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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시인

나해철...나, 영산강 다정하게 흐르리라

by 호호^.^아줌마 2009. 1. 24.

나, 영산강! 다정하게 흐르리라. 

 

                                               시·나해철/그림·윤희동


다정하게 흐르리라 그리운 사람 기다리며 꽃 지면 꽃잎 안고 잎 지면 붉은 잎 업고 하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있으리라 세월은 아름다와서 지나간 기억들이 모두 꿈같고 원컨데 슬픔의 바다로 가고 싶진 않아 흐르면서 기다리리라


나, 영산강! 다정하게 흐르리라


시·나해철


다정하게 흐르리라
그리운 사람 기다리며
꽃 지면 꽃잎 안고
잎 지면 붉은 잎 업고
하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있으리라
세월은 아름다와서
지나간 기억들이 모두 꿈같고
원컨데 슬픔의 바다로 가고 싶진 않아
흐르면서 기다리리라
아름다운 사람
눈 맑은 청년
나와 함께 기쁨의 바다를 이룩할 사람
지금은 아픈 가슴으로
거리를 떠돌며 이름을 부르고 있을 그 사람
언젠가 돌아와 내 얼굴 부비며
함께 흘러 황홀한 하늘에 가 닿을 사람

물굽이에 펼쳐진 하얀 내 살 밭 위에서 어린 소년이었던 너는 뒹굴며 지냈다. 어느 날은 장년의 네 아비와 그 형제들과 함께 내 살을 간지럽히며 손톱만한 강 조개들을 잡기도 했다. 나 흐르는 곁의 드넓던 들을 너는 안마당 삼아 드나들었다. 봄이면 자운영 꽃굴헝에 누워 한 잠 자고, 가을이면 푸르른 잎의 하얀 무우를 뽑아 손톱으로 돌려 까며 먹었다. 여름이면 그 발갛고 귀여운 붕알 내어놓고  헤엄치며 물장구치며 자맥질하며 놀았다. 나는 네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알았다. 방물장수로 바빠서 열흘이고 보름이고 집을 비웠던 네 어미보다 더 너를 잘 알았다. 나는 그 때부터 너를 품에 안았고 사랑했다. 나 말고 엄마가 그리웠던 네가 작은 꼬마 염소를 기르기 시작했을 때도 네가 나 흐르는 곁 둑 위에 하루 종일 염소를 매어 두었다. 나는 네가 하늘을 보느라 누워 저물 무렵이 되어버릴 때가지도 네 염소를 너 대신 돌보았다. 그즈음 며칠 무슨 비가 그렇게 많이 와 나는 쏟아지는 물을 감당할 수 없어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강 둑 아래 네 집에서 강 둑 위의 네 작은 고모 집으로 피신을 와 밤새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던 너를 위해 나는 죽을힘을 써 그 물들을 바다로 내 몰았다. 나는 너의 슬픔에 견디고 너의 기쁨에 잊었다. 네가 지금 어느 거리에서 오두커니 서서 갈 곳을 몰라 할 때 내 가슴 치는 물결치는 소리 너는 듣는다. 너를 깨우기 위해 내가 부르는 슬픔의 노래를 너는 듣는다. 나는 너의 슬픔에 견디고 너의 기쁨에 잊는다.  
  
다정하게 흐르리라
그리운 사람 언제라도 물결치는 소리 듣도록
나는 다만 흐르는 것만으로도
소년을 키워냈다.
청년이 되게 하였다
조용히 흐르면서 좀 더 맑게 흐르고자 했을 뿐
감히 도로가 되고자 했을까?
컨테이너 가득 싣고 달리는 산업도로가 되고자 했을까?
다정하게 흐르리라
다만 흘러도
자세히 보라
꽃잎들, 이파리들, 소년들, 염소들, 무우들, 자운영꽃들
자맥질, 웃음소리, 강조개잡이, 황토빛 노을...
다 모여 불 밝히고 있는 것을
오직 흐르는 것만으로도
좀 더 맑게 흐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세상에 소중한 모든 일들을 이루어 왔다
나를 하냥 흐르게 하라
이 모습으로
그 사람 언제까지라도 여기서 기다리게... ...              


나해철 님은 나주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시인은 ‘영산포’라는 시로 첫걸음을 떼었다. 시인의 시어는 다정다감하고 맑고 투명하다. 어떤 이는 ‘시인의 영산포 연작은 강가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불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끝끝내 말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마음결이 언어를 다듬어 홀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리라. 시집으로 ≪무등에 올라≫, ≪동해일기≫, ≪아름다운 손≫, ≪긴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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