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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이야기

국립나주박물관 “참 오래도 기다렸습니다”

by 호호^.^아줌마 2010. 8. 14.

◇전남지역 최초의 국립박물관이 될 국립나주박물관 청사진

 

 기획① … “와~ 박물관이 보인다”


 국립나주박물관 “참 오래도 기다렸습니다”


8월말 토지수용 결정 따라 9월 착공 2012년 완공목표로 ‘잰걸음’

유물전시위주 보다 다양한 역사·문화 체험공간 확보 ‘성공의 열쇠’


영산강 유역의 고대문화와 유적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국립나주박물관이 다음달쯤 첫 삽을 뜨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반남면 신촌리 자미산 자락 7만4천㎡ 부지에 건축연면적 1만1천㎡ 규모로 지어지는 국립나주박물관은 반남고분군과 다시 복암리 고분군 등 영산강 유역의 고대문화 유물들을 비롯해서 호남지역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을 보장할 수장고, 영산강 고대문화에 대한 조사·연구·발굴 등을 위한 각종 시설,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역사·문화 체험장 등이 마련될 계획이다.

하지만 전국의 내로라하는 국립박물관과 문화시설 등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놓고도 관람객 유치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도심에서 떨어져 들판 한복판에 들어서게 될 나주박물관이 ‘산지기집 거문고 신세’가 되지 않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나주뉴스>는 이번호와 다음호 두 차례에 걸쳐 국립나주박물관 추진현황을 살펴보고,  지방에 있는 전국 주요 국립박물관 비교답사를 통해 나주박물관 성공의 열쇠를 찾아본다. / 편집자주



국립나주박물관의 규모와 역할


고분군이 있는 밀집해있는 반남면 신촌리 자미산 자락 7만4천300여㎡ 부지에 들어서는 국립나주박물관은 총 사업비 400억원이 전액 국비로 지원돼 건축면적 1만950여㎡에 지하 2층, 지상 1층으로 지어진다.

박물관이 들어서는 자미산 일대는 영산강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국보 제295호 금동관을 비롯해 금동신발, 대형옹관고분 등이 출토된 역사적 현장이다.

박물관에는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시대(BC 4세기~AD 1세기 추정)의 유물을 비롯해 영산강 유역에서 살았던 고대인의 묘제(墓制) 등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 일대에는 사적지로 지정된 대안리 고분군(76호)과 신촌리 고분군(77호), 덕산리 고분군(78호)이 산재해 있으며 금동관과 각종 옹관, 토기 등 수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미뤄지고 또 미뤄지던 착공식, 9월엔 정말?


2007년 1월, 사업시행주체인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박물관 유치를 위해 10년 남짓 치열한 경합을 벌여왔던 나주시와 영암군의 유치경쟁에서 나주시에 최종낙점을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사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문화재발굴조사용역과 부지매입이 늦어지면서 3년여 세월을 보낸 끝에 지난 1월말 박물관에 대한 청사진을 선보인 뒤 2월부터 본격적으로 토지보상과 문화재 현상변경 절차에 들어가 일부 토지에 대한 수용재결신청이 마무리되는 8월말 이후 착공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이로서 착공일정이 지난해 11월에서 올해 7월로 늦춰진데 이러 다시 9월중으로 미뤄졌지만 확실하게 9월중에 착공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도 불투명한 상태다.

다음달을 전후해 정부 개각이 단행될 것으로 예정된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거취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전례를 살펴볼 때 국립박물관 착공식에는 문화체육장관부 장관이 반드시 참여했고, 사안에 따라 대통령의 참여도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시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5일 있었던 문화체육관광부 박광무 문화예술국장의 행보를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박광무 국장은 아시아문화전당 관련 행사 참여를 위해 광주를 방문했다가 나주를 방문, 국립 나주박물관 건립현장 등 주요 문화시설을 둘러보고 지역 문화예술계 대표들과 곰탕으로 오찬을 나누며 간담회를 가졌다.

이는 9월을 전후해 열릴 나주박물관 착공식에 대통령이 참석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 2007년 1월 국가사업으로 국립나주박물관 건립계획이 확정된 이후 2년 4개월만인 지난해 5월, 유물발굴조사를 앞두고 열린 개토제(開土祭)에서 반남고분군유적보존회 정재갑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박물관 건립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

 

 

국립박물관 유치, 10년의 경쟁과 3년의 지연


전남지역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박물관이 없는 곳으로, 정부는 1998년 다시면 복암리 일대를 건립 예정지로 선정했으나 외환위기 이후 사업 추진이 보류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국립나주박물관 건립은 무려 13년에 걸쳐 지역민들과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정치권이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건의하고 요구함으로써 얻어낸 결실이기도 하다.

반남면에서는 지난 1977년 정재갑 씨와 정승원 씨 등 지역주민과 출향인사 등을 중심으로 반남고분군유적보존회를 구성하고 지역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반남고분군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펼쳐왔다.

정재갑(87)회장은 “그때 당시에는 국가에서나 나주군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던 터에 주민들이 호주머니 추렴으로 기금을 만들어서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유적의 유래를 밝히고 자료를 만들어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국립나주박물관 건립사업은 이에 앞서 지난 96~97년 중앙정부예산이 책정됐으나 나주시와 영암군이 설치장소를 놓고 갈등을 벌인데다 관계당국의 소홀로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치열한 각축전을 펼친 끝에 반남면이 최종 후보지로 확정되기까지는 지역민들의 오랜 숙원과 함께,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국보 295호로 지정하는 데 기여한 정호선 전 국회의원의 노력과 국립박물관 기본 실시설계 용역비 10억원(국비)을 확보하는 데 막후역할을 한 최인기 국회의원의 공로가 크다는 것도 지역민들의 전언이다.

나주시 문화관광과 김종순 담당은 “박물관이 건립되면 나주가 명실상부한 역사문화도시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나주호 관광지, 나주영상테마파크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 관광자원으로도 활용가치가 높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울러 박물관 예정지 일대 유물 발굴조사를 실시했던 동신대유적조사단의 이정호 단장은 “박물관이 완공되면 주변에 분포한 다시면 복암리 고분은 물론, 영암 마한문화공원 등 많은 고대문화유적과 연계한 관광자원화로 영산강문화의 르네상스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박물관은 반남면 일대 대형옹관고분 35기에서 출토된 유물을 비롯해서 영산강유역 고대세력이 최전성기를 누렸던 중심 지역으로서 전시 유물의 역사적 현장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아울러 박물관이 완공되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신촌리 9호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 금동관(295호)을 비롯해 영산강 고대문화의 독특한 대형옹관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옹관, 토기 등 수백여점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바로 이것…국립나주박물관을 빛나게 할 유물


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보 제295호) 

지정(등록)일 1997. 09. 22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국립광주박문관에 전시되고 있는 이 금동관은 아직까지는 백제시대 유물로 분류되고 있다.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높이 25.5㎝의 금동관이다. 나주 신촌리 9호 무덤은 1917∼1918년에 일본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금동관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대륜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내관인 모자는 전북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와 일본에서도 비슷한 것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 교류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바로 이 사람…국립나주박물관을 빛나게 할 인물


인권운동의 어머니 소심당 조아라 여사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는 ‘광주의 어머니’ ‘민주화의 대모’ ‘조선의 할머니’라 불리는 여성민주화운동가 소심당(素心堂) 조아라(1912~2003)여사의 고향마을로 지난달 8일이 선생의 7주기였다.

해마다 선생의 기일을 전후해 광주전남지역 여성계에서는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는 가운데 우리지역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조아라 여사는 1912년 3월 28일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서 조형률 장로와 김성은 여사 사이에 3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나 1927년 광주 수피아여고를 졸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광복 후 여성·인권운동에 헌신하고 소외된 계층과 항상 고난을 함께 나눈 사회운동가였다.

1936년 수피아여학교가 신사참배·창씨개명을 거부해 폐교될 때 동창회장으로 이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검거돼 수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출범시켰으며 이후 광주YWCA재건, 수피아여학교 재건 등의 활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기와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1947년 광주YWCA 재건 때 상무이사로 선임된 뒤 1973년까지 26년간 총무,1979년부터 1983년까지 13대 회장을 거쳐 이후 명예회장으로 물러날 때까지 광주 YWCA와 여성운동·사회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50년대 7∼8년간 전남도 후생국 후생과 부녀계장으로 공직생활을 했으며 1951년에는 전쟁 고아들을 위한 성빈여사(聖貧女舍)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3년제 야간중학교인 호남여숙(湖南女塾)을 설립했으며 청소년 야학인 별빛학원, 소외 받는 여성들을 위한 계명여사,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이사장을 맡아 소외 계층을 위한 복지운동도 이끌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에는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지난 2003년 7월 8일  지병으로 작고할 때까지 ‘민주화운동의 대모’ ‘광주의 어머니’로 불렸다.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동신대 이정호 교수는 “반남면이 역사의 고향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의 산실로서 새롭게 부각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며 큰 기대감을 밝히기도. / 김양순 기자  ysnaj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