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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이야기

나주시향토문화유산 14건 지정 고시

by 호호^.^아줌마 2011. 8. 10.

 

 

나주시향토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고시


나주시향토문화유산보호조례 제10조의 규정(나주시향토문화유산보호위원회 심의 :

2010. 12. 24.)에 따라 나주시향토문화유산(지정구역 포함)으로 지정키로 심의된 문화유산을 행정절차법 제46조의 규정에 따라 지정고시를 위한 행정예고(나주시공고 제2011-166호, 2011. 3. 31. ~ 4. 19.)를 거쳐 나주시향토문화유산(지정구역 포함)으로 지정하고 동 조례 제10조의 규정에 따라 고시합니다.


2011.  7.  26.


나  주  시  장


1. 지정고시 내용

   가. 나주시향토문화유산 지정 : 14건(錦社亭, 褒忠閣, 歸來堂, 永泰閣, 함평이씨 참판공문중 소장 고문서, 榮江祠, 月井書院, 景賢書院, 구 금남금융조합, 구 왕곡공립심상소학교, 구 나주잠사, 남평 주조장, 죽림사 석불좌상, 운흥사 석불좌상)

2. 지정고시기간 : 나주시보 고시일로부터 30일간

3. 지정일자 : 시보 고시일

4. 지정고시 세부내용

 

 


가. 나주시향토문화유산 지정내용

 


(1) 月井書院

    ○ 지정번호 : 제16호

    ○ 소 재 지 :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406번지

    ○ 소 유 자 : 월정서원 유회, 홍찬주(종중재산), 홍동희

    ○ 지정구역 :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406번지, 409-3번지 등 2필지 1,934㎡

    ○ 시    대 : 1664년 최초 건립, 1974년 현 위치에 재건

    ○ 지정사유 : 월정서원은 원래 나주 금성산 월정봉 아래(현 상담비가 세워진 곳)에 있다가 1868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유허비를 세우고 설단향사하다가 1974년 현재 위치로 사우와 강당 등을 옮겨 복설한 것이다.

 

월정서원은 1659년(효종 10) 沙庵 朴淳(1523~1589)의 학덕을 흠모하던 도내 유림들에 의해 발의되고 洪逴이 상소를 올려 1664년(현종 5)에 창건되었다. 1669년(현종 10) 사액이 내려졌고 초대원장을 閔維重, 院貳는 南九萬으로 주로 서인노론계 인사들이 원장을 역임하였다.

 

1787년(정조 11)에 중수가 이루어졌고, 1789년(정조 13) 유생 38인과 태학 유생의 상소로 金繼輝, 沈義謙, 鄭澈, 洪千璟이 추배되어 모두 5위가 제향되었다. 월정서원은 경현서원과 함께 16~17세기 나주지역의 사족동향과 서원향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유적으로, 나주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액서원이기 때문에 역사적 보전 가치가 높음

 


(2) 景賢書院

    ○ 지정번호 : 제17호

    ○ 소 재 지 :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529-1번지

    ○ 소 유 자 : 서흥김씨호남종중

    ○ 지정구역 :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529-1번지 746㎡

    ○ 시    대 : 1584년 최초 건립, 1977~1980년 현 위치에 재건

    ○ 지정사유 : 경현서원은 조선유학의 정통을 대변하는 많은 인물들을 배향하던 곳으로 나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83년(선조 16) 나주를 중심으로 한 도내 유림들이 상소를 올려 김굉필을 배향하는 서원 건립이 허락되었다.

 

당시 나주목사 김성일이 적극 지원하여 이듬해인 1584년(선조 17) 나주 서문밖 대곡동(현재 경현동)에 ‘錦陽書院’으로 건립되었다. 김성일에 이어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任允臣 목사 때 이 지방 유생인 나시침의 아들인 羅德峻, 羅德潤 등이 발의하여 1589년(선조 22)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李滉 등 4위를 배향하여 五賢祠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나주목사로 부임한 睦長欽이 전라도관찰사 박승종의 후원과 뜻있는 사림과 협력하여 1608년(광해군 원년) 중건하였고, 1609년(광해군 1)에는 호남유생 金璇 등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景賢’이란 액호를 하사받았다. 그후 1693년(숙종 19)에는 高峰 奇大升, 鶴峰 金誠一을 추배하여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경현서원은 16~17세기 나주지역 사족동향과 서원향전, 을미옥사의 발생원인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중서원이 아니라 나주지역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사액서원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역사적 가치가 높음

 


(3) 榮江祠

    ○ 지정번호 : 제18호

    ○ 소 재 지 : 나주시 영산동 39-8번지

    ○ 토지소유자 : 경주이씨성암공파나주대종중(영강사)

    ○ 지정구역 : 나주시 영산동 39-8번지 667㎡

    ○ 시    대 : 1712년 최초 건립, 1956년 재건

    ○ 지정사유 : 영강사는 경주이씨 명현선조 6위를 享祀하는 祠宇로, 1712년(숙종38)에 창건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己卯名賢 李蟹(1468~1525)와 조카 李永祐, 이해의 증손이자 효행으로 이름이 높던 李有慶(1543~1609) 3인을 배향하였다. 그 후 1722년에 강당을 지어 사우가 아닌 ‘서원’의 구색을 갖추었고, 1732년에는 李黿(? ~1504)을 추배하였다.

 

이원은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나주로 유배 왔던 인물로, 그의 배향을 계기로 영강서원은 경주이씨만의 문중서원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났다. 영강사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문중사우이지만 향촌사회사의 관점에서 볼 때 당대의 나주사회와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어 보전할 가치가 있음

 

 

(4) 褒忠閣

    ○ 지정번호 : 제19호

    ○ 소 재 지 :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717-3번지

    ○ 토지소유자 : 함평이씨호암공문중, 이재경

    ○ 지정구역 :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717-3번지 96㎡

    ○ 시    대 : 1894년

    ○ 지정사유 : 포충각은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전 순절한 함평이씨 李止得

(1555~1594)의 정려이다. 1893년(고종 30) 정려가 내린 후 후손인 南坡 李鐸憲이 중심이 되어 1894년 함평이씨 집성촌인 샛골(草洞) 초입에 건립되었고, 1967년에 중수를 거쳤다.

 

이지득은 진사 李惟講의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군량미로 공급했으며, 張景弘ㆍ張景男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참전하였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흥양포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포충각은 다시면 샛골의 함평이씨 집성촌의 상징물로서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지역의 역사규명 측면에서 보전 가치가 있음

 


(5) 錦社亭

    ○ 지정번호 : 제20호

    ○ 소 재 지 :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130번지

    ○ 토지소유자 : 나주나씨금사정파일손종중

    ○ 지정구역 :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130번지 1,121㎡

    ○ 시    대 : 1519년 최초 건립, 1665년 중건

    ○ 지정사유 : 금사정은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죽음 이후 그와 뜻을 같이 했던 나주 출신 선비들 11인이 고향으로 돌아와 ‘금강계’를 결성하고 영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지은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665년에 중건했다가 1869년에 중수, 1973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금사정은 조선시대 나주지방 사림파의 행보와 契會 운영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중요함.

 

 

(6) 歸來堂

    ○ 지정번호 : 제21호

    ○ 소 재 지 :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615-1번지

    ○ 토지소유자 : 풍산홍씨호은공문중

    ○ 지정구역 :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615-1번지 215㎡

    ○ 시    대 : 1623년 최초 건립, 1996년 중건

    ○ 지정사유 : 귀래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壺隱 洪民彦(1537~1626)의 講學處이다. 홍민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從弟 洪民聖과 의병 5백 명을 모집하여 조헌의 진지로 출병하였다. 그러나 錦山에 도착하기 전 조헌이 순절하자 崔時望과 함께 雲峰으로 진격하였다.

 

특히 南平 지석강 전투에 참전하여 현감과 함께 왜적 3백여 명을 베고, 포로 152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도 兵糧을 모집했으나 왜적이 물러감으로 義穀을 관에 바쳤다. 전란이 끝난 후 通訓大夫司僕寺主簿에 올랐으나, 계축옥사(1613)의 화를 입어 寧越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귀래당’이라는 당호는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지은 것이다. 인조반정 후에 벼슬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동안 의병에 대한 평가는 순절한 인물에 집중되어 살아남은 유공자들의 행적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따라서 홍민언의 사적은 지방의 역사로서 발굴될 필요가 있으며, 홍민언과 관련하여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관련 유적이나 유물은 그가 쓴「歸來堂記」현판과 귀래당 터에 중건된 지금의 건물뿐이라는 점에서 보전할 가치가 있음

 

 

(7) 永泰閣

    ○ 지정번호 : 제22호

    ○ 소 재 지 :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 500번지

    ○ 토지소유자 : 정요원

    ○ 지정구역 :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 500번지 100㎡

    ○ 시    대 : 1926년

    ○ 지정사유 : 영모각은 경주정씨가 집성하고 있는 석해마을 내에 자리 잡은 경주정씨 교수공파 鄭碩敏(1859~1926)의 비각이다. 비각 내에는 어려운 사람을 구휼한 정석민의 공적을 적은 시혜불망비가 서 있는데, 1920년대 건립된 건축물로는 가구나 단청, 문양 등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잘 남아 있어 건축적 가치가 있음.

 

 

(8) 함평이씨 참판공문중 소장 고문서

    ○ 지정번호 : 제23호

    ○ 소 재 지 : 나주시 다시면 월태리

    ○ 소 유 자 : 함평이씨참판공파문중

    ○ 지정내용 : 교지 8매, 성책문서 등 총 25건

    ○ 시    대 : 조선시대

    ○ 지정사유 : 함평이씨 참판공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는 함평이씨가의 내력을 방증해 줄 유일한 자료라고 하겠다. 함평이씨는 조선시대 나주의 大姓 가운데 하나였으며, 역사적으로 탐구해볼만한 성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전래하던 고문서들이 대부분 소실되고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고문서와 특히 문중조직 관련 성책문서들은 함평군 이극명을 정점으로 한 후손들의 장기적인 문중활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회사적인 가치가 있음


〔표〕咸平李氏 參判公 門中 소장 문서 목록


번호

분류

자료명

연대

크기(세로×가로cm)

1

敎書

敎忠洪道水軍節度使李止孝

措備軍粮軍器賞加書

萬曆41年(1613, 광해군5)

86.4×168

2

敎旨

展力副尉李宗仁(武)科別試

甲科第二人及第出身者

弘治7年(1494, 성종25)

85.3×59.8

3

幼學李惟謹進士三等第三十六人入格者

嘉靖25年(1546, 명종1)

91.5×43

4

進士李惟謹文科乙(科)第六人及第出身者

嘉靖40年(1561, 명종16)

126.8×61

5

學生李止孝武科乙科第二人及第出身者

萬曆17年(1589, 선조22)

81.8×59.4

6

前兼司僕李先哲武(科)

丙科第一百二十四人(及)第出身者

萬曆36年(1608, 광해군원년)

85.8×70

7

李止孝爲嘉善大夫行忠洪道水軍節度使者

萬曆40年(1612, 광해군4)

71×74.8

8

李先哲爲折衝將軍者

萬曆47年(1619, 광해군11)

53.6×126.6

9

李先哲爲通政大夫行德川郡守者

天啓元年(1621, 광해군13)

53×53.7

10

分財記

子先哲亦中登科別給成文

萬曆37年(1609, 광해군1)

83.4×134

11

准戶口

幼學李儒聖

乾隆57年(1792, 정조16)

53×49.8

12

성책문서

咸平君後孫省墓錄

壬戌(1682, 숙종8)

37×25.3

13

粉土洞墓所宗約

崇禎紀元後三庚戌(1790, 정조14)

35.5×25

14

粉土洞學稧新設案

崇禎紀元後四丙戌(1826, 순조26)

36.5×25.2

15

粉土洞追完約

乙巳(1845, 헌종11)

34×29.3

16

櫃中所座置簿記

己巳(1869, 고종6)

25×23

17

禾穀記

庚子(1900, 광무4)

24×22.5

18

宗中錢穀傳與記

丁丑(1937)

21.5×21.5

19

禾穀記

庚寅(1950)

19.5×20.5

20

咸平君門中傳與冊

辛丑(1961)

31.5×27

21

輔門契置簿記

壬寅(1902, 광무6)

23×21.5

22

大門中加冠錢收納冊

丙戌(1946)

24×19

23

咸平君墓祭祭官錄

乙巳(1965)

29×26

24

任員錄(宗會)

戊申(1968)

30×27

25

契案(敦睦契)

辛亥(1971)

30×27


 

(9) 구 금남금융조합

    ○ 지정번호 : 제24호

    ○ 소 재 지 : 나주시 금계동 19번지

    ○ 소 유 자 : 강재수

    ○ 지정구역 : 나주시 금계동 19번지 145㎡

    ○ 시    대 : 1907년(추정)

    ○ 지정사유 : 금남금융조합 건물은 장식을 통해 서양의 양식건축을 충실히 따르려는 의도가 보이는 한국 근대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고, 외관은 당시의 관공서 건축양식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음

 

 

(10) 구 왕곡공립심상소학교

    ○ 지정번호 : 제25호

    ○ 소 재 지 : 나주시 왕곡면 옥곡리 64-28번지

    ○ 소 유 자 : 이정만

    ○ 지정구역 : 나주시 왕곡면 옥곡리 64-28번지, 64-36번지 등 2필지 3,230㎡

    ○ 시    대 : 1924년

    ○ 지정사유 : 구 왕곡공립심상소학교는 1924년에 일본인 학생들을 위해 세워진  일제강점기 교육시설이다. 당시 학교규모는 교실 하나에 교사가 1명, 학생수가 15명 내외 정도가 있었던 걸로 전해진다. 해방 후에는 왕곡초등학교 분교로 활용되다가, 1957년 이남수가 국가로부터 불하받은 후, 후손들(이병구-이정만:현 소유자)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위는 일본식 지붕형태와 기와, 그리고 일부 남아 있는 비늘판벽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일제강점기 소학교 건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희귀성이 있음

 

 

(11) 구 나주잠사 <오른쪽 사진>

    

    ○ 지정번호 : 제26호

    ○ 소 재 지 : 나주시 금성동 29-1, 21-4, 21-6, 21-7, 22-3, 22-4, 27-7, 24-4 등 8필지

    ○ 소 유 자 : 나주잠사주식회사, 최남희

    ○ 지정면적 : 3,935㎡

    ○ 시    대 : 1950년대

    ○ 지정사유 : 나주잠사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주양잠조합으로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수개동의 건물들은 모두 벽돌조 건물로서 붉은 벽돌조의 시공방법으로 보아 1950년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대 공장건물로서의 가치가 있음.

 


(12) 남평 주조장

    ○ 지정번호 : 제27호

    ○ 소 재 지 :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64번지

    ○ 소 유 자 : 이광열

    ○ 지정구역 :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64번지 344㎡

    ○ 시    대 : 1930년경(추정)

    ○ 지정사유 : 건물의 평면을 살펴보면, 출입구는 건물 전면의 우측면 구석에 위치하여 입구부에 사무실과 내실을 두었다.

 

이 공간은 근대의 것 그대로 온전히 남아 있다. 중앙의 작업장을 중심으로 상부와 하부에 술을 만들고 저장하는 각종 시설과 공간을 배치하였다.

 

특히 중앙 작업장의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물의 배수를 원활히 하였고 화로와 굴뚝을 작업장 우측 구석에 두었다.

 

우측의 작업실 뒤로 계단을 두어 직원숙소를 배치하였는데 그곳에 193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다미방을 두었고, 천장과 벽체구조 등의 목가구 형식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작업장의 들보나 2층 마루바닥, 지붕틀 구조는 원래의 것으로 남아 있지만, 2층으로 오르는 사다리는 사라졌다.

 

이 건물은 몇 개의 실들을 제외하고 근대의 구조부재와 가구부재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견실한 내부 구조체와 의장재 등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전가치가 높음

 


(13) 죽림사 석불좌상

    ○ 지정번호 : 제28호

    ○ 소 재 지 :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1번지 죽림사

    ○ 소 유 자 : 죽림사

    ○ 지정규모 : 불상 1구

    ○ 시    대 : 고려시대

    ○ 지정사유 : 이 불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구례 사도리 석불좌상과 영암 도갑사 석불좌상과 비교해 볼 때 11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기법으로 볼 때 구례, 김천, 양산, 창녕, 함양의 석불좌상 등과도 연계되고 있어 각 지역간의 교류와 전통적인 양식이 고려 초반기까지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어 보전할 가치가 있음.

 

 

(14) 운흥사 석불좌상

    ○ 지정번호 : 제29호

    ○ 소 재 지 :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 971-3번지 운흥사

    ○ 소 유 자 : 운흥사

    ○ 지정규모 : 불상 1구

    ○ 시    대 : 고려시대

    ○ 지정사유 : 이 불상은 그 외모에서 나타난 기본형식은 영암도갑사석불(보물 제 89호)과 연계되고 있으나 양각의 깊이, 얼굴과 어깨로 이어진 접속부분의 불균형, 의문의 간략화 및 좌우측 손목과 손가락의 어색함 등 불상의 기본적인 조형성이 떨어지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두광에 나타난 화사한 인동당초문과 화염문의 활기 넘치는 기법에 비해 움츠린 듯한 어깨선의 둔화, 법의의 형식화된 옷주름과 수인에서 드러난 어색한 기법 등은 이 불상의 연대를 내려오게 하는 요소라 하겠다. 조성연대는 고려말 14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석불은 1960년대 후반, 나주 동강면의  밭에서 발견된 것인데 2001년 3월 20일,  운흥사에 기증되어 현재 운흥사 팔상전에 봉안되어 있다. 인체에 대한 실재감의 결함이나 얼굴에 나타난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점 등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화염문과 인동당초문 등 원형 두광을 갖춘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보전가치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