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읍성 동점문은 고려말 나주로 귀양온 삼봉 정도전이 문루에 올라 연설을 했고, 2005년 복원 당시 도올 김용옥이 현판글씨를 썼다. 문화관광자원으로서 활용가치가 무한하지만 현재 이 모양이다.
나주문화, 확실한 콘텐츠를 잡아라②
수원화성, 대구읍성, 그 보다 더 좋은 ‘나주읍성’
나주읍성 복원사업 오락가락 속 “호남웅도 부활의 날갯짓 돼야”
역사·문화·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 나주문화 아이콘으로 충분
역사문화도시 나주, 나주에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일까.
나주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자원이다. 하지만 없는 것 역시 문화다. 가장 나주적이고, 나주를 자랑할 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발끈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세계를 향해 나주의 ‘이곳’, 나주의 ‘이것’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나주문화, 이제는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 이미 콘텐츠는 충분하다. 무엇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관건이다.
고려초 전국 12목 중 하나로 나주목이 설치된 뒤 912년 동안 300명이 넘는 목사(牧使)가 나주를 거쳐 갔다. 삼봉 정도전의 아들 정진, ‘홍길동전’의 허균, 행주대첩의 장군 권율, 퇴계학파의 적통 학봉 김성일 등이 나주목사를 지냈다. 얼마나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가.
하지만 지금의 나주는 늙고 지친 모습이다. 영남의 경주나 안동은 옛 도시의 영광을 제법 번듯하고 고상하게 되살려 놓았는데, 옛 호남의 웅도 나주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나주읍성의 복원을 통해 그 영화를 재현할 수 있을까. 수원화성과 대구읍성 복원사업의 현장을 통해 그 가능성을 살펴본다. / 편집자 주
도시 속에 살아있는 한국의 멋, 수원화성
정조와 정약용이라는 한 시대의 걸출했던 인물의 역사와 스토리텔링이 엮어져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수원화성. 지난달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관장 선윤홍)에서 운영하는 나주시민역사교실 회원 30여명이 그 현장을 찾았다.
화성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km의 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장헌)세자의 무덤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지었는데, 1794년 착공해 1796년 9월 10일에 완공됐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평지 산성으로 군사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과학적, 실용적인 구조로 축성됐다.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화성장대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화성의 완급과 사방의 허실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팔달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앉은 자리에서 사변을 제어할 만하다고 하여 건축했다.
역시나 정상에서 내려다 본 수원시내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래쪽으로는 화성행궁이 보였고, 도로를 주변으로 번성한 시가지도 눈에 들어왔다.
화성의 서남쪽으로 이동하면 효원의 종이 보인다. 효원의 종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타종은 모두 세 번으로, 첫 번째는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두 번째는 가족의 행복을 빌면서, 세 번째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타종한다고 한다. 이 종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어 사용료를 조금 지불하면 종을 칠 수 있도록 하여,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동시에 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일석이조의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 나주시민역사교실 수강생들이 지난달 수원화성을 둘러보며 나주읍성 복원의 가능성과 나주역사문화도시 성공의 열쇠를 찾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수원화성 복원에 정부와 경기도 딴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보여지는 수원화성이 있기까지 수원시민들은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수원화성 복원을 위해 수원시는 지난 10여년 동안 조 단위의 재원을 투자했다. 이 과정이 이곳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세월이었다고.
과거 화려했던 남문상권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상권자체의 유지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이곳에 건축물 하나를 신축하려고 해도 문화재관리법에 저촉되며, 무엇을 하나 계획해도 ‘특별관리구역’ 이라는 미명에 묶여 재산권행사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또한, 수원화성을 복원하는 비용도 수원시민이 세금으로 다 지불해야만 했다. 유네스코는 지정만 할 뿐 재정적 지원을 일체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재원이 모두 수원시민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 수원시장은 물론 지역 의원들도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정부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속이 좁아터진 사람이라면 차라리 사적3호인 수원화성을 없애자고 할 만한데 수원시는 여전히 복원에 매달렸다. 이렇게 되자 수원시민들은 지난 10년간 수원시민이 시민의 세금으로 이 만큼 복원했으면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복원사업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
수원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진 화성 일대를 화성열차를 타고 돌아보았다. 화성열차는 많은 관광객들이 쉽게 수원화성을 관람하고 즐길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는 열차시스템이다.
곳곳에는 정류장이 있어서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면서 관람할 수도 있고, 계속 열차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아다닐 수도 있다. 시속도 빠르지 않아, 천천히 여유있게 주변의 경치를 관람할 수 있어서,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은 물론 일반 관광객들도 흥미만점이다.
수원화성을 돌아보며 부러움과 한탄의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온다. 불과 215년 전에 지어진 수원화성과 고려시대에 지어져 천년 목사고을의역사와 전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주읍성. 나주는 왜 진즉 나주읍성을 복원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만시지탄의 아쉬움을 안은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 역사와 문화, 생태환경이 어우러진 수원화성 복원을 위해 수원시민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조 단위의 재원을 투자했다.
대구읍성, 주민주도 근대역사문화벨트만들기로 부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실시한 ‘2011 지역문화콘텐츠 현장탐방연수’ 참가자들이 대구읍성 복원현장인 대구의 중심 중구를 찾았다.
대구읍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 축조됐다. 이 때 쌓은 읍성은 토성이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대구가 함락될 때 파괴되고 말았으므로 그 규모 등 구체적인 것은 알 길이 없다.
문화관광해설사에 따르면, 일제초기 이 대구읍성은 대구시민에게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상징이 되었던 것인데, 교통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일인들이 관찰사를 시켜 뜯게 했다. 겉으로는 성들 뜯어 그 자리에 길을 낸다고 하고선 길 폭은 좁히고 남은 땅은 일인들이 집을 지었던 것이다. 왜적을 막기 위하여 쌓았던 성벽이 왜인의 건의에 따라 철거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큰 도시의 중앙로는 왜 2차선일까? 그 답은 중구에서 시범도시로 선정되어 진행하고 있는 ‘대구읍성의 부활! 주민주도의 근대역사문화벨트만들기’와 관련이 깊다.
이 사업은 주민참여를 넘어선 주민주도형 사업으로써 대구중심에 그 동안 쌓여온 역사와 생활을 시대의 부산물로 만들지 않고 잘 가꾸고 계획하기 위해 2009년 시범도시로 지정되었다. 주민위주의 도시활성화사업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각 지구의 사업들은 아직 진행 중인 곳이 많고 2011년 말 각종지구들의 사업이 완료된다고 한다.
◇ 대구시 중구에서는 ‘대구읍성의 부활! 주민주도의 근대역사문화벨트만들기’사업을 통해 골목길문화를 지역의 문화관광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다.
골목문화가 곧 대구문화다
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골목길 탐사에 나섰다. 오래된 건물과 시장이 주는 느낌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꼬불꼬불한 길과 오래된 건물은 잘만 활용한다면 향촌동 문학골목 만들기 사업은 불필요하게 재건축을 하지 않아도 활력과 건전성을 찾을 수 있는 모범답안이 될 것이다.
골목 여기저기를 돌고 돌아 들어간 곳이 진골목이다. 진골목은 골목 가꾸기 사업을 통해서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든다는 것이 목표이다. 진골목에 들어가면 마당 깊은 집, 서재균의 생가 등 그냥 걷다보면 놓치고 지나칠 건물들이 많다.
방문자들에게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주요하게 볼만한 곳에 문패나 그림 등 표시를 해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느낌은 살아있다. 하지만 걷고 싶은 골목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관광객이 들어가서 참여하고 볼만한 것들 흥미진진한 것들을 주민들이 궁리하고 적극 참여해야 할 것 같다.
진골목에서 바로 나오면 종로거리가 나온다. 도로중심부에는 종로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보도를 깔았다. 종로를 지나 전통한옥만들기사업 중인 지구에 오면 아직 주민참여가 미비한 듯하다. 지나가면서 일반 도로를 걷는 느낌이고 중간 중간 기와가 눈에 띄지만 통일되지 않아있다.
근대문화골목 만들기도 마찬가지이다. 동성로와 떨어져 있을수록 정비가 되지 않은 평범한 길이 많았다. 전통한옥만들기사업의 경우 현재 많은 마을, 도시에서 추진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사업을 하기 힘들면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하는 자세가 필요할 듯도 싶다.
중구 중앙로를 중심으로 한 대구읍성거리와 그 안쪽은 정말 다양했다. 접할 수 있는 문화적인 것들이 많다. 피난문학거리, 걷고 싶은 진골목, 종로거리와 경상감영, 전통한옥, 근대문화골목 등 어떻게 보면 정비할 것이 많아 부족해 보이는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넓은 부지도 아닌 곳에 테마가 많이 들어가면 별로다. 정말 특화할만한 테마 두, 세 개를 가지고 집중하는 편이 현제 사업 중인 이 지역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주민위주의 도심활성화사업은 대단위 도심활성화사업보다 그 지역을 잘 알고 있고 집행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이 수렴되기 때문에 민주적이고 특색 있는 도심활성화 사업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주민들의 동기유발이 힘들고 주민들이 참여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금새 관심도 시들해지기 쉬워 계획뿐인 도시활성화사업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놓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서성문 서쪽에 옛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른 지역은 개발로 인해 모두 허물어졌지만, 여기는 갈 데 없는 사람들이 흙으로 올린 성벽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성벽이 그대로 남게 됐다.
나주읍성 복원, 다시 일어설 호남웅도의 날갯짓
그렇다면 나주읍성은 어떤가. 읍성복원을 위한 사업으로 남고문, 동점문에 이어 서성문이 복원되고, 이제 마지막으로 북망문을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성문 복원만으로 끝낼 것인지, 읍성복원까지 이뤄낼 것인지를 두고 나주시가 갈등하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나주읍성의 복원은 많은 사업비와 다소 번거로운 절차 등이 염려되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복원을 통해 나주문화의 중심 아이콘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폭넓게 개진되고 있다.
나주읍성은 영산강 물길을 따라 내륙 깊숙이 침입했던 왜를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견고하고 굳건한 요새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2005년 복원한 나주읍성 정문 동점문은 정조가 수도 이전을 꿈꾸고 설계한 수원화성의 정문 팔달문이 연상될 만큼 위풍당당한 풍모를 자랑한다.
고려 말 나주로 귀양을 왔던 삼봉 정도전이 동점문에 올라 연설을 했고, 2005년 복원 당시 도올 김용옥이 현판 글씨를 썼다.
나주의 다른 이름이 ‘소경(小京)’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표현으로 ‘작은 서울’이란 뜻이다. 나주가 딱 그렇게 생겼다. 금성산을 뒤에 두른 채 영산강이 앞에 흐르고 있고 나주천이 시내를 관통하고 남산이 있다. 서울로 빗대면, 북한산과 한강과 청계천과 남산이다. 지세만 닮은 게 아니다.
나주목의 위세도 서울 못지않았다. 그 증거가 나주목 객사 금성관이다. 금성관은 97평 규모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객사다. 화려한 팔작지붕을 얹고 있는 본당의 위세가 자못 당당하다. 객사는 지방에서 왕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전국의 객사에는 숱한 사연이 쟁여져 있다.
금성관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정식을 열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됐을 때 유림이 모여 곡을 했고, 광주민주화운동 때 나주시민이 모여 시위를 벌였고, 일제는 금성관을 나주군청 청사로 고쳐서 사용했다. 흥미로운 건 금성관의 현판이다. 힘찬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누가 썼는지 아는 이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나주읍성에도 고유의 골목길이 있어 많은 얘기들이 소곤거려진다. 금성관 주위로 난 연애고샅길. 두 명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닿을 만큼 좁아 남녀가 이 고샅에 들어서면 연애를 한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사매기길도 있다. 고려 때 현종이 거란족을 피해 나주로 몽진했을 때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건너 이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고 ‘사마교가 있는 길’이 세월이 흘러 사매기길이 됐단다.
서성문 서쪽에 옛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른 지역은 개발로 인해 모두 허물어졌지만, 여기는 갈 데 없는 사람들이 흙으로 올린 성벽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성벽이 그대로 남게 됐다.
이 성벽을 활용해 읍성을 복원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가능성을 두고 나주가 본격적인 고민에 빠져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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