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랬구나!’
김수평 /나주뉴스 독자위원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오래 전부터 눈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시로 눈물이 나고 책이라도 볼라치면 돋보기를 쓰지 않고는 볼 수 없습니다. 부우옇게 시야가 흐려 저만치서 오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안(老眼)이려니 하고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가끔은 병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응급환자로 만들어 곤욕을 치르지 않을까 걱정도 했습니다.
축구공만한 인간의 머리로 만든 내놓으라하는 가전제품도 그 수명이 10년 이쪽저쪽입니다. 그러나 눈은 이리 오래 쓰고도 더 쓸 수 있게 만든 조물주의 섭리에 경외감마저 느낍니다. 그동안 볼 것 안 볼 것 가리지 않고 함부로 굴렸으니 눈도 속앓이를 많이 했겠다고 자책 합니다. 이제 고장이 나도 크게 날 것 같아 날잡아 병원에서 수리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토요일이면 산소에 가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빼먹지 않고 새벽이면 교회를 찾는 어머니들의 지성스런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말없이 혼자 걷는 길에 많은 생각이 깔립니다. 마치 생각의 파편들을 한 조각 한 조각 밟으며 걷는 것 같습니다. 깊은 상념에 젖어 걷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립니다.
“나 옥섭이네.”
“어, 웬일로?”
“점심이나 같이 하세.”
“이 사람아, 아직 열두 시도 안됐구만.”
“그러니깐 도서관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리로 갈게.”
도서관에서 친구를 기다립니다. 썬그라스를 쓴 채 앉아서 기다립니다. 얼마 전에 눈 수술을 했습니다. 햇빛이 빛날수록 눈이 맥을 못춥니다. 그래서 썬그라스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이 나처럼 실내에서 썬그라스를 쓰고 있으면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보았을까. “개멋이 들어도 한참 들었네. 해수욕장도 아닌데 웬 썬그라스?” 이렇게 비아냥대지는 않았을까?
“왜 실내에서 썬그라스를 쓰세요?”
“예, 며칠 전에 눈 수술을 받아서 그럽니다.”
‘아, 그랬구나!’ 개멋이 아니라 그래서 그랬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물리적인 눈’은 침침해도 ‘마음의 눈(心眼)’은 맑게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신호등도 무시한 채 정신없이 건너세요?”
“아이고, 하나밖에 없는 어린 자식이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가서 그랬습니다.”
‘아, 그랬구나!’
언젠가 읽었던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기차 안에서 고만고만한 어린애들이 통로를 뛰어다니며 아수라장을 만듭니다. 아버지인 듯한 사람은 차창만 너머다 볼 뿐 도무지 애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린애들보다 아버지가 더 괘씸해 보다 못한 승객이 “왜 애들을 야단치지 않으세요?” “죄송합니다. 저 애들 엄마를 산에 묻고 오는 길이어서 어찌할 수가 없네요.” ‘아, 그랬구나!’
혼자 있으면 온전하게 내가 나의 주인이 됩니다. 누구랑 같이 있으면 절반은 내가 아닙니다. 따라서 생각도 실하게 영글 수 없습니다. 친구를 기다리는 덕택에 깨달음이 큽니다. 친구를 기다리는 덕택에 깨달음이 큽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인생의 큰 재산입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 그랬구나!’하는 생각을 얼마나 해 보았을까.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되레 상처주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가 베푸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타인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도 자비 아닐는지요. ‘아, 그랬구나!’하고 말입니다.
삶의 길목에 복병처럼 숨어있는 고통도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눈 수술이라는 고통의 와중(渦中)에 ‘아, 그랬구나!’하는 값진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래, 고통도 밀쳐내기보다 살갑게 보듬고 다독이며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인가요?
여생을 ‘아, 그랬구나!’하는 온유(溫柔)한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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