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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박석무...정조 친필 어찰(御札)에 대하여

by 호호^.^아줌마 2009. 2. 16.

 

정조 친필 어찰(御札)에 대하여


300통에 가까운 정조의 친필 어찰이 새롭게 발견되어 세상이 온통 야단법석입니다. 새로운 ‘정조실록’이니, 정조독살설은 ‘기각’ 되어야 한다느니, 조선 후기의 역사를 ‘다시 써야한다’는 등의 온갖 주장들이 신문의 지면을 가득 메우기도 했습니다.

단정적으로 어떤 결론을 말하기에는 아직 성급한 형편입니다. 그러나 다량의 어찰 발견은 역시 큰 사건임에는 분명합니다.

예의나 격식을 철저하게 준수하던 일국의 제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편지의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나 사인들끼리의 주고받는 편지처럼 격의 없는 용어를 사용하고, 막말까지 거침없이 사용한 임금의 편지는 여러 면에서 많은 흥미를 일으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조의 재위시절 가장 높은 신임을 받고 크게 능력과 학식을 인정받았던 다산 정약용의 기록을 통해서도, 정조의 높은 학문 수준, 뛰어난 문화의식, 정치적 개혁사상 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규장각이나 교서관 등에서 학문을 토론하고 도서출판에 관여하던 문신들에게 밤마다 맛있는 음식을 하사하고 술을 대접해준 자상한 임금이기도 했지만, 의리에 분노하는 경우에는 우렁찬 목소리로 뇌성벽력이 치는 무서운 어명을 내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1795년은 정조 재위 19년의 해였습니다. 그해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이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회갑해이기도 했습니다.

그해 봄 정동준(鄭東俊)이라는 간신을 처형하고 뭇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 날, 정조의 노기에 찬 어성(御聲)을 다산이 제대로 묘사한 글이 있습니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납시어 뭇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데, 말소리가 큰 쇠북 소리와 같았고 진노하기를 벼락치는 것처럼 했다.”라고 기술하고, 뭇 신하들이 벌벌 떨면서 움츠러들어서 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날 남인의 채제공을 좌의정에 발탁하고 이가환을 공조판서에 제수하였고, 다산은 승지로서 왕명을 받아 전하는 일을 했노라고 기록하였습니다.(「貞軒墓誌銘」)

학자군주 정조는 이렇게 무서운 카리스마를 지닌 제왕이었습니다. 이번 어찰의 내용으로 보면 정치감각도 매우 뛰어나 반대파의 수장에게도 온갖 친밀한 감정을 표출하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인재도 등용하고, 반대파의 협력도 얻어내는 정치력이 있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정치세력 판도로는 특정의 집단만으로는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정파를 아울러 탕평적 정치를 펴려던 뜻으로 보면 별다른 해석을 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특히 정조의 독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거기에 초점을 맞출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다산이 주장했던 대로, 정조의 독살설은 그야말로 ‘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산은 ‘독약을 먹였다더라’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만 말했습니다.(「紀古今島張氏女子事」) 정조가 신이나 성인이 아닌 이상에야, 화를 내기도, 분노를 느끼기도, 즐거움을 표현하기도, 급한 김에는 쉽게 말을 토해내기도 하는 거야 인간이라면 의당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일로 여기면, 그것도 크게 부각시켜 떠들썩하게 야단피울 소지가 없습니다.

편지 전체가 번역되어 공개되고, 학자들이 심도 있게 분석 검토하여, 실록이나 일성록 및 승정원일기에 빠진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정조시대를 조명하는 보충자료로 활용하면 됩니다.

선정적이고 센세이션날한 부면만 부각시켜 다시 역사를 왜곡하는 잘못이 없기를 바랄뿐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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