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시 교동 주택가 깊숙한 곳에 자리한 나주향교
향교와 마주하고 있는 한 고가(古家)의 흙담벼락 밑에 돈나물이 수북이 자랐다.
흰머리가 곱디고운 할머니 한 분이 나물을 캔다.
싹둑 듬뿍 캐담는 것이 아니라
배게 자란 무더기에서 한잎한잎 솎아서 잎을 따신다.
아마도 곱게 자라난 돈나물이 꽃을 피워
새로운 봄날을 장식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신 요량이시리라.
"할머니, 나물 캐세요?"
"워이."
"할아버님이랑 드시게요?
"영감은 일찍 가고 없어. 손주들이랑 나랑 묵을라고..."
"돈나물을 어떻게 해먹어야 맛있어요?"
"그냥, 뭐... 초장 넣고 조물조물 해서 묵지. 깨도 넣고..."
"맛있겠네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그려. 욕봐. 근디, 아가씨여 아짐씨여?
"아짐씨요."
"그려? 근디 꼭 아가씨 같구만잉."
"호호^^"
아마도 어릴적 이 골목을 오가며 자주 뵈었던 분인듯 싶다.
웃으시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이다.
- 2010년 4월 21일 오전 나주향교 앞 골목에서 -
돈나물, 원래 돌나물이라고 한다.
아주 연약하게 생겼다.
생으로 나물을 무쳐먹거나 샐러드를 해먹는데 아삭아삭하면서도 부드럽다.
전체 줄기와 잎 모양도 예쁘지만 5~6월경에 피는 연노랑색 꽃도 앙징맞고 귀엽다.
잎에서 즙을 내서 독이 든 벌레에 물렸거나 쏘였을 때
해독용으로 쓰기도 하고 화상에 바르기도 한다고.
자연이 주는 선물은 하나라도 쓸모 없는 것이 없다.
나주향교 은행나무 고목에 피어난 봄
6백년 수령의 고목에 새순이 돋았다.
나주향교 대성전 뜰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
길고 험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중심가지 몇 개는 싹둑 잘려져 나가고,
병들어 도려내진 몸뚱아리 그 공허한 속을
인공의 물질로 채워두었는데 봄기운에 새잎이 돋아나
올해 또 나이테 하나를 더 두르게 됐다.
전국 어느 향교를 가나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은행나무는 공자네 집에도 심은 나무로써 공자의 무리들을 그래서 행단이라 했다.
은행나무는 남녀가 유별하며, 열매를 많이 맺어 제자들이 출세를 많이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벌레나 균을 제거하는 진액이 나와 질병이 없는 나무라 한다.
은행나무와 나란히 서있는 호두나무
감나무 새순
단풍나무 새순
나주향교 대성전 마당 은행나무 옆에 있는 호두나무의 새순
나주향교 대성전 마당에 피어난 꽃
잡초지만 예쁘다.
대성전 바로 앞 뜰에 피어난 제비꽃
이렇게 귀여운 녀석의 별명이 오랑캐꽃이라니...
나주향교 명륜당 너머 금성산에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나주향교 앞에는 충복사(忠僕祀)유허비가 있었다.
정유재란 때 향교 노비의 우두머리였던 김애남이 향교에 모셔진 위패를 안정하게 보관한 공을 인정하여 세운 것이란다.
유허비 뒤에는 공자 탄강 2475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노비를 기리는 사당이라! 노비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였을까?
아니면 노비조차도 저리 위패를 소중히 다루는데 멀쩡한 것들아, 똑 바로 하거라?
나주향교는 독특하게도 전묘후학 구조였다. 규모도 대단히 컸고 동재와 서재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
대성전의 기단석은 특이하게도 복연(伏蓮)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사찰 건물에서 가져온 듯하다.
사찰과 충복사라는 사당 그리고 향교... 조선시대이니만큼 최종 승자는 향교와 충복사라는 유교이데올로기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나주향교는 한창 80~100명의 생도를 수용한 곳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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