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가옥으로 지정된 다도 홍기종 가옥이 기둥뿌리가 썩고 해충이 들끓어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주 문화재가옥 장마에 썩고 해충에 쏠리고
다도 홍기종 가옥 나무기둥 썩고 해충 들끓어 ‘큰일’
홍기창·김효병 가옥 상주 관리인 없어 부실 우려도
남도의 전통 주택양식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된 문화재가옥들이 오랜 풍상을 견디지 못해 가옥 일부가 썩고 해충이 들끓어 관리에 빨간불이 켜졌다.
현재 나주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다도면 풍산리 홍기응 가옥(151호)과 홍기헌 가옥(161호), 남파고택(옛 박경중 가옥, 제263호)을 비롯해서 전라남도 민속자료인 다도면 풍산리 홍기창 가옥(9호)과 덕동리 홍기종 가옥(10호), 왕곡면 송죽리 김효병 가옥(11호) 등 6채의 문화재가옥이 있다.
이들 가옥들은 대부분 소유자 또는 그 가족들이 상주하며 관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홍기창 가옥과 김효병 가옥의 경우 상주하는 사람이 없이 대문을 잠가놓아 관광객들이 둘러보러 왔다가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허다해 문화재 지정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 이들 문화재가옥들이 대부분 오래돼 낡은 데다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거주자들이 연로한 경우가 많아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상태.
다도면 덕동리 홍기종 가옥의 경우, 현재 팔순을 바라보는 홍기종 씨 부부가 거주하고 있지만 홍기종(75)씨가 와병중인데다 부인 안순정(77)씨 역시 연로해 집안 안팎을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안순정 씨는 “시집 와서 55년째 살고 있는 집이지만 갈수록 집이 낡아지다 보니 봄에는 기둥에서 벌레들이 기어나와 온 집안을 뒤덮고, 여름에는 마당에 잡초가 무성해 아무리 뽑아내도 자고 나면 바로 무성해지니 해 볼 도리”가 없다며 하소연이다.
실제로 기둥 밑둥이 썩어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가 하면, 나무로 된 구조물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해충피해가 심한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나주시 문화재관리팀 김종순 팀장은 “홍기종 어르신이 직접 집을 관리할 때는 잘 유지가 됐으나 병환이 깊어지면서 할머니 힘으로 관리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밝히며 “기둥뿌리가 썩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라남도에 보수공사를 요청해 놓았기 때문에 내년에 예산이 세워지면 바로 수리에 들어가고, 해충 부분은 보건소에 의뢰해 정기적으로 방역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가 단지 홍기종 가옥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문화재가옥이 비슷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공공근로 인력 등을 활용해 이들 문화재들을 관리하기도 했으나 최근 정부예산이 크게 줄면서 이들 문화재가옥을 지원할 수 있는 인력과 예산이 태부족인 상태다.
이에 대해 지역 일각에서는 문화재 보존관리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나주시의 혜안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김양순 기자 ysnaju@hanmail.net
이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다도 덕동1리 입석마을 청년들이 마련한 복달임 행사내용 중에서...
이 두 분을 따라간 덕분에 나주의 문화재 한 곳을 알게 됐다.
홍기종 가옥(전남 나주시 다도면 덕동리 152번지)
전남 나주시 다도면 덕동리 입석마을.
여느 한적한 농촌마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이곳에 대략 150여 년 전 남도의 튼실한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민가 한 채가 남아있다.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홍기종 가옥’이 그것.
문간채는 최근에 복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져 있어서 이 곳으로 출입은 하지 못하고
옆으로 차나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길이 따로 나 있다.
2단의 높다란 석축 위에
생김새가 다른 두 건물이 얹혀 있는데 마치 육중한 성곽 같다.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깔리듯
벽면에 비치니 더욱 장중한 느낌을 준다.
두 건물 모두 사랑채인데,
널따란 툇마루가 시원하게 트인 오른쪽 건물은 바깥어른의 생활공간이고
창문 몇 개만 틔어 있는 왼쪽 것은 이 집에 기거하던
‘작은’ 안주인들의 거처라고 해서 ‘여자 사랑채’라고 한다.
여느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구조다.
아무리 집이 들어앉은 지형을 감안했다지만
전체적인 앉음새가 (보편적인 좌향인 남쪽도, 그렇다고 동쪽도 아닌) 서향이다.
굳이 이해해보자면 이 지역을 경계로 해서 서쪽은 드넓은 나주평야가 이어지고,
동쪽은 나주호 건너 족히 4∼500m가 넘는 산지가 첩첩이니
트인 곳을 향해 자리 잡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성벽을 거슬러 오르듯 곁으로 난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
반듯한 직사각형의 안채 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서 보는 두 채의 사랑채는 이내 반대의 양상을 띈다.
문간채에서 볼 때 개방적이었던 사랑채는 벽만 두텁고,
외려 ‘여자 사랑채’는 툇마루를 길게 뽑아 틔어 있다.
그러고 보면 ‘여자 사랑채’는 위치와 이름만 사랑채일 뿐
쓰임새에 있어서는 안채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사랑채 옆모습<좌>과 측간<우>
안채 옆, 사랑채와 나란한 방향으로
지금은 다 쓰러져 가는 창고 건물 하나가
힘겹게 서 있지만, 본디 이곳에는
다섯 칸짜리 별채가 있었다고 한다.
주인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해방되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건물 몇 채가 불타기도 하고
적지 않은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급격하게 쇠잔해졌다고 한다.
그나마 건물 두어 채가 온전히 남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창고건물 왼쪽에
마늘을 달아놓은 시렁이 이 집 안주인의
씀씀이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올 가을 김장철에 아들네집, 딸네집에
곱게 깐 마늘을 한 차두씩 보낼 것이 분명하다.
각종 농사도구가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사랑채와 수직 방향에 현재 집주인 내외가 살고 있는 안채가 서 있다.
문간채와 사랑채, 광 등 건물들은 많지만 안채 하나를 제외하면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 집 전체적으로 퇴락한 기운이 역력하다.
그나마 빨래가 널려 있고, 신발이 놓인 모습이 사람 냄새를 풍기고 있어 전혀 어수선해 보이지 않다.
유일하게 사람 냄새가 훈훈하게 밴 안채는 이 집에서는 유일한 남향이다.
널찍한 툇마루에 햇볕이 따사롭게 내려앉을 만큼 따뜻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가장 왼편에 있는 부엌은 공간을 넓게 사용하려는 이유에서인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T’자형을 이루도록 앞뒤를 반 칸씩 튀어나오도록 했는데, 실용성이 엿보인다.
150여 년 전 터를 닦고 이 집을 지을 때의 넉넉함과 풍요로움은 스러져 가는 건물처럼 사라져가고,
그 자리에 주인어르신의 허연 백발에 비친 쓸쓸함만 가득 남았다.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지만 보존도, 복원도, 수리도 다 관심 없다는 듯
헛헛하게 웃어 보이는 안주인의 얼굴에서 이 집의 현재를 가장 또렷이 볼 수 있다.
또 건물 앞뒤로 제법 넓은 툇마루를 뽑았는데,
바닥에 깐 나무가 뒤틀리지 않도록
굵은 쇠못을 군데군데 박아둔 점도
여느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사각기둥, 서까래부터
문지방에 이르기까지 굵은 목재를 사용한 탓에
튼실한 짜임새가 느껴지고 이 집을 지을 당시의
넉넉한 살림살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안채 바로 뒤편에 사당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숲만이 빼곡해 흔적을 더듬기조차 어렵다.
산책하듯 집을 둘러보는 동안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대숲 서걱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해 떨어진 어스름한 저녁에 이곳을 찾았다면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웠을 것 같다.
야트막한 산에 기댄 이곳이 명당이라기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는 이 집은
키 큰 대나무들이 집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폐쇄적인 요새와도 같다.
2단으로 된 높다란 석축 위에 성벽처럼 이어진 건물들의 이어짐도 그렇지만,
시내버스 다니는 도로에서도 아예 격리되어 있고,
인근의 덕동마을과 외따로 떨어진 채 토라져있는 위치를 통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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