒤를 딸과 아들이 잇게 됐습니다.

 

그걸 보고 막둥이아들은 두 딸에게 "너희는 아빠처럼 법학을 공부하라"고 합니다. 父女 법학도가 되어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지만 두 딸의 대답은 이구동성으로 "싫어."입니다.

 

설날 오후 어머니를 모시고 광주 망월동시립묘역에 누워계시는 시아버님을 뵈러 갔습니다.

"죽은 구신이라도 암도 안 오면 얼마나 서운하겄냐?" 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모를리 없는 막둥이 아들의 청에 따른 것입니다.

 

 

 

지난 추석에 가져간 화분이 시들었습니다.

버릴까 하고 보았더니 속에서 움이 돋고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가만히 두었습니다.

할아버지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딸들은 단지 할아버지셨다는 것만으로도 동행하기를 기꺼워 합니다.

작은딸이 국화꽃을 드립니다.  

 

 

 

 

어머니와 저, 딸들은 기도를 합니다.

"저희에게 인자하고 자애로운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부모님으로 인해 우리 가족이 모두 화목하게 해주시고 우리 어머니 건강하게 지켜주세요..."

기도가 서툰 어머니는 영감에게 약속을 합니다.

"영감, 당신 죽고 선산으로 바로 들어가면 안 좋다해서 이곳에 임시로 묘를 썼는데

벌써 12년이나 흘렀구랴. 올해는 내가 아홉수라서 안좋다고 하니까

내년에나 선산으로 가입시다."

철없는 손녀들은 그 통에도 장난을 칩니다.

제가 봤더라면 머리 한대씩 쥐어박았을 것을...

 

 

다음은 막둥이아들 차롑니다.

그냥 절을 한답니다.

 

 

 

내년에 移葬할 준비를 하라며 신신당부하는 어머니를

막둥이아들이 손을 꼭 잡고 내려갑니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 초상이 나면 

혹시라도 그 혼령을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집밖에도 나가지 못했는데,

더구나 무덤 옆이나 공동묘지 옆은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한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이곳이 아무런 거리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 많은 무덤 가운데 한 곳에 우리 아버님이 계시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작년 11월 이후로 다리에 힘이 없어졌다는 어머니를 위해서

효자아들, 무등산 바람이나 쐬시라며 무등산장까지 왔습니다.

예전에 아버님 동창계에서 부부동반으로 놀러오셨던 곳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올라오시는 내내 "와따, 여기가 이렇게 변해부렀구만. 너 공부한다면서 묵었던 집이 저 집 아니냐? 그집 아제는 진즉 돌아가셨겠지야?"

말씀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종종 무등산 입구 보리밥집에서 계모임을 하면서 당신 아들이 이곳에서 고시공부 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얘기 하십니다.

"즈그아부지, 풍으로 떨어졌을때 막둥이가 공부하다 내려와서 병수발했지. 그때 그런 일만 없었으면 틀림없이 붙었을 것인디..." 아쉬워하시며.

 

 

무등산 댓잎에 이는 겨울바람.

중턱까지는 봄기운이 올라온 듯 한데

정상부근은 아직도 한겨울이다.

눈을 인 댓잎들이 서로 잎사귀를 부딪히며 서걱거리는 모습이

무등산의 정기를 말해주는 듯 하다. 

무등산, 우리 부모님의 살가웠던 추억이 어린 산,

또 우리 가족이 그 부모님의 추억을 좇아

다시 한번 쳐다보는 산, 무등산  

 

 

 

가문의 엄격한 규율 가운데 자녀들을 허용하시는 자애로운 부모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있고, 또 그로 인해 우리의 아들, 딸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가족은 축복이며 기쁨입니다.

우리 아이들, 바쁜 부모 때문에 저희들끼리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본 데 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큰집 조카들은 네살 무렵부터 할아버지 밑에서 무릎 꿇고 천자문이며 알파벳을 떼었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외가로나 친가에서 할아버지의 지엄함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명절을 통해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게되고 한번도 뵌 적은 없는 분이지만 존경심을 갖게됩니다.

특히나 초등학생인 큰딸은 할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셨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고무적입니다. 학교에서 제일 큰 어른인 교장선생님이 바로 할아버지라는 사실에 우쭐해 하는 모습이 눈에 역력합니다. 그래서 후손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우리 딸들에게, 손자손녀에게 우쭐한 기분을 들게 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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