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영청 둥근 대보름달에 물어볼까?
정월대보름이 멀지 않았다. 가장 큰 명절이었던 설은 오랜 귀성길에 시달리는데다 끊임없이 찾아드는 손님맞이로 지금까지 팔다리어깨가 욱신거린다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보름은 설에 버금가는 명절이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격식을 차려 지내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선지 오히려 느긋하게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월대보름은 가족과 일가친척의 차원을 뛰어넘어 마을공동체를 위한 명절이다. 요즘 사람들이 그 진정성을 믿든 안 믿든 당산제를 지내고, 집집마다 지신을 밟으며 잡귀를 몰아내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한다. 또 서로간의 단결과 화합을 이끌어내는 명절이 정월대보름이기도 하다.
정월대보름에 하는 세시풍속놀이 하면 대게는 불놀이를 떠올리지만 나주에서는 줄다리기에 대한 전통이 깊다.
한 팔순 할아버지는 나주사람들의 줄다리기에 대해 “한번 힘을 쓰고 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눈앞에서 노란 별들이 왔다갔다 하고 욕심이 과한 친구들은 대번에 이기겠다는 승부욕으로 나섰다가 손바닥이 상하거나 발톱이 빠지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오래전 나주읍성 사람들이 동·서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던 풍습은 가관이었다 한다. 이 줄다리기는 돌싸움과 장대놀이로 시작되는데, 어찌나 극성이었던지 박이 터지고 이가 부러지는 등 다치는 사람이 많아 없어지고 줄다리기만 이어져왔다.
놀이는 정초부터 시작해서 스무날 경에 끝이 났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먼저, 읍내 동쪽에 사는 사람과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 동서로 나뉘어 각기 마을 집집마다 새끼줄을 추렴하고 인원도 동원하고, 아녀자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줄다리기를 할 때 먹을 주먹밥을 만들기 위해 쌀을 거둔다. 새끼줄이고 쌀이고 거절하는 이가 없었다 한다.
양쪽은 가가호호에서 거둔 새끼줄로 각기 길이 300m, 앞부분 굵기 30cm쯤 되는 커다란 줄을 틀고 고를 만드는데, 서부가 남성의 고를, 동부가 여성의 고를 만든다. 줄의 크기는 줄 위에 앉으면 발이 들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나주가 낳은 대문호 오유권 씨의 소설 ‘방앗골 혁명’에 나주의 동서부줄다리기 장면이 등장한다. 온 고을 사람들이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같은 집안이라도 소속이 다르면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에는 말도 하지 않고 지냈을 정도로 그 승부를 크게 여겼다.
그리고 승부에 막바지에 다다르면 처음에는 청년들만 나섰다가 자기편이 조금 끌려가는 듯하면 아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줄에 달라붙어 줄을 당기면서 거의 닷새, 엿새 가량이나 남녀노소가 잠을 안자고 기를 썼다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승부가 나면 이긴 편은 승전고를 울리고 삼현육각을 잡히며 말을 타고 집집을 돌아다니면 집주인들이 술과 음식, 돈을 내놓고 승리에 즐겼다. 게다가 이긴 편에는 나주목사가 그 해의 부역을 면제해주기까지 했다니 더더욱 큰 승부였을 것이다.
보통 정월 보름날의 민속놀이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성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지만, 나주의 동서줄다리기는 서부측 남성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아마도 농사에는 남자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놀이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성행했는데 일본인들이 군중이 모여 단체경기를 하는 것을 꺼려 중단시켜 버렸다 한다. 그 뒤로 마을별로 소규모로 줄다리기를 하는 마을이 있지만 나주사람 전체가 줄다리기에 매달리는 전통은 맥이 끊긴 지 오래. 그런데 재작년 영산강문화축제에서 이 동서줄다리기가 대동줄다리기라는 이름으로 재연이 됐고, 지난해 정월대보름에는 영산강둔치 세시풍속놀이한마당잔치에서 선 보였다.
줄 맨 앞에 나란히 섰던 이가 신정훈 시장과 강인규 시의장이었다. 상대편 앞잡이는 정경진 문화원장과 이기병 도의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주발전을 위해 집행부 수장과 시민 대의기구 수장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줄을 당기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일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본 정치현실은 왠지 딴마음 딴뜻이 아니었던가 싶어 씁쓸하다.
나주사회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더구나 6월 지방선거까지 앞두고 있으니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이 간다.
휘영청 떠오를 대보름달에게 물어보고 싶다. 이긴 편의 할 일은 무엇이고, 진 편의 할 일은 무엇이냐고. 나주사회가 화합과 번영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나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레니엄 베이비 용띠 딸아이의 꿈 (0) | 2010.03.02 |
---|---|
비틀거리는 나주, 희망은 있는가? (0) | 2010.03.01 |
오늘은 너그러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0) | 2010.02.16 |
우리 시어머니 이금례 여사님 (0) | 2010.02.16 |
[스크랩] 5주년 블로그 생활기록부 (0) | 2010.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